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9 09:24최종 업데이트 20.04.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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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고장난 만년필은 다 나름의 이유로 안타깝습니다. 오래 써온 펜이면 그만큼 정든 세월이 있어 아파지고, 손에 쥔 지 얼마 안 되는 펜은 제대로 한번 쓰지도 못하고 버려질 상황에 속이 상합니다. 내가 산 펜은 들이기 전 고심한 시간이 떠올라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게 되고, 선물 받은 펜은 어쩐지 건넨 지인 마음에 상처를 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듭니다. 이 만년필 사연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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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늘 저렴한 만년필만 써왔어요. 펜 좋아하는 취미가 있는 걸 안 아내가 큰맘 먹고 선물해줬는데, 그만 너무 좋아 들떠 공중에서 펜을 놓쳤어요. 시간이 멎는 것만 같았어요.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펜일지 몰라도, 제겐 가장 좋은, 제일 귀한 만년필이에요. 무슨 수가 없을까요?"
"펜촉이 뒤로 넘어가 분해 자체가 힘들어요. 장담할 수 없는 상태란 걸 저보다 더 잘 아실 거예요. 지금은 전력을 다해보겠단 말밖엔 할 수 없어요. 이해하시지요?"


마음을 비우라고, 일단 최선을 다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펜촉을 교환하자고, 다행히 다른 곳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안심시켰습니다. 
 

라미 2000 펜촉 수리 전 01 라미 2000 만년필, 떨어져 휘어진 펜촉 측면 컷 ⓒ 김덕래

  

라미 2000 펜촉 수리 전 02 라미 2000 만년필, 추락으로 휜 펜촉 정면 컷 ⓒ 김덕래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변 가까운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또 받으며 삽니다. 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급적 받는 이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해주길 소원합니다. 디지털 디바이스, 신발, 옷, 책, 액세서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지만, 펜을 선물하는 데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쓸 것'을 선물하는 자체가 그렇고, 아날로그 감성영역의 정점이랄 수 있는 만년필은 더욱 그렇습니다.

1960~1970년대 태어난, 지금의 40, 50대들은 졸업선물로 만년필을 받았던 기억이 더러 있을 겁니다. 당시의 만년필은 성공에 대한 축원과 앞날에 행운이 깃들길 바라는 염원이 어우러진 상징물과도 같았습니다.


졸업식이 있는 날 학교 근처 중국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비록 만년필을 선물 받진 못했지만, 내 기억 속 졸업식은 눈치보지 않고 자장면 곱빼기를 시킬 수 있던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날로 남아 있습니다. 80년대로 넘어가며 손목시계에게 바톤을 넘겨준 만년필은, 마치 구시대의 유물처럼 쓰는 사람들만의 기호품이 되어갔습니다.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만년필, 라미

독일은 누구나 인정하는 필기구 강국입니다. 최고의 만년필로 일컬어지는 마이스터스튁 149를 가진 몽블랑(Montblanc)를 필두로, 149의 강력한 대항마 소베렌 M800을 보유한 펠리칸(Pelikan),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기구 생산업체인 파버카스텔(Faber-Castell), 연필로는 파버카스텔에 결코 밀리지 않는 내공과 역사를 가진 종합문구업체 스테들러(Staedtler),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포켓만년필로 대표되는 카웨코(Kaweco), 만년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닙(Nib)과 피드(Feed) 전문 생산업체 중 선봉장인 복(Bock) 등 강력한 업체들이 포진한, 그야말로 만년필계의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입니다.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에 의해 워터맨(Waterman)이 생겨난 이래, 조지 섀포드 파카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파카(Parker)를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 하는 건 자신감과 소신의 발현으로 읽힙니다.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 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라미(Lamy)는 파카의 판매 담당자였던 요제프 라미에 의해 1930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레진 소재를 주력으로 하는 몽블랑, 펠리칸과 달리 플라스틱과 스틸이라는 하드웨어와 모던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소프트웨어를 결합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라미 브랜드 로고 라미 브랜드 로고 ⓒ 김덕래

 
라미 만년필중 가장 잘 알려진 모델은 1980년 출시한 사파리(Safari)입니다. 가볍고 내구성 좋은 플라스틱 바디, 쉽게 꽂히고 빠지는 금속 클립, 쥐는 위치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삼각그립, 잉크 잔여량을 바로 확인 가능한 투명창, 비교적 저렴한 가격, 만년필 입문용으로 손색없는 필기감 등 매력요소가 차고 넘칩니다. 거기에 기본 컬러만 10여 종에 달하는데도 해마다 새로운 스페셜컬러를 추가하니 대중의 관심을 받지 않으면 그게 되려 이상한 일이지요.
 

