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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7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이 처리되면서 개정된 공직선거법이 통과되었다. 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선거연령이 19세에서 18세로 낮춰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6개 국가 가운데 19세 이상 선거권은 대한민국이 마지막이자 유일했다. 33개국이 18세 이상이고 오스트리아는 16세 이상, 그리스는 17세 이상이다.

많이 늦었지만 선거법 개혁이란 측면에서 크게 환영할 사건이다. 공직선거법 개정에 따라 올해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4·15총선에서 고교 3학년 가운데 14만 명에 해당하는 일부 학생들이 유권자가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에서는 주권자 참여 의식을 높이기 위해 총선을 앞두고 모의 투표를 통한 선거교육을 기획하였다. 이미 어느 시민단체에서는 19대 대선(2017. 5)과 제7회 전국지방선거(2018. 6)에서 두 차례 모의 투표를 통한 선거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다.

중앙선관위 또한 2019년 9월 독일, 캐나다를 비롯한 선진국 학교들이 주권자 교육 차원에서 모의투표를 포함하는 선거교육 사례를 영상자료로 적극 홍보한 적도 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올해 2월 6일, 전체회의를 통해 초중고에서 시행하려는 모의투표 선거교육이 선거법에 저촉될 수 있다며 불허 결정을 내렸다.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교원이 모의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행위 양태에 따라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행위에 이르러 공직선거법에 위반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교육시민단체에선 중앙선관위의 태도를 '이중적'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이처럼 선거교육 논란이 증폭된 현실에서 서울시 교육청은 한 발 물러나 외부 단체에 선거교육을 위탁해 교사가 아닌 외부 강사로 대체하는 것은 가능한지 선관위에 질의한 상황이다.

일부 보수적인 교육시민단체는 모의투표를 통한 선거교육이 학교현장을 '정치화'하여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위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흑색선전과 정치편향성을 지적한 대목으로 이러한 우려에 대해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실제로 한국 정치현실에서 그동안 치러진 선거전 양상을 보노라면 정책 대결이라기보다 인신공격성 흑색선전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교 사회가 속물적인 정치 현장으로 전락하는 것에 충분히 우려할 상황이라 예견할 수 있다. 하물며 선거운동 기간 특정 정치세력을 선전하는 와중에 정치세력 간 갈등과 대결이 연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모의투표를 통한 선거교육이 학교현장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선거교육 논란의 본질이 '정치중립성'보다 '정치공정성'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공정성'이 확고히 담보된다면 유권자로서 주권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시민성 교육은 아무리 권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사회는 '정치적 중립'은 껍데기였고 정치적 편향성이 만연한 경험을 안고 있다. 이승만 제1공화국 시절, 경찰을 비롯해 일반 행정공무원과 교육공무원을 대거 동원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던 어두운 역사가 그러하다. 오죽했으면 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 시절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국가공무원법으로 명문화했을까 싶다.

그러나 지난 시절 법조문에 명문화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 취지와 달리, 교육을 매개로 정치적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배반된 역사였다. 전체주의 냄새가 짙은 국민교육헌장을 전국의 초중고생들에게 달달 외도록 강요했던 게 60년대 말 학교풍경이었다. 70년대 제4공화국 유신체제에선 '학생회장=연대장, 교장=단장'이 되는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학교를 병영화하였다.

고교생들로 하여금 총기분해와 조립을 누가 빨리 하는지 경쟁하게 하였고 집총 훈련을 통한 분열과 사열 행사를 당연시했다. 학교 교육은 이미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여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홍보하는 데 마구 남용되었다. 그 시절 교육의 정치적 중립은커녕 정치 편향은 극에 달했다.

