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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이 성북동 간송미술관 정원에 있는 간송 전형필선생의 동상 앞에서 하트 포즈를 취하며 그의 민족을 생각하는 정신과 문화지킴이로서의 열정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다.
▲ 간송동상 앞에 모여선 문학도 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이 성북동 간송미술관 정원에 있는 간송 전형필선생의 동상 앞에서 하트 포즈를 취하며 그의 민족을 생각하는 정신과 문화지킴이로서의 열정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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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의 문화공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간송과 근원이다. 간송에게 민족의식과 전통 미의식을 가르쳐준 인물이 바로 위창 오세창 선생(1864~1953)이다. 위창은 천도교인이면서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였다. 그런 점에서 위창의 정신은 만해 한용운으로 이어진다.

며칠 전 3.1절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이들의 업적에 대해 고개 숙이게 된다. 맑은 물 흐를 간(澗)과 추운 날씨에서도 독야청청한다는 의미의 소나무 송(松)을 호로 내려준 인물도 위창이다. 간송이 휘문고보를 다니면서 맺어진 인연이 춘곡 고희동이다. 또 그에게 영향을 미친 또 한 명의 인물이 이종사촌형인 월탄 박종화이다. 간송이 평생 민족정신을 투철하게 견지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러한 큰 인물들과의 친교에서 비롯된다.
 
전형필은 그동안 수집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관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였다. 간송미술관 서예고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신윤복의 <단오풍정>( 『혜원전신첩』, 국보 제35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국보 제294호),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 68호),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 제 72호), 김홍도의 <황묘농접>, 신윤복의 <미인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소중한 문화재가 쌓여 있다.
▲ 성북동 소재 간송미술관  전형필은 그동안 수집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관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였다. 간송미술관 서예고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신윤복의 <단오풍정>( 『혜원전신첩』, 국보 제35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국보 제294호),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 68호),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 제 72호), 김홍도의 <황묘농접>, 신윤복의 <미인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소중한 문화재가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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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1906~1962)은 일제가 수탈해서 가져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되찾아오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32년 인사동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골동과 고서적을 수집해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수많은 회화, 도자기, 금속공예품, 전적 등 국보급 문화재를 지켜내고 보존해 나갔다.

이러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1938년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했다. 또 1940년 폐교 위기의 민족사학 보성학교를 인수해 후학 양성에 헌신하는 한편 잠시나마 교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성북동 문화의 중심, 간송미술관
 
전형필의 자취가 서린 가옥이다. 아버지 전명기가 인근 농장과 경기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890 ~ 1900년대 건립하였다. 이 가옥 뒤에 간송 전형필과 부친 전명기의 묘역이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지만, 전형필 사후에 종로4가에 있던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로 수리가 이루어졌으며 재건 이후 전명기와 전형필의 제사 때 재실로 주로 사용되었다.
▲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간송옛집 전형필의 자취가 서린 가옥이다. 아버지 전명기가 인근 농장과 경기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890 ~ 1900년대 건립하였다. 이 가옥 뒤에 간송 전형필과 부친 전명기의 묘역이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지만, 전형필 사후에 종로4가에 있던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로 수리가 이루어졌으며 재건 이후 전명기와 전형필의 제사 때 재실로 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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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던 천태산인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으로부터 자신의 집안에 내려오는 보물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러한 정보를 간송에게 전해주자 간송은 거간꾼인 이순황을 통해 이용준과 접촉할 것을 지시한다.

드디어 당시로선 거금인 만원을 주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쥔다. 간송은 조선어학회 임원들을 초대해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알리고 영인본을 만드는 작업을 돕는다. 한글의 창제원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이다.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지금의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은 역시 삼재의 진경산수화와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손꼽히는 것은 겸재 정선의 한양 근교의 명소를 그린 화첩인 <경교명승첩>과 금강내산과 문관암일출 등이 담긴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다. 다음으로 간송미술관은 단원 김홍도의 '국추비순'과 '황묘농접'(노란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 '쌍작보희' 등을 소장하고 있다.

