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포스터

<샤인> 포스터 ⓒ (주)비싸이드 픽쳐스 , 필립 스튜디오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데이빗(제프리 러쉬)'은 호주에서 열린 각종 콩쿠르에서 상을 휩쓴다. 여러 대학에서 유학 제의를 받던 그는 아버지 '피터(아민 뮬러 스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으로 떠나고, 영국 왕립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공부한다. 졸업 연주회에서 평생 숙원이자 미치지 않고서는 칠 수 없다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 데이빗은 연주 직후 쓰러지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빗속을 헤매다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고 그의 피아노는 모두를 매료시킨다. 

토니 힉스 감독의 1996년도 영화 <샤인>은 호주의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당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작중 데이빗을 연기한 제프리 러쉬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 재개봉 한 이 작품은 여전히 흥미롭고 강렬했다.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작중 데이빗의 피아노 연주는 지나간 역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떠안는 사람들의 고통과 역경을 극복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었다.  

사실 <샤인>과 같은 영화들은 그 완성도에서 문제가 생기기 쉽다. 전후반부로 나뉘는 스토리텔링은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얕게 만들 수 있다. 인물의 삶을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집약시키기 위해 중요한 사건들만 남기고 과감히 그의 인생을 생략하다 보면 개연성이 부족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샤인>은 부자관계라는 명확한 하나의 주제 아래에 여러 에피소드들에 질서를 만들어주면서 이러한 함정들을 피해나간다.  
 
 <샤인> 스틸컷

<샤인> 스틸컷 ⓒ (주)비싸이드 픽쳐스 , 필립 스튜디오

 
<샤인>은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한 레스토랑 앞에 서 있는 데이빗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이후 영화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넘어가며 그의 유년시절부터 레스토랑에 가게 된 시점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데이빗의 과거가 단순히 그만의 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샤인>이라는 협주곡의 1악장은 데이빗과 그의 아버지 피터, 둘 간의 갈등에 주목한다.

작중 피터는 가족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에, 그는 데이빗을 놓아주지 않는다. 데이빗의 재능과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빛나기를 바라며 그의 기회들을 빼앗고 억압한다. 또한 그는 데이빗에게 자신의 가치를 주입시킨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피터에게 데이빗이 라흐마니노프가 최고의 곡이고, 반드시 연주해야 한다고 강제한다. 따라서 작중 데이빗이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훗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였던 피터의 책임이 매우 크다. 

하지만 영화는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면서 정당화될 수 없는 피터의 행동에 최소한의 개연성을 부여하고,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며 둘의 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2차 대전 당시 가족을 잃었던 피터에게 가족은 단순한 혈연이 아니다. 그가 놓쳐버린 인생이자, 그에게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고,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회한이다. 충분히 빛나야 했던 데이빗의 미래는 홀로코스트와 디아스포라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것이다. 이처럼 <샤인>은 역사의 비극과 개인의 비극 사이의 관계성을 부각하면서 피터와 데이빗의 관계를 더 복합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샤인> 스틸컷

영화 <샤인> 스틸컷 ⓒ (주)비싸이드 픽쳐스

 
1악장에서 점차 피폐해지던 데이빗을 묘사한 것과 반대로, 2악장에서 영화는 억압당했던 그가 자유로워지는 과정, 대회에서 이기기 위한 목적이었던 피아노가 그의 삶을 즐겁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비가 쏟아지는 날 길을 헤매다가 피아노가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내는 데이빗을 비추는 영화의 첫 장면이 반복되는 이유다. 바로 이 장면을 기점으로 데이빗은 유랑을 끝내고 스스로 거부하고 숨겨왔던 자신의 바람, 꿈, 욕망을 마주하며 조금씩 자기 자신을 되찾아간다. 

그래서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인생 첫 콘서트에서 눈물 흘리는 데이빗의 모습은 영화 속 어떤 순간들보다 감동적이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능 때문에 인생을 망칠 뻔했던 데이빗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음악과 피아노를 다시 순수하게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영화는 역사의 무게에 매몰되었던 인물에게 우렁찬 기립박수를 보내며 마땅히 누려야 했던 역사를 돌려준다. 마치 타란티노 감독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샤론 테이트에게 새로운 운명을 보여주며 영화를 통해 위로를 전했던 것처럼. 

한편 작중 등장한 '왕벌의 비행'과 같은 다양한 음악들은 데이빗의 역경과 극복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그중 영화의 주요 소재이기도 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특히 인상적이다. 졸업 연주회에서 데이빗이 온 힘을 다해 연주하려고 했던 이 곡은 차분하면서도 음울한 느낌으로 시작해서 3악장에서 모든 것을 극복한 듯 화려하게 끝맺는데, 곡의 전개가 마치 데이빗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샤인>은 역사라는 무거운 짐을 진 데이빗 헬프갓의 이야기를 아름답고도 치열한 피아노 선율 속에 담아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원종빈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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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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