이 점은 80년대 전두환 5공 정권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불의한 정치권력은 교육과 언론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자신의 입맛대로 교육을 난도질했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 '국민정신교육'을 강조하며 영화 <국제시장>에서 보았듯이 국기강하식과 운동장 애국조회를 강제했다. 일제강점기 충량한 황국신민을 양성했던 신민(臣民)교육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70-80년대 애국조회 장면은 일제강점기 조회를 연상시킨다.
민주시민교육이 아니라 신민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 일제강점기 학교운동장 <욱일기> 앞에서 학생, 군인이 함께 조회하는 장면 70-80년대 애국조회 장면은 일제강점기 조회를 연상시킨다. 민주시민교육이 아니라 신민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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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나갈 땐 근처 학교 아이들을 태극기를 손에 들게 해 몇 시간이고 김포공항 길가에 줄지어 동원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은 온데간데없이 실종되었고 보도통제는 일상적 풍경이었다. 의문사가 줄을 이었고 정치권력의 야만성이 극에 달한 시절!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하는 뻔뻔함을 드러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시절까지 학교는 수십 년 동안 국정교과서 시대였다. 돌이켜보건대 '정의사회구현'을 전국 모든 관공서에 내걸고 큰소리쳤지만 가장 불의한 시절이 80년대 5공 정권이었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교육의 정치적 중립'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중립의 허울 아래 정당 가입 등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의 가장 초보적인 정치기본권마저 박탈했다. 시민과 공동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게 '정치'인데도 교실에선 '정치'를 금기어로 받아들였고 불온시했다.

아이들은 입시공부에 도움이 되는 국영수 과목에 열중하였고 그것이 '학생다운' 모습이고 '모범생'으로 치부되었다. 사회 시간에 배우는 민주주의와 선거, 그리고 법과 정치는 시험을 위한 관념적 지식일 뿐이었다. 학교생활을 통해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삶의 경험으로 생활 속 민주주의를 체득하는 게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학교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으로 별개의 영역으로 따로 존재해 왔다.

북유럽 어느 나라에선 각 정당의 정치인들이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자신이 속한 정당의 정책을 홍보한다. 마치 입시설명회처럼 각 대학의 입학처 관계자가 자기 대학을 홍보하듯이 청소년과 관련된 교육 정책을 중심으로 정당 활동, 바로 정치활동이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 펼쳐진다. 청소년들에겐 각 정당의 강령과 정책, 특히 교육 분야나 청소년 복지에 대한 정책을 접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정치교육'의 현장인 셈이다. 물론 동원을 시키거나 강제하지 않고 학생 참여는 자율에 맡긴다.

더 나아가 아이들은 논쟁적인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 교실에서 토론수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모의 투표를 통해 선거교육에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게 그들 선진국 정치교육의 현실이다. 그래서 핀란드를 비롯해 북유럽 국가의 투표 참여율은 70~80%를 상회한다. 우리나라의 50% 언저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선관위 통계자료(2020)에 따르면 2016년 20대 총선 투표율은 58%이고 18대 총선 투표율은 46.1%이다.

그간 한국사회에서는 '학교 교실 = 정치 무균실'이어야 했다. 간혹 정치이야기를 하는 교사는 이상한 교사이자 불순한 교사로 치부되고 처벌받았다. 물론 편향된 가치관을 갖고 학생들에게 특정 정치세력을 두둔하거나 특정 종교를 찬양하는 교사들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학교 교실은 '정치 무균실'로 존재해 왔다. 입시교육이 지배적인 현실에서 학생들은 현실 정치에 별반 관심을 보이기 어려웠다.

사실 대다수의 학교 청소년들이 정치현실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방치되었다. 정치적 결사체인 정당의 강령이나 정책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한다. 굳이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대학 입시에 불이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정당의 역사, 바로 한국 정당사로 들어가면 극히 일부 아이들을 제외하고 학생들 대부분은 먹통이 된다. '태정태세문단세'는 대부분 외어도 지금 한국사회 정당들이 과거 어떤 계통으로 존재해 왔는지에 대해선 까막눈이다. 한 마디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제대로 된 정치교육! 바로 주권자 교육을 받아보질 못한 게 우리네 교육현실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시민은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 학교와 사회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길러질 뿐이다. 선진국 시민의 높은 투표율이나 높은 노동조합 가입률, 그리고 시민단체에 대한 높은 참여율은 모두 오래 전부터 시행된 '민주시민교육의 결실'이다. 프랑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노조 대표로서 회사 대표와 어떻게 교섭하고 협상할 것인지가 실제 수업사례로 실려 있는 게 우연이 아니다.

