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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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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일화 중심으로 가볍게 써내려갈 생각

작가 이병주는 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상에 도의가 제대로 작용한다면 '그'는 평생을 뒤안길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인생의 정면에서, 그것도 한 나라 원수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살아야만 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를 말한다. 박정희가 집권을 시작한 1961년 5월 16일부터 김재규의 저격으로 생을 마친 1979년 10월 26일까지 무려 18년 동안 이 나라 상당수 시민들은 긴장 속에 살았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는 말처럼 지금도 숱한 정치인, 심지어 대권 후보자까지도 선거철이 되면 박정희의 사후 원력이라도 입고자 구미 상모동 생가를 찾는다. 사후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위세는 시퍼렇다.

나는 올 연초부터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라는 연재를 시작해 그동안 기세 좋게 집필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윤보선 대통령 그리고 내각책임제 아래 장면 국무총리까지 거침없이 써내려 왔다. 이제 '박정희' 대통령 편이다. 내가 작중 인물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해 왔고, 자료도 수십 권 마련해 두고 있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 기사는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사실 내 컴퓨터 외장 하드디스크에는 '박정희'란 제목으로 쓰다가 만 원고 꼭지가 무려 20여 개나 된다. 어떤 꼭지는 400~500매, 또 어떤 꼭지는 집필기획서만 써둔 것도 있다. 고교시절부터 '박정희'에 대해 고민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출신으로 나와 구미초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더욱이 그분 중씨(박상희) 댁과 우리 집은 매우 가까웠던 사이로 서로 쌀뒤주 사정도 알던 사이일 뿐만 아니라, 한때는 동병상련의 처지이기도 했다. 서로 가깝다는 말은 잘 안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놓고 그 집안 이야기를 하는 데에 금도라는 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한 인물에 대한 바른 평가는 '사후 100년은 지나야 한다'고 한다. 추종자나 후손들이 모두 사라진 연후에야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탓인지 나는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탈고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나의 게으름과 고향 후배라는 중압감, 좌고우면했던 작가로서의 신념 부족도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 연재에서 박정희의 전 생애를 다루긴 어렵다. 다른 인물과의 형평성 때문이다. '박정희'라는 주제의 작품(장편소설)은 후일 별도로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번 기사에서는 그를 둘러싼 일화 중심으로 가볍게 써내려갈 생각이다.
 박정희 생가 아래채. 박정희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시절 공부방이었다.
 박정희 생가 아래채. 박정희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시절 공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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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제삿날 일기

1978년 8월 13일(금) 비
어머님 돌아가신 지 29주째 기제일이다. 1949년 음력 7월 10일 어머님께서는 선산 구미 상모동 옛집에서 노환으로 타계하셨다. 어머님 연세 79세, 내 나이 32세, 7남매 중 제일 막둥이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어머님을 32년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32년간이라고는 하나 대부분 객지에 있었으므로 직접 집에서 모신 것은 훨씬 짧은 시간이 될 것이다.

서재에 간소한 제상을 차려놓고 영정 앞에 분향하면서 어머님의 명복을 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어머님 생전의 지극하신 사랑을 되새겨 본다. 이 세상에서 어머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신 분은 없으리라. 어머님의 사랑은 참으로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다 하겠다.

어머님 생전에 못다 한 효도, 이제 후회한들 막급이라.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대통령으로서 성심성의를 다해 선정에 힘써서 보다 부강하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건설하여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일, 이것이 어머님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조국의 발전상을 천국에 계시는 어머님께서도 보시고 기뻐하시리라. 어머님, 길이길이 홍복을 누리옵소서.

어젯밤부터 중부지방에 호우가 내려 여기저기 수해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한해(旱害) 다음에 수해, 하늘이 하는 일이니 도리가 없으나 천재에 대하여 평소의 대비가 긴요하다. 유비(有備)하면 무환(無患)이란 말은 천재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 박정희의 일기 중
 

박정희는 텔레비전을 끄고는 침실로 갔다. 깊은 밤에다 비가 내린 밤 탓인지 청와대는 더욱 적막강산이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라 그런지 잠이 쉬 오지 않았다. 문득 <한시외전>에 나오는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고사가 떠올랐다.

