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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
 박재순 박사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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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1950~)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공부했다. 1974년 대학 졸업 후 민청학련사건으로 그는 서대문구치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74년 5~8월에 그는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 당하게 된 하재완 선생(1932~1975)과 서대문구치소에 함께 있었다. 그는 서대문구치소 1사 1층 18호실에 하재완 선생은 16호실에 있었다. 그는 지금도 하재완 선생의 잔뜩 쉰 목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고 한다.

당시 하재완 선생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서 탈장이 되었고 물고문 때문에 폐농양증에 걸려서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묻어 나왔다. 하재완 선생은 고문으로 창자가 고환으로 빠져나오는 탈홍,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탈장이 되어서 한 손으로 항문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항문으로 집어넣으면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는 출소하기 전 이런 하재완 선생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재완 선생은 그가 출소하고 1년도 안된 1975년 4월 9일 사형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 1974년 출소 후 박재순 박사는 한신대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에게서 그는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로부터 카를 바르트 신학을 배웠다. 그 결과 석사학위 논문은 카를 바르트 신학, 박사학위 논문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썼다. 그러나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박재순 박사는 한울공동체 사건으로 다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관련기사: "양승태 사법부, 민주화운동 국가배상 거부로 일관했다"). 

1980년 대 중반 출소 후 그는 안병무 박사가 세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면서 국제성서주석 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당시 한신대에서 해직 상태였던 안병무 박사는 매주 1~2회 연구소 직원들에게 성서와 신학에 관한 강의를 들려주었다. 당시 안병무 박사 강의를 가까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박재순 박사의 인생에 있어서 "더없는 행운이고 특권이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지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박재순 박사는 함석헌기념사업회 부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 필자는 초대총무를 지냈고 우리는 손발이 너무 잘 맞았다. 당시 6년 간 매달 함석헌 강좌를 열어 함께 공부하던 시절이 지금 생각하니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2007년 그는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 등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힘쓰고 있다.

그가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등이 있다. 최근에는 유튜브 방송 '박재순의 씨알 이야기'를 통해 함석헌 등의 삶속에서 형성된 철학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 그가 최근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을>을 펴냈다. 다음은 지난 12일부터 17일까지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독립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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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은 독립운동가, 웅변가, 민족지도자 등 여러 별명을 가지고 있다. 과연 도산이 어떤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지?
"도산은 생활철학을 확립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평생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죽을 때까지 흔들림 없이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 검사가 감옥에서 나가면 계속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고 도산에게 물었을 때 그는 서슴없이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한다'고 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 그는 위대한 웅변가가 되었고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지만 깊고 높은 정신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추구하는 대신에 가난한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깨워 일으켜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민국민회 총회장으로서 도산은 1917년에 농노처럼 비참하게 사는 멕시코의 교민들 속으로 들어가서 7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가 노동자들 속에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면 노동자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고 뛰어난 조직활동가였다. 점진학교, 공립협회, 신민회,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임시정부, 민족대표회의, 한국독립당은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서 그가 직접 설립했거나 주도한 단체들이다."

- 일제강점기 도산은 악질 일본경찰에게도 본받아야 할 장점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수사한 악질 일본경찰이지만 제 나라 일본을 위해서는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도산이 칭찬한 것이다. 그처럼 치열하게 헌신적으로 일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도산은 어떤 사람이든 적은 선(善)을 가졌으면 그 선을 주목하고 인정했다.