중고교생 스스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은 어느 정당이고 더러는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결코 낯선 풍경도 아니다. 모두 학교 정치교육! 바로 주권자 교육이자 민주시민교육의 오랜 결실이다. 물론 교사든 공무원이든 프랑스에선 정당 가입이 허용된다. 선거에도 입후보할 수 있는 정치기본권이 보장된 나라가 프랑스이다.

김원태 학교시민교육연구소장의 <학교 민주시민교육의 현황과 과제>(2020)에 따르면 독일 중학교 정치교과서엔 중학생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자체를 탐방하고 자기 지역 내 외국인 참정권 실태를 조사하는 내용이 교과서에 들어가 있다. 나아가 지역사회 교통 현안 논쟁인 도로분리대 논쟁을 실제 교과서 내용을 토대로 토론수업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선거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실제로 선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예비 유권자로서 자신들이 꿈꾸는 정당을 만들어 보는 내용이 선거전 프로젝트 수업으로 함께 실려 있다. 독일의 학교교육이 토론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는 수업구조이자 학교환경이다.

독일 중고교 학교사회에선 민감한 정치사회현안을 날 것 그대로 학교현장에서 수업자료로 쓸 수 있다. 논쟁성 짙은 정치사회현안을 교실 수업으로 재현하는 게 일상적인 학교풍경이다. 1972년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따른 교육의 대원칙이 그대로 학교 교실 현장에 적용된 탓이다.

물론 교사는 특정한 가치나 지식을 아이들에게 강제로 주입하거나 교화시키려 애쓰지 않는다.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킬 뿐, 양쪽의 의견이나 다양한 시각의 주장들을 풍부하게 자료로 제시하고 토론을 유도할 뿐이다. 결론은 아이들 몫이다. 저마다 자신의 경험과 의견에 따라 토론수업을 거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간직한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한다.

독일은 연방 차원에서 '연방 정치교육원'이 존재하고 주마다 '주 정치교육원'이 존재한다. 학교사회와 시민사회가 상호 연계하여 민주시민교육을 평생교육체계 속에 녹여낼 수 있도록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적극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기본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미국이나 일본조차 교사의 정당 가입은 허용하고 있고 학생들에게 모의투표를 통한 선거교육도 시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현실과 너무나 차이가 크다. 교사든 학생이든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이 잘한 일이고 현명한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선진국은 단 한 군데도 없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대학생이 되거나 취업을 하여 사회인이 될 텐데 주권자 시민의식이 결여돼 있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선거를 통해 성숙한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성숙한 사회는 성숙한 시민들로 결정되고 구성된다. 성숙한 시민은 공동체문제, 바로 정치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참여하는 능동적 시민들로부터 시작한다. 학교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원리를 배우고 학교문화 속에서 민주주의를 생활 속에 체험하며 능동적 시민으로 성장할 때 건강하고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탄생될 수 있다.
  