대부분 자식들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불효했던 자신을 돌이켜보며 후회하기 마련이다. 박정희는 더욱 그랬다. 가난한 집 칠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난 박정희는 이런저런 일로 어머니의 애간장만 태웠다. 끝내 자신의 일(좌익 연루사건)로 어머니는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해질녘의 금오산. 마치 성인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와불상(臥佛像)'이라고도 부른다.
 해질녘의 금오산. 마치 성인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와불상(臥佛像)"이라고도 부른다.
ⓒ 구미시청 / 강구휘(전, 도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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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양력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117번지 금오산(金烏山) 기슭에서 태어났다. 구미는 산남수북(山南水北, 금오산 남쪽 낙동강 북쪽)의 산자수명한 곳이다. 이 고을을 내려보는 금오산은 보는 사람, 보는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이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금오산 동쪽 선산에서 보면 멧부리가 마치 붓끝처럼 보인다고 '필봉(筆峰)'으로 불려왔다. 남쪽 칠곡 지방에서 상봉을 바라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귀봉(貴峰)', 또는 거인이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거인봉(巨人峰)'으로도 일컬어진다. 또 어떤 이는 금오산 산세가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상(臥佛像)'이라고 했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금오산을 바라보고는 "군왕이 날 산"으로 예언했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 선산의 옛 지명)에 있다, 그런 까닭으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朝鮮人才半在嶺南 嶺南人才半在一善 故舊多文士)라고 기술한 바 있다.

그런 탓인지 금오산의 빼어난 산세를 보고 찾아온 문중도 있었다. 낙동강 건너 인동 장(張)씨들은 일찌감치 금오산 남쪽 오태동에 터를 잡았고, 경남 김해에 살던 허(許)씨들은 배를 타고 한양에 가다가 금오산 산세에 매료돼 오태동 옆 임은동에 자리를 잡았다. 후일 인동 장씨 가문에서는 장택상 국무총리가 나왔고, 임은 허씨 가문에서는 13도 창의군 허위 군사장과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군장을 배출했다.

박정희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46세, 어머니는 45세였다. 7남매 5형제의 막내둥이였는데 당시 가족 상황은 아래와 같다.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첫째 형 박동희(朴東熙)
둘째 형 박무희(朴武熙)
큰 누나 박귀희(朴貴熙, 또는 수희, 진실)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
넷째 형 박한생(朴漢生)
작은 누나 박재희(朴在熙,
또는 순희)
막내 박정희(朴正熙)


그때 첫째 형(동희)은 22세였고, 그 아래로는 대략 3~4세 터울이었다. 위로 두 형은 결혼하고, 큰누님은 칠곡 은(殷)씨 문중으로 출가해 박정희가 태어나던 해에 딸을 낳았다. 박정희 어머니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서 딸과 같이 배가 불러오는 게 몹시 남세스러웠다. 게다가 가난한 집에 또 식구가 느는 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라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애를 썼다고도 전해진다. 
  
 최근(2004년) 박정희 구미 생가로 개보수한 모습이다. 현재는 그 일대에 동상을 세우는 등 더욱 요란하게 성역화했다.
 최근(2004년) 박정희 구미 생가로 개보수한 모습이다. 현재는 그 일대에 동상을 세우는 등 더욱 요란하게 성역화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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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지 못한 출생

