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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의 첫사랑 콘스탄차
 쇼팽의 첫사랑 콘스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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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나와 눈동자를 맞추고 있었다. 나의 눈시울은 젖어 있었다. 극적인 순간이 다가올 것인가.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 백 마디 말보다 뜨겁고 진한 동작을. 내 입술을 덮어 줄 따뜻한 키스. 그러나 그의 입술은 다가오지 않았다." - 콘스탄차의 일기
 
수줍은 쇼팽은 코스탄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자신의 폴란드에서 마지막 음악회에 찬조 출연을 부탁했다. 콘스탄차는 흔쾌히 승낙했고 로시니의 오페라 <호수의 미인> 가운데 아리아 '마음속에 넘치는 사랑'을 불렀다.
 
"그날, 콘스탄차의 흰 드레스는 막 내린 눈 위에 하얀 목련화 같았어.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칼에 빨간 장미꽃 리본을 꽂고 그녀는 아리아를 불렀어, 우레처럼 박수가 쏟아졌지. 이날 바르샤바 신문에 비평가는 계곡물에 흐르는 물처럼 맑고 청아한 콘스탄차의 가성은 사파이어보다 반짝거렸고 코발트처럼 짙고 맑은 음색이었다고 극찬을 하더군, 내 생각도 같았어. 노래를 끝내고 콘스탄차는 머리에 꽂았던 장미꽃 리본을 뽑아, 내게 주고는 말없이 무대에서 내려갔어. - 쇼팽이 마투신스키에게 보낸 편지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기 전날 밤에 송별회가 열렸다. 쇼팽의 마음을 몰랐던 콘스탄차는 용기가 없어서 차마 가지 못했다. 친구들은 쇼팽에게 바르샤바 사스키 공원의 흙이 담긴 은컵을 쇼팽에게 선물했다. 다음날 콘스탄차는 광장 구석에 숨어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쇼팽은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지만,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1830년 11월 2일, 쇼팽이 그렇게 떠나고 2년 후 콘스탄차는 폴란드의 지주인 유제프 그라보우스키와 결혼했고 자녀 다섯을 낳았다. 서른다섯에 녹내장에 걸린 그녀는 39세에 실명했다. 슬프게도 쇼팽이 사망한 시기와 겹친다. 콘스탄차가 실명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바르샤바 신문의 평론가가 그녀를 찾아와 얼마 전 프랑스에서 사망한 음악천재 쇼팽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쇼팽?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 기억이 안 나네요."

기약 없는 그리움은 고통이다. 고통이 지나치면 기억을 지워버리는지도 모르겠다. 빛을 잃어버린 그녀는 그에 대한 기억조차 잃었다. 20살의 서툰 사랑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둘은 평생 만나지 못했다. 쇼팽이 사망하고 그의 유품 속에서 콘스탄차가 그날 건네주었던 장미꽃 리본이 발견되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빈에 도착한 쇼팽은 도착 일주일 만에 생각지 못한 시련을 맞았다. 바르샤바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황제 챠르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빈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은 기피 대상이 되어 버렸다. 쇼팽에게 활짝 열렸던 문이 별안간 닫혀버렸다. 빈까지 동행해 주었던 절친 티투스도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쇼팽도 돌아가고 싶었으나, 티투스, 가족, 스승 모두 반대했다. 진정 폴란드와 그 예술에 보탬이 되려면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짐만 되지 않는다면 집으로 돌아갈 텐데. 고국을 떠난 그 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중략) 나, 파리로 갈까? 여기에선 사람들이 나더러 기다리라고만 해. 집으로 돌아갈까? 자살해버릴까? 이제 너에게 편지도 그만 쓸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 좀 해줘." - 크리스마스에 마투센스키에게 보낸 편지 중
  
빈을 떠나 파리로

이 당시 빈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피아니스트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였다. 1829년에 빈에서 데뷔 무대를 선보인 탈베르크의 연주에 빈은 경탄했으며, 리스트는 "탈베르크는 피아노라는 악기로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쇼팽은 그와 함께 연주회를 보러 다닐 정도의 친분을 쌓았고, 그의 연주를 겉으로는 높게 평가하지만, 그가 선호하는 연주자의 유형은 아니었다. 마투센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탈베르크에 대해 '이것저것 추려낸 접속곡이나 만들어 연주하고 피아노를 손이 아닌 페달로 친다'라고 썼다. 쇼팽은 추구하는 음악적 기준이 너무 높은 탓인지 탈베르크뿐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에 대한 좋은 평가에 인색했다.

빈에 온 지 8개월이 넘도록 연주회도 출판도 이뤄지지 않았고 타국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스무 살 청년 쇼팽의 갈등과 외로움은 커졌다. 마침내 빈을 떠나 파리로 갈 결심을 하지만, 그사이 폴란드는 이미 러시아령이 되어 그는 러시아 대사관으로 가서 새로운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다.