교실 게시판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포스터를 배경으로 공부하는 학생들 모습이 인상적이다.
▲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포스터를 교실에 걸어두고 공부하는 학생들 교실 게시판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포스터를 배경으로 공부하는 학생들 모습이 인상적이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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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치적 중립'이란 미명 아래 교사와 학생들을 정치와 거리를 두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에 대한 무지를 자초하게 하고 정치무관심을 양산하며 궁극적으로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방식이다. 정치에 대한 무지와 정치무관심을 부끄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정치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나쁜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텃밭으로 기능하고 거꾸로 민주주의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공동체 사회가 건강하게 거듭나기 위해선 공동체 구성원인 시민 각자가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은 바로 공동체에 책임과 의무감을 갖고 연대의식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주권자로서 시민이 공동체 사회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참정권은 공동체 문제에 관심과 참여를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인 것이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주인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대역에서 서초역 진행 방향으로 대로변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서초동 집회장면(2019. 9. 28) 교대역에서 서초역 진행 방향으로 대로변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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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교육 논란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정치적 중립'의 이름으로 학교사회를 '정치 무균실'로 만들거나 의무교육을 마쳤음에도 정치에 무지한 시민으로 배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공동체 문제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능동적인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선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면서 선거교육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기보다 특정 정당에 치우치거나 특정 정치권력에 편향되지 않도록 '정치적 공정성'을 강조하며 주권자 교육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게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18세 선거 연령 결정은 만시지탄이지만 크게 환영할 일이다. 다만 선거교육 논란은 시도해 보지도 않고 관념적인 논쟁으로 치닫거나 지나친 우려 끝에 소모적인 논쟁으로 끝나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정치적 공정성'만 지켜진다면 교사가 하든 선관위가 하든 모의투표를 통한 선거교육은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하다.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게 '정치적 공정성'만 갖춘다면 문제될 게 없지 않은가? 정치에 대한 무지와 정치 혐오만큼 민주주의의 적은 없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사회일수록 정치 혐오를 조장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막연히 정치에 거리를 두게 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핀란드 총리로 34세 여성이 등장한 사실이 전 세계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다. 더구나 이념적 색깔이 다른 각 정당의 당수들이 연립내각의 장관으로 타협하는 것을 보면서 핀란드 정치교육의 힘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핀란드는 '청소년의회'가 구성돼 있어서 학생들이 정치활동을 경험할 수 있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적극 지원하며 조장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청소년의회'의 정책이나 제안을 실제 정치에 적극 반영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핀란드 청소년들은 학교 교육과 핀란드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정치교육활동을 보호받고 자신이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만큼 공동체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성장한다. 다시 말해 핀란드 청소년들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현실사회 속에서 체감한다. 그 결과 핀란드 청소년들은 주권자적 시민성을 체득한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핀란드, 노르웨이, 아일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은 중고교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20여 년 전부터 학교교육을 통해 실천해 왔다. 인종갈등, 성차별과 갈등, 계급갈등, 다문화 갈등, 노사갈등, 지역갈등이 폭발한 20세기, 이들 문제를 성숙한 관점에서 해결하고 관용과 존중의 정신이 녹아있는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선진국들은 능동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해 온 것이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 다양성과 창의성이 존중되는 시대에 '민주시민교육'을 통해서 차별과 배제, 불평등을 극복하고 존중과 배려, 자율과 정의, 그리고 참여와 연대의 미덕을 간직한 적극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것은 시대의 요청이자 이 시대 교육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요컨대 '교실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와 교육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구실로 선거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민주시민을 길러내야 할 책무를 지닌 교육담당자들이 직무를 태만히 한 결과이다.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일은 학교 교육과정이나 민주적인 학교 문화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다. 학교를 둘러 싼 시민사회와의 유기적 연계,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려는 국가사회의 지원체계가 함께 통합적으로 작동할 때 가능한 일이다.

더 이상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미명하에 선거교육을 포함해 '민주시민교육'을 방치한다면 이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해야 할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모의투표를 포함한 선거교육의 해법은 복잡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게 '정치적 공정성'의 바탕 위에서 선거교육을 포함한 주권자 교육을 강화하고 확대하면 된다.

모쪼록 아이들이 공동체(정치)에 관심을 갖고 주권자로서 성숙한 판단을 하는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공동체 문제(정치문제)에 무지한 아이들을 배출해 온 교육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젠 멈춰야 한다. 스웨덴의 16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그저 나온 게 아니다.

태그:#정치적 중립성, #선거교육, #민주시민교육, #정치적 공정성, #툰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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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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