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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핸드폰이 먹통이 됐다. 며칠 패키지 해외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배터리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여기저기 눌러보아도 화면이 뜨지 않는다. 공항에서 파견 통신사를 찾아 보여주어도 '기기고장'이라 방법이 없단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자신을 묶는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탈출'이라더니 나를 일상에 꽁꽁 묶어온 '핸드폰으로부터 탈출'은 확실하게 이뤄진 셈이다. 새벽이고 밤중이고 잠을 깨우던 알림 소리,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메시지, 선거홍보, 보험권유, 택배전화도 다 끊겼다. 다른 폰을 빌려 친구와 연락을 하려해도 막상 전화번호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핸드폰 없는 손이 허전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핸드폰 없는 사람은 없다. 괜히 기분이 불안해진다. 무슨 걱정해야할 일이 내가 모르는 새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다. 현대인 생활은 걱정이 없는 것도 걱정이다.

그러나 사냥꾼에 쫓긴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다고 사냥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핸드폰이 없어 개인적인 걱정거리는 차단되었지만 사회적인 걱정은 차단할 수 없다. 호텔방 TV는 YTN월드뉴스로 코로나19 소식을 24시간 쏟아내고 있다. 동남아에서 열리는 골프대회,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국제행사 취소, 해외여행규제, 우한 도시봉쇄, 격리 작전 등 전쟁이 벌어진 듯 비상사태다.

2003년 사스 사태, 2015년 메르스 사태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 사태, 세계는 뗄레야 뗄 수 없이 한 마을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먹통이 된 핸드폰 대신 책을 펼친다. 여행용으로 가져온 가볍고 얇은 책, <노자, 길과 얻음>이다. 1989년 도올 김용옥이 번역한 '노자 도덕경'이다. 전쟁이 하루건너 이어지는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난 노자는, 인류역사상 가장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핵전쟁 걱정, 테러 걱정, 이상기후 걱정, 신종바이러스 걱정에 가슴조이며 살고 있는 21세기 현대인에게 무슨 도움말을 줄 수 있을까.

도덕경 80장은 노자가 내세운 이상사회다. "될 수 있는 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인구를 적게 하라 (小國寡民)".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사회가 가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축소지향이다. 나라를 키우고 인구를 늘이라는 일이라면 앞만 보고 남을 짓밟으며 달리는 현대사회를 향해 '멈추라'도 아니고 '뒤로 가라'는 노자의 역설, 반문명론이 통할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명한 사회학자인 우치다 다쓰루(內田樹·70)가 주장하는 '축소사회'가 생각난다. 그는 <인구감소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이란 저서에서 "인구감소는 팩트다. 축소사회(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 형식의 사회)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최저 출산율 국가이다. 이대로 가면 몇 십 년 안에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한국은 출산율을 높이려고 매년 수 조원씩 쏟아 붇고 있다. 인구감소사회를 막으려고 총력을 쏟고 있는 한국이 '축소사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덕경 80장은 이어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를 노래한다.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하라(使有什伯之器 而不用 ),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일이 없게 하라 (雖有舟輿 無所乘之),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베풀 일이 없게 하라(雖有甲兵 無所陳之)."

시계, 핸드폰, 자동차, 비행기도 온갖 생활기기중 하나다. 탱크, 대포, 미사일, 핵폭탄도 온갖 병기중 하나다. 시계와 핸드폰을 쓸 일이 없는 세상, 자동차와 비행기를 탈 일이 없는 세상, 미사일과 핵폭탄을 베풀 일이 없는 세상을 얘기한다. 며칠 핸드폰 하나 고장 났는데도 불안해하는 난 그런 세상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

노자: 길과 얻음

도올 김용옥 (지은이), 통나무(2000)


태그:#소국과민, #축소사회, #핵폭탄, #핸드폰, #노자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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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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