일본경찰의 철저한 직업정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빈틈없이 하는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도산은 생각한 것 같다. 도산은 자기를 주체로 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심지어는 사물조차도 주체로 보고 존중했다. 도산을 취조했던 일본경찰 미와 경부 부부는 자신들을 존중했던 도산의 인격에 감동했고 도산을 충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1937년 도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된다. 이때 도산을 수사한 일본검사가 도산에게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묻는다. 도산은 지제하지 않고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1930년대는 일본제국주의 전성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도산은 어떻게 해서 조국 독립에 대해 이런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보나?
"도산이 조국의 독립을 확신한 데는 세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째 한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고, 둘째 세계 인류의 공의가 대한독립을 바라고, 셋째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도산은 믿었다. 그는 한국인들 가운데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자들도 있고 조국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자들도 있지만 한민족 전체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염원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미국과 중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세계인류가 정의와 평화를 열망하고 정의와 평화의 길로 나아간다고 확신했다. 그는 늘 세계정세를 살피고 분석하고 진단하면서 세계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깊이 성찰했다.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싸우는 일본이 결국 패망할 것을 그는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일본이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니 조국의 독립에 대한 신념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21세기에는 도산의 정신이 필요하다
 
박재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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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개화를 민족의 독립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윤치호 같은 지식인은 한국민족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역사의 운명과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도산도 문명개화를 추구했지만 나라의 주권을 잃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도산은 일본과 전쟁을 해서라도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윤치호와 도산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나온 것으로 보나?
"윤치호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서양의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고 부강한지를 보았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선진문명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미개한 조선민족과 민중을 열등하고 무능하고 더러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서양의 문명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조선민족을 무가치하고 열등한 것으로 멸시하고 불신했다.

열등하고 무력하고 게으른 조선민족을 교육해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으나 조선민족과 민중을 결코 신뢰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문명부강한 나라들이 힘없고 미개한 나라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힘(칼)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부강한 일본이 가난하고 무력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도산은 민중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주체적으로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고 우리 힘으로 문명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민중과 함께 일어섰다. 그는 자신과 민중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민중과 하나로 되는 체험을 했던 그는 민중을 신뢰하고 존중하고 사랑했다.

그는 미국문명의 뿌리와 씨를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함'으로 보았다. 워싱턴 장군 같은 영웅이 미국문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서로 협력해 미국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시키고 문명국가로 만들었다고 도산은 보았다. 미국의 산업과 교육도 민이 서로 단합하고 협력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라고 도산은 말했다."

-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왜 20세기를 살다간 도산의 삶의 사상을 아는 일이 왜 중요하다고 보는지?
"'나'를 발견하고 확립한 도산의 '나' 철학은 동서정신문화를 아우르며 민주공화의 정신을 구현한 한국철학이며 세계보편철학이다. 나는 도산이 2500년 전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등이 이룩한 기축시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새로운 기축시대를 여는 새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었다고 본다. 이전 기축시대는 성현과 성현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사는 시대다.

그러나 민주혁명과 과학혁명을 일으킨 근현대는 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 제 삶을 제가 살아야 하는 민주시대다. 성현이 아니라 '내'가 내 삶과 역사의 주인과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성현의 가르침을 이어서 내가 내 삶을 나답게 사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이 민주시대고 과학의 시대다.

도산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중심과 전면에 놓고 '나'를 사랑하는 애기(愛己)의 원칙을 확립하고 '나'를 사랑하는 공부를 역설했다. 이제까지 어떤 종교철학에서도 '나'를 사랑하는 애기를 가르침과 사상으로 제시한 이는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에서 시작해 공과 사를 함께 세우는 공사병립, 나를 바로 세움으로써 공의 세계를 열어가는 활사개공(活私開公), 건전한 민주국가를 건설해 세계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세계대공을 말했다.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해 스스로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가르친 도산은 새로운 기축시대의 패러다임을 만든 이라고 생각한다.

'그(성현)의 시련'이 아니라 '나의 시련'을 노래한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나를 형성해간다고 노래하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Love yourself(Answer: Love myself)', 'Map of the Soul(outro: Ego)'도 나를 중심에 놓고 나를 사랑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라는 도산의 '나' 철학과 일치한다. 도산의 철학은 20세기에 한정되지 않는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철학이며 '나'의 삶을 저마다 저답게 살려는 젊은이들의 철학이다."

애기애타 : 안창호의 삶과 사상

박재순 (지은이), 홍성사(2020)


태그:#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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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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