또 간송이 혜원의 풍속화첩을 일본인 고미술수집가인 야마나카로부터 협상을 통해 구입한 과정은 실로 전설로 전해진다. 그렇게도 어렵게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기생, 풍류, 놀이, 왈자패 등의 풍속이 담긴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제 135호)이 바로 그것이다.
 
노란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의 의미를 지니는, 세필로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은 <국추비순>과 <쌍작보희> 등 수많은 단원의 국보급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2010년 10월 <화훼영모전>을 통해 일반 관람객들에게 공개하였다.
▲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 노란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의 의미를 지니는, 세필로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은 <국추비순>과 <쌍작보희> 등 수많은 단원의 국보급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2010년 10월 <화훼영모전>을 통해 일반 관람객들에게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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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와 백자를 비롯해서 불교문화재 등 이러한 국보급 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해 당시 기와집 2000채를 쏟아부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우리 문화재 지키기에 헌신하던 간송은 1962년 급성신우염으로 57세에 자신이 태어났던 종로 4가 112번지 자택에서 서거한다. 그의 장지는 부친과 함께 방학동에 안장되어 있다. 간송 전형필이 양주 농장을 방문할 때나 제사를 모실 때 재실로 사용하던 '간송옛집'이 무덤 앞에 남아있다.

성북동을 유명한 예술가의 성지로 만든 또 한 명의 인물이 바로 월북예술가인 근원 김용준(1904~1967)이다. 김용준은 일제 말기에 정지용, 이태준, 이병기 등과 함께 잡지 <문장>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김용준의 상고주의적 전통론은 일제의 관변미술가들이 불교미술의 전통만을 중시해 당풍을 이어받은 통일신라와 불교미술이 꽃피었던 고려미술만을 높이 평가하는 식민지 사관에 용감하게 맞서면서 내세운 예술론이다.

김환기가 예술을 꽃피운 곳
 
과학고에서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고개 밑에 있는 ‘수향산방’ 집터다. 원래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이었지만, 그가 일제 말기에 경제적 사정이 있어 팔게 되자 아끼는 후배인 김환기에게 이 집을 넘긴다. 김환기와 김향안부부는 ‘수향산방’에서 1944년부터 10여 년간 거주하면서 한국전쟁의 시련도 겪으면서 초기의 전통적 화풍의 추상화를 그려나간다.
▲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 집터 과학고에서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고개 밑에 있는 ‘수향산방’ 집터다. 원래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이었지만, 그가 일제 말기에 경제적 사정이 있어 팔게 되자 아끼는 후배인 김환기에게 이 집을 넘긴다. 김환기와 김향안부부는 ‘수향산방’에서 1944년부터 10여 년간 거주하면서 한국전쟁의 시련도 겪으면서 초기의 전통적 화풍의 추상화를 그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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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은 조선조 후기의 남종문인화풍을 계승하고 대중화하려고 하던 추사, 단원, 혜원, 오원 등의 문인화·산수화·풍속화를 무시하던 풍토에 맞섰다. 또한 이들 작품에는 근대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생(寫生)의 근간이 되는 사실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규명해 소재주의 중심의 미학관을 '정신주의 미학관'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근원은 성북동에 노시산방(老柿山房)의 서재를 차려놓고, <문장>을 편집하면서 친교를 맺게 된 정지용, 손재형, 이태준, 길진섭, 김환기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초대했다.

사실 근원이 성북동에 들어온 계기는 이태준이 수연산방(壽硯山房)을 차려놓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해방 직후 서울대에 미술학과가 창립되자, 교수로 가면서 아끼던 후배인 수화 김환기를 데리고 간다. 그 외에도 김용준이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해 1944년에 집을 내놓게 되자, 그 집을 인수한 수화 부부(김환기·김향안)가 '수향산방'이란 이름으로 약 10년간 거주하게 된다.
 