폴란드 혁명 세력과 망명자들에게 프랑스는 좋은 터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뻔히 알고 있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다. 친구들의 충고대로 영국을 가는데 프랑스를 경유한다고 설명해서 겨우 구여권을 되찾아 1831년 7월 20일 빈을 떠날 수 있었다.

파리로 가는 길, 뮌헨에서 연주회 제의를 받고 8월 28일, 필하모니 소사이어티 홀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했다. 기쁨도 잠시, 그로 며칠 후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한 쇼팽은 바르샤바 함락 소식을 들었다. 도시는 불타올랐고,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고, 콜레라까지 퍼졌다. 가족과 친구들, 콘스탄차의 행방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두려운 상황에 쇼팽은 분노하고 절망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쇼팽 에뛰드 '혁명'이 탄생했다. 그는 격정적으로 되어 버린 자신의 마음을 피아노 위에 그대로 쏟아놓았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쇼팽은 파리에 도착했다. 자신의 음악을 꽃 피우고 생을 마감하게 될 도시 파리. 때마침 파리에는 창조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다. 문학에 위고, 하이네, 샤토브리앙, 보들레르, 조르주 상드, 미술에 들라크루아, 앵그르, 음악에 칼크브레너, 힐러 등이 버티고 있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의 대를 이을 젊은 작곡가인 리스트(20), 멘델스존(22), 베를리오즈(28), 아직 십대인 베르디와 바그너, 그리고 쇼팽(21)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별들의 대잔치가 벌어진다.

쇼팽은 특히 칼크브레너를 동경했으며 그를 마음속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칼크브레너 역시 쇼팽의 재능에 탄복하여 서로의 집을 오가며 연주에 대한 조언을 주고받았다. 또한,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인 페르디난트 힐러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로부터 리스트와 멘델스존을 소개받았다. 당시 멘델스존은 서곡 핑갈의 동굴을, 베를리오즈는 그의 걸작인 환상 교향곡을 발표하여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이런 멘델스존과 베를리오즈는 쇼팽의 연주에 빠졌으며 그들의 친분은 두터워졌다.

1832년, 파리 플레이 엘 홀에서 쇼팽의 첫 연주가 열렸다. 단독 공연은 아니었고, 칼크브레너, 스타마티와 같이 당대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참가했다. 쇼팽은 피날레로 자신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했고, 플레이 엘 홀 개관 이래 최대의 박수를 끌어냈다.
 
"멜로디에 혼이 살아 있었다. 작곡가의 상상력은 풍부했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그의 연주는 서정이 흘러넘쳤으며 섬세하고 화려했다." - 조세프 페티스의 논평
 
파리에 뜬 두 개의 태양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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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도 파리에 뜬 두 개의 태양은 리스트와 쇼팽이다. 쇼팽이 파리에 와서 첫 연주를 선보인 날, 리스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그가 플레이 엘 살롱에 처음 섰을 때를 기억한다. 시적 감성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음악 형식을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혁신한 그 재능을 생각하면 그때 소나기처럼 퍼붓던 박수 갈채도 우리의 감격을 표현하기에는 한참 모자랐지 싶다."- 리스트의 회고록 중
 
쇼팽과 리스트는 매우 다른 연주 스타일을 지녔다. 쇼팽은 섬세한 연주로 그런 섬세함을 끌어내기 적합한 플레이 엘 피아노를 사용했고, 리스트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중점으로 대규모 공연을 선호했기에 대음량 피아노인 에라르 피아노를 사용했다. 둘은 서로 종종 협연을 하기도 했다. 리스트와 쇼팽이 선 무대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 형용할 수 없는 극찬의 논평들이 때마다 실렸다.

쇼팽은 리스트를 작곡가가 아닌 피아노를 치는 흥행사라고 낮게 표현했지만, 리스트는 쇼팽을 천재 작곡가,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격찬했다. 쇼팽은 대중 연주자로 대중을 압도해 버리는 리스트의 연주 방식이 섬세하게 연주하는 자신과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그런 리스트가 자신을 열광적으로 찬미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쇼팽과 외향적이고 자신감 갑부인 리스트는 둘 다 고국을 떠난 이민자(리스트는 헝가리 출신) 출신으로 파리에서 최고의 인기에 오른 점과 오페라를 좋아하는 점, 자국의 민속 음악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걸 모티브로 많은 작곡을 했다는 점 등 공통점도 많았지만, 연주에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다고 쇼팽이 리스트에 대해 늘 폄하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도 리스트는 내가 작곡한 에뛰드를 치고 있는데 그걸 듣다 보면 존중받을 만한 평소 내 생각의 경계 너머까지 나가게 되네. 내 곡을 연주하는 그의 방식을 훔치고 싶은 심정이야. - 쇼팽이 페르디난트 힐러에게 쓴 편지 중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참고 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 유강호, 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 제러미 니콜라스/ 임희근 옮김, 포노.
<내 친구 쇼팽-프란츠 리스트> 이세진 옮김, 포노.
<쇼팽의 음악과 사랑> 송숙영, 범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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