라미 사파리 만년필 라미를 대표하는 만년필 중 하나, 사파리(Safari) ⓒ 김덕래


만년필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 고루한 구시대 유물이 아님을 알렸고, 한때 졸업식장에서나 등장했던 예스러운 필기구가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서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실용성과 현대적 디자인을 앞세운 사파리가 국내 만년필시장 대중화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면, 오늘 이 펜, 라미 2000은 라미社 디자인미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1960년대 중반 출시된 모델을 2000년 리뉴얼했다는 말을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입니다. 처음 마주하면 눈으로 보고 한 번, 쥐면 손끝을 타고 손바닥을 거쳐 전신으로 퍼지는 독특한 손맛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무광 브러쉬타입의 바디는 한번 손에 쥐면 떼고 싶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그립감을 선사합니다. 심플하고 유니크한 간결함을 추구하는 라미의 디자인철학은, 라미 전 제품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수리에도 펜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이 펜의 몸통은 섬유질과 송진을 섞어 압착시킨 마크롤론(Makrolon)이라는 신소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매끈한 검은색 탄환 한 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가로선이 펜 전체를 채우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셀 수 없이 많은 라인들이 땀이 나더라도 미끄러지지 않고 손에 착 달라붙는 기능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라미 2000의 펜촉은 언뜻 보면 스테인리스재질로 보입니다만, 실제론 14K 금촉입니다. 백금도금 처리가 되어 은색으로 보이는 것뿐입니다. 라미 2000을 쓰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펜촉 사이즈에 대한 표기가 없다며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몽블랑을 제외한(몽블랑 만년필은 최초 구매시 스티커로 표기됨) 대부분의 만년필 업체는 펜촉 하단부나 측면에 EF, F, M.. 이런 식으로 새겨놓아 쉽게 확인 가능합니다.

물론 이 펜촉에도 써 있습니다. 다만 결합한 상태에선 촉 하단부가 가려져 눈에 안 보이는 것뿐입니다. 촉과 그립부를 분리하면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EF / 585 / LAMY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라미社의 EF촉이며 58.5%의 금함량을 가진 14K 금촉이란 의밉니다. 만년필 펜촉은 쓸수록 조금씩 사용자의 필기스타일에 맞춰 닳아지며 부드러워집니다. 지기(知己)처럼 오래 될수록 더 편안해집니다.
 

라미 펜촉 굵기, 재질, 브랜드명이 표기된 라미 2000 펜촉 상판 ⓒ 김덕래

 
만년필 분해는 가능하면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단순히 세척을 위해 펜 내부를 열 필요는 없습니다. 결합된 상태에서 종이컵에 담긴 물을 흡입 배출하는 정도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작업은 충분히 평평하고 잘 정돈된 책상 위에서 해야 합니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지면 작은 부속은 찾기 힘듭니다. 이 펜은 그립부와 배럴 사이를 분리하면 동그란 금속링이 나옵니다. 작고 얇아 자칫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 부속이 없으면 캡과 배럴이 제대로 결합되지 않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금속링이 고정걸쇠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라미 2000 분해 라미 2000 만년필 분해 컷 ⓒ 김덕래


언제나 펜을 수리하기 전엔, 먼저 내 마음부터 차분히 가라앉힙니다. 조급함은 펜 수리에 악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서둘다 보면 과한 힘을 펜에 가하게 되고, 누군가 나를 손대고 있다는 걸 펜이 알게 되면 휘거나 부러짐으로 거부의 뜻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루만지듯 조심조심 다가가야 펜이 치료 과정을 받아들입니다.

수리 요청은 사람이 하지만, 치료에 대한 허락은 펜으로부터 받아내야 합니다. 그때부터가 시작입니다. 펜 구석구석을 살피며 다른 곳엔 이상이 없는지 체크합니다. 특이사항 없음을 확인하면, 어떤 순서로 손볼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게 조금씩 다가서다 보면 어느새 점점 살아나는 펜을 보게 됩니다.
 

라미 2000 펜촉 수리 중 01 수리중인 라미 2000 펜촉 01 ⓒ 김덕래

  

라미 2000 펜촉 수리중 02 수리중인 라미 2000 펜촉 02 ⓒ 김덕래


"안심하셔도 되겠어요.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요. 이젠 좀더 좋게 상태를 끌어올리는 단계로 넘어갈 거예요.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매끈하고 부드럽게 나오게끔 다듬는 일만 남았어요. 갑자기 펜촉이 부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사실인가요? 아내에겐 아직 말도 못했어요. 안 그래도 어제 물어보길래 회사에 두고 왔다 대충 둘러댔거든요. 맘에 드는지 물어보는데, 받자마자 떨어뜨렸단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루페(Loupe, 확대경)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리 흔적이 보일 수 있지만, 맨눈으론 알기 힘들어요. 최대한 그렇게 해 보낼 거예요. 며칠만 더 기다리세요."

