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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박정희 대통령 동상
 구미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박정희 대통령 동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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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박정희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한 때는 1926년 4월 1일이라고 한다. 그 무렵 구미보통학교는 구미면 내 유일한 공립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기자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면 내에 3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다. 구미 동부초등학교는 구미면 광평동에, 구미서부초등학교는 봉곡동에 있었다.

이 기사를 쓰고자 구미교육청 홈페이지에서 연혁을 확인해봤다. 현재 구미시에는 모두 52개 초등학교에 2만8471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이렇게 학교와 학생수가 많은 까닭은 구미시가 이웃 면들을 모두 흡수 통합했고, 구미공단이 내륙 최대의 산업단지로 비약적 발전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 박정희가 살던 당시 상모동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려면 8km나 떨어진 곳(현재 구미면 원평동 구미초등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회고한 박정희 일기의 한 장면은 이렇다.

"상모동에서 구미면까지는 약 8km로 20리 길이었다. 나는 구미보통학교를 1926년 4월 1일에 입학했다고 기억한다. 아침 8시에 학교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20리 길을 걸어서 그 시간에 닿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늦었다고 생각되면 구보(뜀박질)로 20리 길을 거의 뛰어야 했다. 동리에서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고, 다만 학교에 가는 도중 만나는 우편배달부를 보고서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빠르다' '늦었다'를 판단했다.

봄과 가을은 연도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상쾌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기쁘기만 하였다. 하지만 여름과 겨울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삿갓을 쓰고 간다. 아랫도리 바지는 둥둥 걷어 올려야 한다. 학교에 가면 책보의 책은 거의 비에 젖어 있었다. 겨울에는 솜바지저고리에 솜버섯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목도리와 귀마개를 하고 눈만 빠끔하게 내놓고 간다.

땅바닥이 얼어서 빙판이 되면 열두 번도 더 넘어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앞을 볼 수가 없다. 시골 논두렁길은 눈이 많이 오고 눈보라가 치면 길을 분간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사곡동 뒤 솔밭 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가끔 늑대가 나온다 해서 혼자는 다니지를 못했다. 

학교 가는 길 망태골 밭두렁 길을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청녕둑(집 앞에 있는 작은 산 이름) 소나무 사이에 막내아들을 보내놓고 애처로워서 지켜보고 서 계시는 어머니의 흰옷 입은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도 어머니께서는 늘 그 장소에 나와 계시거나 더 늦을 때는 동네 어귀 훨씬 밖에까지 형님들과 같이 나오셔서 '정희 오느냐?' '정희야!' 하고 부르시면 '여기 가요' 하고 대답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박정희 대통령 셋째 형 박상희 선생
 박정희 대통령 셋째 형 박상희 선생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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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셋째) 상희 형님이 처가인 김천에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산골에서 자라서 촌뜨기이기 때문에 김천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형님의 선심이었다고 본다. 형님의 처가댁은 김천시 황금동이었다.

하루는 형님과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데 아이스크림 장수가 있어 형님이 그것을 사 먹으라고 돈을 주었다. 고깔같이 생긴 용기(그릇)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주는 것을 조그마한 목제(나무) 스푼으로 떠 먹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아이스크림 맛이었다. 먹다가 보니 형님은 자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빨리 먹고 형님을 따라가려고 빨리빨리 먹다가 그만 아이스크림 용기가 깨어졌다. 나는 먹고난 다음 그릇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줄만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저기 걸어가고 있는 형님을 '형님!' 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형님! 이것이 깨어졌어요. 물어 줘야겠어요'라고 울상을 하며 당황해 했다. 그 광경을 본 아이스크림 주인은 그 그릇도 같이 먹는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그때야 나는 아이스크림을 든 채 형님을 쫓아 따라갔다.

그날 저녁에 형님과 형수씨는 나에게 '촌놈'이라고 놀려댔다. 이 일로 그 뒤에도 촌뜨기 노릇을 했다고 놀림을 받았다." - 박정희 <나의 소년시절> 1970년 4월 26일.