수화 부부의 묘소는 뉴욕 근교 ‘웨스트체스터 공동묘지’(Kensico Cemetery)에 묻혀있다. 2009년과 2017년 두 차례나 뉴욕 외곽에 있는 웨스터체스터 공동묘지를 찾았으나 2009년에는 억수로 내리는 비 때문에 찾기를 포기했다. 안식년을 활용하여 듀크대학교에 1년 방문교수로 있는 동안 캐나다를 방문한 후  3 ~  4일의 시간을 내서 꼭 찾기로 맹세했다. 찾기 어려웠던 이유는 언론 부고를 보고 찾아간 뉴욕 근교의 ‘웨스터체스터 공동묘지’가 한 개의 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엄청나게 큰 카운티의 개념이라 그 안에 30여 개의 1만 ~ 6만기의 묘를 가진 공동묘지가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찾아낸 사무실에서 관리직원이 아날로그 방식의 옛 묘소지도를 보여주며 찾아가 보라고 말해주었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 김환기의 뉴욕 소재 ‘묘소’ 찾아가기 수화 부부의 묘소는 뉴욕 근교 ‘웨스트체스터 공동묘지’(Kensico Cemetery)에 묻혀있다. 2009년과 2017년 두 차례나 뉴욕 외곽에 있는 웨스터체스터 공동묘지를 찾았으나 2009년에는 억수로 내리는 비 때문에 찾기를 포기했다. 안식년을 활용하여 듀크대학교에 1년 방문교수로 있는 동안 캐나다를 방문한 후 3 ~ 4일의 시간을 내서 꼭 찾기로 맹세했다. 찾기 어려웠던 이유는 언론 부고를 보고 찾아간 뉴욕 근교의 ‘웨스터체스터 공동묘지’가 한 개의 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엄청나게 큰 카운티의 개념이라 그 안에 30여 개의 1만 ~ 6만기의 묘를 가진 공동묘지가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찾아낸 사무실에서 관리직원이 아날로그 방식의 옛 묘소지도를 보여주며 찾아가 보라고 말해주었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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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김환기(1913~1974)는 이헌구의 소개로 알게 된 이산 김광섭과 친교를 맺는다. 1967~1969년 사이에 뉴욕에 머물면서 점묘화를 실험하던 김환기와 편지를 주고받던 김광섭은 시선집을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 들어있던 시 '저녁에'는 수화에게 커다란 창조적 영감을 준다.

마침 <한국일보>가 주최한 한국미술대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수화 점묘화에 날개를 달아준다. 아쉽게도 뉴욕생활을 하던 김환기는 디스크 수술을 하러 입원한 병원에서 사소한 의료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큰 충격을 안겨준다.
 
뉴욕 외곽 ‘켄시코 공원묘원(Kensico Cemetery)’에 김환기 ? 김향안 부부는 묻혀있다. 유럽의 유명 관광상품 중 유명 예술가의 무덤을 찾아가는 명품 관광상품이 있다. 주로 인기있는 고흐, 뭉크, 차이코프스키, 플로베르, 모파상, 에밀 졸라, 하이네, 톨스토이, 베토벤, 모차르트, 헤겔, 칼 마르크스 등의 무덤을 찾아가는 코스이다.
▲ 김환기부부의 묘소 뉴욕 외곽 ‘켄시코 공원묘원(Kensico Cemetery)’에 김환기 ? 김향안 부부는 묻혀있다. 유럽의 유명 관광상품 중 유명 예술가의 무덤을 찾아가는 명품 관광상품이 있다. 주로 인기있는 고흐, 뭉크, 차이코프스키, 플로베르, 모파상, 에밀 졸라, 하이네, 톨스토이, 베토벤, 모차르트, 헤겔, 칼 마르크스 등의 무덤을 찾아가는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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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부인 김향안의 각고의 노력으로 수화는 뉴욕시대를 새롭게 열어가던 '표현추상주의'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한편 부암동 환기미술관의 개관과 일체의 미술품의 기증으로 현재 한국에서 그림값이 최고 비싼 화가로 떠오르게 된다. 수화 부부의 묘소는 뉴욕 근교 웨스트체스터 공동묘지(Kensico Cemetery)에 묻혀있다.

