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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원을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왔다. 동기도 다양하다. 범죄로 인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이야기가 일반적이지만, 채무를 피해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도주하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에도 부라쿠민 차별로 인해 정체를 숨기고 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은 현대에도 여전하다.

불만족스러운 일상 속에서 겪는 난관이나 지루함에 지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새로운 삶을 사는 상상을 해볼 법도 하다. 폭력적인 스토커나 범죄자에게 추적당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삶이 안전을 제공할 것이다. 게임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해서 선택, 플레이하듯이 자신의 새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누군가는 과거의 사람이 남긴 기록을 추적하여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흔적없이사라지는법
 흔적없이사라지는법
ⓒ 프랭크에이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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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세상에는 많은 책이 있고 시원하게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이런 책도 있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법'은 실전 잠적의 기술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실제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법에 대해 쓴 책이다.

저자인 프랭크 에이헌은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과거에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고객에게서 수고비를 받고 구구절절한 온갖 사연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스킵 트레이서'라는 직업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그는 별다른 권한이나 정보 없이도 새로운 정보를 얻어내는 일에 능숙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은 사람을 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불안한 일을 했지만 덜 위험한 영역으로 사업을 이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노하우를 짧은 책 안에 응축해서 정리한 것이다.

사립 탐정이 활성화된 미국에서 활동한 탓인지, 저자는 과거에 미묘하고도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암시한다. 책에 나오는 내용도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할 것을 말리지 않는 등 그야말로 실전 지식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사라지는 방법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고 범죄자가 저자를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책은 불법행위를 하라고 권하는 책은 아니다. 저자는 도덕(가치관에 따라)이나 예의의 영역은 넘나들지만, 법의 영역은 넘나들지 않는다. 그는 가능하면 채무 관계는 깔끔하게 해결하고, 위조 여권을 만들거나 자살을 위장하는 등의 행위는 하지 말 것을 권한다. 채권자나 국세청에 문제될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대신 저자 나름의 준법 의식 안에서 해결 방법을 제시하며 재치있게 사람들로부터 사라지는 법을 설명한다. 우선 카드와 핸드폰, 소매점에 등록된 개인정보, SNS에 등록된 정보나 이메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고치거나 없애야 한다. 상담원이나 가족이 정보를 유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전화번호부, 블로그, 인터랙티브 사이트, 바이러스성 마케팅 광고 캠페인 등도 포함된다. 특히 위험한 것은 공공기관이나 전화회사, 인터넷회사 등에서 고객 상담 업무를, 즉 당신이 제공한 개인정보를 외부 아웃소싱 업체에 맡기는 경우이다. 그런 곳의 콜 센터 직원들을 속여먹는 건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52P
 
페이스북은 아예 탈퇴할 것을 권한다. 가족의 페이스북도 주의해야 한다. 기껏 외국에 도망쳤는데 가족이 페이스북에 자기 사진을 올리면 모든 일이 끝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 여행 잡지를 사거나 외국에 대해 알아보는 일도 피해야 한다. 물품 정기 구독도 피해야 한다. 항상 다른 사람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을 갖고 은밀하게 움직일 것을 제안한다. 또한 필요하다면 적절한 허위 정보를 섞어야 다른 상대로부터 사라지기 쉽다는 사실도 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는 적정한 돈이다. 과거와 결별하고 그 후에도 이전과 같은 삶의 수준을 영위하려면 돈이 들어간다.

책은 도피 후에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권한다. 완벽하게 새로운 삶을 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며, 긴장과 자유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지인이 그리워 연락하려 하는 순간 잡힐 수도 있고, 취미 생활을 지속하려다가 취미 영역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다. 새로운 삶을 살아도 과거와 같은 취미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 추적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잠적의 길은 험난하고 지루하다. 위험하고 갖춰야 할 것도 많다. 현금, 정력, 희생, 빈틈없는 사고, 용기, 결단력을 요한다.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268P
 
다만 책의 제안 중에는 한국의 예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미국과 한국의 구매 문화가 다르고 정보 체계에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을 제외한, 이메일 관리나 SNS,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은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상상을 구체적으로 돕는다. 하지만 반어적으로 이 책은 상상의 실천은 정말 어렵고, 웬만해서는 아무나 못한다는 간명한 사실도 알려준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 - 실전 잠적의 기술

프랭크 에이헌 (지은이), 최세희 (옮긴이), 씨네21북스(2012)


태그:#잠적, #도피, #도주, #신분,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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