 
 박정희 생가 추모관 내에 게시된 사진들(2004년)
 박정희 생가 추모관 내에 게시된 사진들(2004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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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이 일기에 당시 김천에서 만났던 황태성이란 인물 얘기는 일체 나오지 않고 있다. 아마도 <나의 소년> 시절을 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황태성이라는 사람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을 듯하다. 하지만 내가 살펴본 여러 기록과 그 시대 생존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박정희가 상희 형과 함께 김천 형수 친정에 갔을 때 황태성을 분명 만났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경북 상주군 청리면 출신의 사회주의자 황태성은 김천에서 야학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박상희의 부인이 된 조귀분씨는 대구 신명여학교 출신으로 근우회(항일여성독립운동단체) 김천지회장을 겸한 야학 교사였다. 황태성의 중매로 박상희와 조귀분이 결혼했다. 박상희는 모처럼 김천 처가에 가면서 그곳에서 야학을 하고 있는 동지 황태성을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와 황태성의 첫 만남도 그때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황형, 제 막냇동생입니다. 체구는 작아도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 급장을 한답니다."
"아, 그래요?"


박상희는 동생에게 인사하라고 했다.

"박정희입니다."
"반갑네."


황태성은 박정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박상희에게 말했다.

"작은 고추가 더 맵다고 했소. 아주 야무지고 똑똑해 보이오. 아우가 장차 큰 일을 할 것 같소."
  
 황태성 출판기념회 걸개그림
 황태성 출판기념회 걸개그림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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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서울에 나타나다

1946년 10.1항쟁으로 박상희는 진압 경찰의 총을 맞고 바로 선산경찰서(당시 구미역전에 소재) 옆 벼논에서 사살당했다. 그러자 황태성은 망명도생으로 곧장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차관급)까지 지냈다.

박정희와 황태성의 첫 만남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1년 5월 16일, 북의 황태성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남한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깜짝 놀라면서 반가운 마음에 스스로 남북평화통일을 꾀하는 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의 언저리 사람들이 만류하자 '살 만큼 살았다'고 말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김일성의 승낙을 받은 뒤 당시 북한 공작원의 루트인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나타났다.

그는 남쪽에 안착한 뒤, 구미에 사는 조귀분씨를 만나 그분의 사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박정희와 연계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미 CIA 정보요원의 촉수에 걸려들었다. 이 정보를 알게 된 당시 민정당의 윤보선 대통령 후보는 이를 대통령 선거쟁점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 건곤일척의 선거에서 윤보선의 패착으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이 됐다.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황태성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미 CIA 요원들이 현미경처럼 황태성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로서는 어떻게든 황태성 문제를 매듭 지어야만 했다. 황태성을 비밀리에 다시 북으로 돌려보내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다. 그때까지도 미국은 박정희의 지난날 좌익 연루 경력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을 때였다.

대통령 선거 후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에게 황태성 사형을 즉각 집행하자고 건의했다. 곧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승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처음 박정희는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도 인간적인 배리로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해 연말 김형욱은 다시 박정희에게 황태성 사형 집행승인서를 내밀었다.

"꼭 사형시켜야 하나?"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게 몰리지 않으려면…"


박정희는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봐, 형욱이 자네가 알아서 해."

박정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드리워진 레드콤플렉스를 지워야 했다. 1963년 12월 14일 오전, 황태성은 인천 근교의 한 군부대에서 총살당했다. 
  
 황태성 손녀 재미동포 황유경 씨
 황태성 손녀 재미동포 황유경 씨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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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만남

2015년 10월 28일, 서울 인사동 한 밥집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김학민, 이창훈 공저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라는 책이었다. 이날 미국에서 황태성 손녀 황유경씨가 그 자리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예사 출판기념회와는 달리 이날 행사 중, 황태성의 원혼을 달래는 살풀이춤과 극락의 강을 건너는 애달픈 굿거리장단도 있었다.

"고2(1965년) 때 가을이었을 겁니다. 그때 저는 '꽃씨회'라는 봉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의 '사랑의 열매'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달아주고 성금을 받아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단체였어요. 그날 회원 10여 명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그 중 제가 대통령 앞으로 가서 열매를 달아주면서 돌연 '제가 황태성씨 손녀입니다'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그러면서 허둥지둥 행사를 끝내더군요. 그 자리에 있었던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날 청와대를 나와 명동으로 갔는데 뜻밖에도 경찰이 철통같이 지키며 못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꽃씨회'는 1년도 못 가 해체됐어요. 지금도 '꽃씨회'가 왜 해산됐는지 당시 회원 중 누구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364~365쪽


그날 늦은 밤, 나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한 단면을 보고 청량리역에서 원주행 마지막 열차를 타고 귀가했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학민 이창훈 지음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 전인권 지음 <박정희 평전> / 정영진 지음 <청년 박정희> / 최상천 지음 <알몸 박정희> / 조갑제 지음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고향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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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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