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 소니픽처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답답했겠어."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나서 남편이 한 말이다. 1860년대 미국. 저렇게 똑똑했지만 기를 펴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을 보니, 좀 미안한 듯도 안타까운 듯도 했다. 문득 이 영화를 '남성들이 보면 좋겠네'하는 생각이 스쳤다. 비록 경계 안의 삶일망정, 자기답게 살고자 발버둥쳤던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역시 너무 큰 기대일 것이다. 그저 보통의 젊은 여성이 직장 생활과 결혼 그리고 육아를 치르며, 남성은 전혀 요구받지 않을 포기를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서사를 아주 나이브하게 보여준 <82년생 김지영>을 두고도 논란이 인 걸 보면 말이다. 문득, 영화 속 김지영에 공감하지 못할까 봐, 이 영화를 여자 친구와 같이 보지 못하고 혼자 봤다는 웃픈 얘기가 떠올랐다.

영화는 내내 네 자매의 샘솟는 활기로 출렁였고, 나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이들의 활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자매였던 나와 내 언니들의 유년에 저렇듯 발랄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네 자매들의 우정이 낯설었다. 가난한 살림에 부족한 물자로 자주 다투었으며, 게다 아버지를 초월하는 오라비의 거친 가부장은 우리 자매들을 주눅들게 했다.

우리는 억압받는 동족으로 뭉치기보다, 덜 구박받기 위해 분할되었다. 우리는 작은 아씨들처럼 뜨거운 자매애를 공유해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가부장의 부끄러운 노예로 살아남았다. 그래서였을까. 소설 <작은 아씨들>에 열광하지 않은 건, 일천한 자매애가 부끄러워서였을까. 그래서였을까. 여성들이 <작은 아씨들>에 열광했던 건, 오히려 가뭇없는 자매애에 대한 동경이었을까.

하지 '않을' 권리를 거세당한 1860년의 여성들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 ⓒ 소니 픽쳐스

 
영화 <작은 아씨들>을 두고,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여성주의 관점으로 고전을 뛰어나게 재해석했다는 평이 자자했다. 오래 전 읽어 내용도 가물가물한 원작 소설을 떠올려 뛰어난 재해석이라는 평에 동의 여부를 가리기는 어렵다. 허나 1860년에 고정된 등장인물들을 내놓지는 않았을 터, 2020년에 재현된 작은 아씨들을 만나 보자.

1860년대의 작은 아씨들은 맘대로 살 수만 없었던 게 아니다. 맘대로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혼하지 '않을' 권리도 그중 하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주인공 엘로이즈도 결혼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해, 원치 않는 남자에게 귀속되었다. 1860년대의 조선에서도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결혼을 통해 철저히 통제된 여성의 성, 섹슈얼리티, 능력은 2020년 지금, 얼마나 진일보했을까?

미처 참정권도 얻어내지 못한 1860년대 미국 여성의 한계는 주인공 네 명의 입을 통해 격렬히 또는 자포자기식으로 또는 교활하게 전해진다. 결혼하고 싶지 않아 온몸으로 결혼제도에 저항하는 조(시얼샤 로넌)는, 평생 자신을 구속할 게 뻔한 결혼 속으로 자신뿐 아니라 언니 멕(엠마 왓슨) 또한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멕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며, 그런 자신의 꿈도 존중받기를 바란다.
 
멕의 '스위트홈'은 정말 그의 꿈이었을까. 그가 가진 꿈이 자신의 온전한 욕망이었다고 믿기엔, 그가 욕망할 수 있는 다른 삶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이 군인, 작가, 과학자, 성직자, 교수, 정치인 등이 될 수 있었다면, 그의 꿈은 귀여운 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의 천사라는 오직 하나의 상만을 정해놓고, 이것이 가장 숭고한 여성의 자리라고 억압하는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오랜 꿈의 실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른 삶을 만날 수 없었던 멕은 배우라는 삶을 탐하지 못했다. 배우는 타락한 삶이라는 사회가 주조한 이데올로기를 부수기에 그녀는 역부족이었다. 가부장의 집을 가부장의 도구로는 부술 수 없기에.
 
1900년대 초 신여성으로 호명되곤 하는 식민지 조선의 나혜석을 우리는 어떻게 소환하는가. 자기 앞의 생을 치열하게 살아낸 그를 우리는 가부장과 불화해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여성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의 가부장은 개명한 신여성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잘난(배운) 여자는 불행해진다는 '나혜석 콤플렉스'를 만들어 여성을 억압했다. 나혜석은 가부장을 배반한 여성에 대한 상징적 징벌의 표상이었다. 여성들은 이 징벌을 피하기 위해 가부장에 공조했고, 현모양처를 자신의 꿈이라 믿어야만 했다.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 ⓒ 소니 픽쳐스

 
멕의 결혼에 대한 판타지와 정상성은, 두 세기가 지난 2020년 한국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까. 엄마이자 아내인 주부가 여전히 스위트홈의 수호자로 기능하며 자연화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유효하지 않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게다가 요즘은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완전한 내 선택"이라는.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이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다들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선택과 결정은 엄연히 다르다. 가족의 시간표에 맞추어 자기 시간표를 짜야 하는 주부들의 삶에 선택할 무엇이 있을까. 사회와 불화하지 않으려 단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을 뿐인 삶을, 우리는 왜 '선택'했다고 믿고 있는 걸까.
 