 

라미 2000 수리 후 01 수리가 끝난 라미 2000 만년필 01 ⓒ 김덕래

 
사용자의 진심을 내가 공감했고, 내 마음을 펜이 이해했으며, 펜의 의지가 사람에게 닿았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편입니다. 펜을 수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양 손끝이 얼룩덜룩해집니다. 잉크로 범벅이 됩니다. 늘 만년필을 쥐고 살다 보니 깨끗한 손이 되려 어색할 때가 있습니다. 손톱 사이 낀 잉크로 간혹 민망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 수고로움으로 펜 한 자루 살려낼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 아니냐, 속으로 되뇝니다.
 

라미 2000 만년필 수리후 02 수리가 끝난 라미 2000 만년필 02 ⓒ 김덕래


어느 정도 외형이 잡혔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펜촉 정렬상태를 미세조정하고, 잉크 주입해 시필테스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대충 형상이 그럴듯한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만년필은 눈으로 먼저 맛을 보는 건 맞지만, 실제 손에 쥐고 써야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흐름테스트를 한다는 건 적정값을 끄집어낸단 뜻입니다. 잉크 흐름이 너무 가늘면 필기감이 떨어지고, 반대로 과하게 풍부하면 글씨가 번져 깨끗한 필기가 곤란해집니다.

모자람도 지나침도 어디까지나 차악(次惡)일 뿐 차선(次善)이 아닙니다. 만약 힘을 주고 약간 눌러쓰는 습관이 있었다면, 다 잊고 손에 힘을 빼세요. 힘을 주지 않아도 펜촉 끝이 종이에 닿기만 하면 잉크가 술술 나옵니다. 구태여 힘을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펜이 아무리 귀한들 사람만 할까요. 만년필이란 도구가 의미 있는 이유는 사용자가 사람이어서입니다. '쓸 것'의 끄트머리를 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미 2000 만년필 시필테스트 라미 2000 만년필, 수리 후 시필테스트 ⓒ 김덕래


사람의 끝을 쥐고 있는 건 우리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이슈인 코로나19 사태를 지켜보며 작년 이맘때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결혼 후 감기 한번 걸린 적 없던 아내가 며칠 피곤해 하다 약을 먹었는데, 어쩐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간헐적인 열과 구토가 있었지만 별일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출근했고, 오후 3시가 넘어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나 너무 힘들어. 빨리 와줄 수 있어요?"

회사에 조퇴계를 낼 경황도 없이 집으로 달려와보니, 아내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맥을 놓고 누워 있습니다. 열은 내려갈 기미가 없고, 이미 다 토해내 더 이상 나올 게 없어 헛구역질만 하는 아내를 부축해 근처 가장 큰 병원으로 내달렸습니다. 응급실에서 몇 가지 검진을 하더니 갑자기 마스크를 쓴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거친 발소리를 내며 나타났습니다.

응급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고, 의료진이 아내를 누워 있는 상태 그대로 어디론가 옮겼습니다. 아내는 병명은 'A형 간염'이었고, 이 병이 1급 감염병이란 걸 간호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치료제가 없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병원 격리실에 아내를 남겨두고 집으로 오는 길은 참 멀었습니다.

고작 차로 5분거리인데 몇 십 배 더 먼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늘 있던 사람의 빈 자리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아직 어린 두 딸에게 엄마의 부재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전력을 다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아내가 병원에 있던 한 달 동안 면회가 가능한 사람은 오직 보호자인 나뿐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였지만, 서로의 소중함을 더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내가 퇴원한 날의 하늘빛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눈이 시려 눈물이 날만큼 새파란 하늘이었습니다. 결혼하던 날보다, 첫 아이가 태어난 그 날보다 훨씬 더 몇 배나 기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없던 한 달을 떠올리면 지금도 오싹합니다.

지금 이 땅에 작년 이맘때의 나보다 더 불안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불안에는 경험치가 없어 겪은 사람은 그 힘듦의 정도를 알기에 괴롭고, 처음인 사람은 체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끝을 쥐고 있는 이는 언제나 우리입니다. 하루빨리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기를 소원합니다.


* 라미(LAMY)
- 1930년 요제프 라미(Josef Lamy)에 의해 탄생한, 필기구 강국 독일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브랜드. 1980년 출시한 사파리가 수면 위에서 만년필 대중화에 일조했다면, 50년도 더 된 라미 2000은 물 아래에서 브랜드 정신을 꾸준히 이어옴. 단순함 속에 숨은 세련미를 끄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필기구 생산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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