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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모인 가락항운노조 조합원들과 노조가 고용한 용역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지난 11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모인 가락항운노조 조합원들과 노조가 고용한 용역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 황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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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타도!" 

1987년 6월 광장에서 울려 퍼진 구호를 기억할 것이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한 국민들이 직선제 쟁취와 민주화 실현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며 외쳤던 구호다. 2020년, 역사 속에서 깊숙이 잠들어 있던 그 시절 구호와 유사한 구호를 다시 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이다.

지난 11일, 서울가락항운노동조합(이하 가락항운노조)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가락항운노조 해산을 결정했다. 이를 반대하는 80여 명의 조합원이 노조 해산을 막기 위해 임시대의원대회 개최장소인 가락항운노조 사무실 앞에 모여 출입구를 봉쇄했다.

하지만 가락항운노조는 일부 조합원과 용역을 동원해 입구 쪽에서 몸싸움을 유도하고는 그 틈을 타 창문으로 회의장에 들어가 단 10분 만에 노조 해산을 결정해 버렸다. 007작전을 방불케 한 그 작전 이후 아수라장이 된 회의장 앞에서 울려 퍼진 한 마디.

"승리했다!"

이들은 35년간 삶의 터전으로 몸담았던 노조를 자기들 손으로 해산하고는 승리했다고 외쳤다. 누구의 어떤 승리를 말하는 것일까?
      
가락항운노조 민주화 운동
 
가락시장 하역노동자가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가락항운노조 민주화 투쟁을 촉발시켰다.
 가락시장 하역노동자가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가락항운노조 민주화 투쟁을 촉발시켰다.
ⓒ 황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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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한 하역노동자의 글이 올라왔다.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주 100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실태와 소수 집행부가 특권을 누리며 권력을 독점, 세습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현실이 고발되었다. 이후 이 글은 가락시장 하역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던 조합원들은 '가락항운노조 민주화를 위한 모임'(이하 민주화 모임)을 결성하고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송파지역의 노동조합인 송파유니온의 도움을 받아 조합민주주의 관련 조합원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뒤이어 수차례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많은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위원장이 타고 다니던 고급세단(제네시스 G80)이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로 구입되었고 운전기사까지 조합원 신분으로 배당금을 받고 있다는 것과 위원장이 배당금과 별도로 월 600여만 원의 기밀비를 영수증도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유인물을 통해 폭로되었다. 또한 현 위원장의 아들과 전 위원장의 아들이 역할도 명확지 않은 노조 간부로 임용되어 배당금을 가져가고, 현 위원장이나 전 위원장의 친인척이 노조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등이 고발되었다.

나아가 전 위원장이 27년간 종신위원장으로 있다 죽은 후 현 위원장이 7년 넘게 자리를 지켜오고 있으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현 지도부가 사실상 대의원을 지명하고 그 대의원이 위원장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한 이러한 대의원 선출방식에 위법의 소지가 있고, 만약 대의원 선출이 위법이라면 자격 없는 대의원이 선출한 위원장 또한 정당성이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가락항운노조는 민주화 모임이 힘을 얻게 되자 민주화 모임을 주도한 두 명의 조합원에 대하여 정직 1년의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징계 이후 오히려 조합원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이들은 결국 2주 만에 징계를 해제하고 조합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는 내용의 공고문을 부착했다.

나아가 가락항운노조 오연준 위원장은 민주화 모임 지도부와 2020년 3월 말까지 위원장 사임,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임시총회 개최 및 직선제 규약개정 등의 내용이 담긴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사실상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 항복이었다는 것이 확인되기까지는 4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 4일 오연준 위원장은 임시대의원대회 개최를 공고했다. 임시대의원대회 안건은 "조합의 합병, 분할 또는 해산에 관한 건"이었다. 임시대의원대회가 공고된 직후 조합원들의 민주화 요구에 잠잠하던 팀장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팀장들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가락항운노조가 서경항운노조로 통합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민주화 모임의 요구를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외부세력이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민주화 모임은 오연준 지도부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서경항운노조와 합병을 결의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기자회견 및 임시대의원대회가 개최되는 회의장 앞 농성을 준비했다.

노조 해산 통해 민주화 운동 제압하겠다는 전략
 
가락항운노조는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예상을 뒤엎고 노조 해산을 결정했다.
 가락항운노조는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예상을 뒤엎고 노조 해산을 결정했다.
ⓒ 황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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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대의원대회 결과는 예상밖에도 합병이 아닌 노조 해산이었다. 이들이 해산을 결정한 이유는 임시대의원대회 결과 공고 직후 바로 나타났다. 팀장들은 "2월 15일까지 서경항운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작업에서 배제될 수 있다. 권리금(1500~2000만 원 상당)을 모두 날릴 수 있다" 등의 발언으로 조합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며 서경항운노조 가입을 강요하였다.

또한 항운노조에 하역작업을 맡기는 도매법인은 노조해산 결정을 기다렸다는 듯 가락항운노조가 해산되어 하역업무를 할 수 없으니 서경항운노조에 하역업무를 요청하겠다는 내용의 공고문을 부착하였다. 이를 통해 조합원들 사이에 서경항운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작업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즉, 노조해산 결정은 오연준 지도부가 도매법인 및 서경항운노조와 손잡고 '작업권'을 무기로 민주화 운동을 무력화함과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조합 가입을 거부하거나, 가입이 거부되어 작업권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주어 민주화 운동의 동력을 뿌리째 뽑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노조 해산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제압하겠다는 그들의 전략은 현재까지는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고, 밟으려 해도 밟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역경과 탄압 속에서 노조 민주화의 흐름이 잠시 주춤할 수는 있겠지만, 이 과정을 계속해서 지켜본 사람들은 다시 민주화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저항을 만들 것이다. 1987년 6월 독재타도를 외친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연 그 기회의 순간은 언제가 될 것인가?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황재인 송파유니온 사무국장입니다.


태그:#가락항운노조, #민주화, #오연준, #송파유니온, #서경항운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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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노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송파구에 사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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