조는 '자기만의 방'을 찾아 뉴욕으로 떠난다.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삶을 꾸리려면 자신의 방뿐 아니라 '3기니'도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매일 집필 노동을 해 글을 팔고, 아이들을 개인 지도해 돈을 번다. 옹색하지만 자기의 삶을 꾸리고 어려운 가족 살림에 보탤 돈까지 마련하느라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은 가부장의 질서를 위배한다는 이유로, "여자 주인공을 결혼시키"거나 "죽이"라고 난도질당한다. 신념을 가진 여자에 대한 글은 읽히지 않으니, 팔리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영혼을 팔아야 한다.

자기만의 방과 3기니는 멀어져 가고, 그저 먹고 살 돈이 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조는 번아웃이 된다. 그때 베스(엘리자 스캔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는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집의 병석에 누워있는 동생 베스는 이미 꺼져가는 촛불 신세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와 깊이 포개진 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동생의 원기를 북돋우기 위해 애쓰지만 속수무책이다. 베스의 죽음 앞에 조는 돌연, 넘지 못할 고독과 불안의 벽을 마주한다. 청혼을 거절했던 로리(티모시 샬라메)가 돌아오면 다시 잘해보겠다고 결심한 조는 로리에게 연서를 쓰지만...
 
에이미(플로렌스 퓨)는 조의 연인이자 절친인 로리를 만나는 순간부터 사랑했다. 하지만 로리는 조의 것이었다. 조를 숭배하듯 사랑하는 로이를 넘볼 수 없었다. 고모의 조력으로 에이미는 영국으로 그림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사교계로 진출할 꿈을 키운다. 게다가 가난한 집의 희망은 너뿐이라는 고모의 말은 에이미를 더욱 정략결혼에 포획되게 한다. 그러다 우연히 여행 중인 로리를 만난 에이미는, 의도치 않게, 로리에게 마음을 내보일 기회를 잡는다.
 
무도회에서 로리가 탕아처럼 행세하는 걸 보고 화가 난 에이미는 로리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연애사에 실패했다고 세상을 다 잃은 듯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부잣집 도련님을 정신 번쩍 나게 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로리에게 에이미는, 1860년의 거의 모든 여성을 대신해 결혼을 거부할 수 없는 여성들의 굴레를 속사포처럼 퍼붓는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과, '강제된 선택'은 엄연히 다르다고. 결혼하지 않으면 혼자를 책임질 수단도, 아이를 낳고 기를 권리도, 재산을 지킬 방법도 전무한 여성의 삶을, 남성과 등가로 매기고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라고. 에이미의 서릿발 같은 웅변은 적실한 한 방이었나. 로리는 에이미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나는 돌연 에이미에 끌려 청혼을 한 로리의 감정선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에게 작동하는 사랑의 방식이 미덥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조를 숭배하듯 좇던 그의 감정은 분명 사랑이라 부르기엔 미진했다. 사랑이라 착각한 그의 숭배가 실은 조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었기 때문이다. 그가 매료된 조의 특별함은, 자신과 가부장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유효했을 터이기에. 숭배나 혐오는 실상 대상을 타자화하는 유사한 방식이지 않은가.
  
 영화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 ⓒ 소니픽쳐스

 
<작은 아씨들>이 네 자매의 에너지로 시종일관 충만했음에도, 나는 네 자매 엄마(로라 던)의 고단한 어깨가 가여워 슬펐다. 그에게는 어떤 삶이 남았을까. 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웠고 남편을 성실히 내조했다는 자부심은 그의 삶을 얼마나 비옥하게 만들었을까. 문득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망실한 표정은 아이와 남편을 제외하면 어떻게도 정의되지 않는 그의 삶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에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다"는 그의 말은, 단지 딸에 대한 격려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회한이기도 하다. 엄마이자 아내만을 기대 받은 그라고 해서, 고결하고 드높은 정신마저 품어 보지 않았겠는가.
 
영화의 해피엔딩 결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남편이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영화의 결말이 조가 쓴 책처럼 됐다는 거지?"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문득 자신이 없어져, "글쎄"라고만 답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착잡하다. 1860년대에 벌인 네 자매의 고군분투가 결국, 가족주의로 귀결되는 일은 견딜 수 없다. 남편에게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던 나의 속내는, 비록 1860년대라도, 사랑(남자)에 의해 구원받지 않고도, 결혼으로 삶을 승인받지 않고도, '마이 웨이'하는 여성의 삶이 발견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모던걸' 나혜석이 거리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그가 불행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1900년대의 한계 안에서 온몸으로 마침내 죽음마저도 그답게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앞선 여성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주체적 삶을 도모하고자 한 여성들을 견인했다고 믿는다. 해서, 남자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의, 가족에 의한 행복이 작은 아씨들이 추구한 삶의 가치라고 여겨지고 만다면, 2020년의 <작은 아씨들>은 결코 새로운 해석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영화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 ⓒ 소니픽쳐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작은 아씨들 가족주의 나혜석 콤플렉스 결혼 판타지 자매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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