철원 출신인 상허 이태준(1904~1970)은 1933년 구인회에서 활동한 모더니스트였다. 그의 초기 단편소설은 현실에서 좌절한 인간의 모습들, 이를테면 실직자, 쓸쓸하게 병을 앓고 있는 환자, 실연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등등을 주로 다루었다. '달밤'(1933), '복덕방'(1937), '영월영감'(1939), '밤길'(1940) 등에서 소외된 인간을 그려나가는데, 이러한 인물형상은 개인적 성격의 문제라기보다는 식민지 현실과 모순된 근대라는 현실적 조건과 연관성이 있다.
 
과학고에서 삼청터널 쪽의 길을 찾아가다 보면 성북동 중심가에 이태준이 1933년부터 살았던 ‘수연산방’이 길 오른쪽에 보인다. 마침 성북동 주민센터 자리에 ‘성북구립미술관’이 생기면서 바로 그 이웃에 있어 찾기가 쉬워졌다. 수연산방에서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도 300m 거리에 있다.
▲ 성북동의 터줏대감 ‘수연산방(壽硯山房)’  과학고에서 삼청터널 쪽의 길을 찾아가다 보면 성북동 중심가에 이태준이 1933년부터 살았던 ‘수연산방’이 길 오른쪽에 보인다. 마침 성북동 주민센터 자리에 ‘성북구립미술관’이 생기면서 바로 그 이웃에 있어 찾기가 쉬워졌다. 수연산방에서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도 300m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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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그리고 한용운

사실 이태준이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재직 중 사장인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오감도'를 신문에 게재해서 이상의 문명을 날리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상허는 1933년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차려놓고 문필가로 활약했다. 수연산방에는 김용준, 정지용, 길진섭, 손재형, 박태원, 이상 등이 드나들었다. 1999년부터 외증손녀인 조상명이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일제 말기인 1940년 <문장>에 '고완품과 생활'이란 글을 게재하면서 "청년층지식인들이 도자기를 수집하는 것은 고서적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古物)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정말 고완(古翫)의 생활화가 있는 줄 안다"고 썼다. 그렇게 상고주의를 내세워, 김용준–이태준–김환기로 이어지는 예맥을 형성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시기까지 수화의 그림에는 이러한 화풍이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시인으로서 88편의 주옥같은 시작품을 수록한 『님의 침묵』을(1926)을 남기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거주했다가 1944년 입적했던 서재이다. 문을 나가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 김광섭을 기리는 북정동의 ‘성북동 비둘기’공원이 나온다.
▲ 심우장 일제 강점기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시인으로서 88편의 주옥같은 시작품을 수록한 『님의 침묵』을(1926)을 남기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거주했다가 1944년 입적했던 서재이다. 문을 나가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 김광섭을 기리는 북정동의 ‘성북동 비둘기’공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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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을 지사적 풍모로 바꿔준 인물은 만해 한용운(1879~1944)이다. 만해는 충절의 고향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일제에 쫓겨 1905년 백담사로 들어가 출가를 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참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만해는 당시 "내가 옥중에서 느낀 것은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이올시다"라고 하는 담대한 호연지기를 기자에게 말해서 민족투사의 모습을 보였다.

이후 풀려난 그는 1926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했고,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살다가 1944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 그의 무덤은 망무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심우장을 지을 때 총독부와 등지게 하기 위해서 북향으로 지었다는 풍문에서 일제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민족적 절개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다음은 '서촌 문화탐방'으로 이어집니다.)

태그:#보화각(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이태준의 <수연산방>, #김환기의 <수향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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