어머니는 그 시절 뱃속아이를 지우는 민간처방으로 간장 한 사발 들이키기도 했고, 밀기울을 끓여마셨다가 기절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어서 섬돌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낟가리나 장작더미에서 곤두박질도 쳐보기도 했다. 그래도 뱃속의 아이는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수양버들강아지 뿌리를 달여 마시고는 혼절했다. 깨어나 정신을 차려보니까 뱃속의 아이가 잠잠해 그만 됐다고 여겼다. 하지만 며칠 뒤 아이가 또다시 뱃속에서 곰지락 놀아, 다른 방도로 디딜방아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태아가 지워지지 않아 아이를 낳으면 이불에 싸서 남의 집 대문 앞에 갖다 버리려고 작정했다고도 한다. 그만큼 그때 이 집안은 가난해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을 걱정했다.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 마을은 금오산 남쪽 기슭으로 원래 이곳 사람은 '모래실'이라고 불러왔다. 이곳은 박정희 외가 수원백씨(水原白氏)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조선조 초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을 했을 때 벼슬을 버리고 이 고장에 내려와서 살았다. 그들은 단종을 사모하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모로실(慕魯谷: 단종 곧 魯山大君을 사모한다는 뜻)'로 불렀던 바, 세월이 흐르매 '모래실'로 변형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 무렵 이 마을에는 선산김씨 몇 집만 밥을 먹을 수 있는 처지였고, 나머지 집은 거의 세 끼 밥을 먹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그런 가구 90여 호가 금오산 산자락에 여섯 개의 소부락으로 나누어서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었다.

박정희 집은 할아버지 대까지는 성주 철산이란 고장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박성빈이 약목의 수원백씨 문중으로 장가 간 후 약목으로 이사했다. 박성빈은 젊은 시절 무과에 합격해 효력부위(效力副尉)라는 벼슬까지 받은 바 있었다고 한다.

박성빈은 원래 성격이 호방한 데다가 조선조 말엽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껴 젊은 날에는 동학농민혁명에도 가담했다가 체포, 처형 직전에 사면됐다고 한다.

이후 박성빈은 집안일에 관심이 적은 한량 또는 반거들충이로 술로 세월을 보내자 이래저래 가산을 거의 탕진하게 됐다. 그러자 그의 아내 백남의는 구미 상모동 친정 선산(先山) 위토(位土, 묘에 딸린 논밭)를 소작으로 얻어 전 가족을 이끌고 그곳으로 이사했다.
    
 생가 옆에 있는 박정희 동상
 생가 옆에 있는 박정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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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기 아들, 대통령이 되다

상모동 박정희 생가는 박성빈이 큰 아들 동희와 함께 손수 흙벽돌로 지었다. 이 집은 한국전쟁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다부동 전투 때 이 일대가 미공군 B-29 '융단폭격'으로 거의 파괴됐다. 전투가 끝나자 첫째 형 박동희가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해 살았다. 이후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지었다가 5.16 쿠데타 후 지금의 모습(기와지붕)으로 다시 지었다. 바깥 초가 사랑채는 원래 박정희가 태어난 산실로 그가 구미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주로 썼던 공부방이었다.

박정희, 그는 지극히 가난한 집의 7남매 막둥이로 뱃속에서도 어머니가 언제 지울 줄 모르는 불안 속에 악전고투하면서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눈을 감을 때까지 막내를 지우려했던 죄의식으로 박정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훗날 박정희가 좌익에 연루돼 그의 목숨이 명재경각에 이르자 어머니는 병석에서 손자 재석(둘째 아들 장남)을 서울로 보내 면회케 하여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한다.

"막내야, 닌 어째든동 살아라."

박정희가 처형 직전 동지와 조직을 몽땅 배반하고 혼자 살아남은 데는 어머니의 그 유언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는 일체 내색도 않았고,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런저런 말로 자신을 구차하게 변명치 않았다. 동향 김재규의 총탄에 어느 날 갑자기 그답게 사라졌다. "총으로 일어선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말을 실증해 준 그의 생애였다.

이웃 고을 약목에서 생계가 막막해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처가 묘지기로 구미 상모동에 이사 온 박성빈 아들은 후일 대통령이 됐다.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전인권 지음 <박정희 평전> / 정영진 지음 <청년 박정희> / 최상천 지음 <알몸 박정희> / 조갑제 지음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고향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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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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