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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가 있다면 나라도 없는 땅에 그것도 계집아이로 태어난 거밖에 없다. 일본놈들이, 지금도 위안소에서 내 괴롭히던 놈들 생각하모 오독오독 뜯어 죽이고 싶어. 이래 늙고 병들어도 내도 여자라. 남들처럼 자식도 낳고 재미나게 살고 싶었는데 다 절단 나삐맀다. 난리 때문에 내 청춘 다 부서져 버렸어."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박숙이(1922년 3월 22일~2016년 12월 6일) 할머니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김정화 남해여성회장은 2월,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받은 학위 논문(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박숙이 할머니 생애사 연구)을 통해 고인의 삶을 조명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박숙이 할머니와 김정화 남해여성회 회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박숙이 할머니와 김정화 남해여성회 회장.
ⓒ 남해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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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생애사를 연구한 사례는 드물다.

남해에서 태어났던 고인은 나이 16살 때인 1939년 강제 납치되어 부산, 나고야, 만주를 거쳐 상해위안소에서 6년간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1948년 부산으로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결혼 생활을 못하고 양아들‧딸 셋을 키웠다.

아픈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할머니는 죽기 전에 세상에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는 90세 되던 2012년 9월,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이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4년 만에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등록 당시부터 할머니와 가까이 지냈던 김정화 회장은 할머니께서 "내 책을 내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는 "책을 내달라는 박 할머니 말씀에 겁도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드렸다"며 "할머니께 드린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의 생을 세상에 단 한 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김정화 회장은 공개선언 뒤부터 돌아가시기까지 4년간의 일상과 활동을 담은 사진자료집 <할머니를 부탁해>(2013년, 2017년)와 기록 영상(2015년)을 만들어 냈다. 또 남해여성회는 2013~2015년 사이 남해지역 5개 학교에서 할머니의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할머니의 말년을 관찰한 김 회장은 "할머니가 생활하시는 공간은 늘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벽에는 작은 태극기를 꽂아 두었다"고 했다.

그는 말년에 낯선 사람, 그것도 남자가 집으로 찾아오는 걸 두려워했다고 한다. 다음은 김 회장이 소개한 한 일화다.

"사전에 의논이나 동의도 없이 종편TV 남자 기자가 할머니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기자는 아드님께 통화하고 할머니댁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미리 연락을 받지 못했던 할머니는 남자가 혼자 찾아온 것을 불안해 하셨고, 도대체 누가 어찌 알고, 우리 집에 왔다 갔는지 저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 그 기자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남자가 혼자 찾아온 것부터 이미 할머니는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할머니 댁 기둥에 서비스 방문차 집에 사람이 들어오면 음악과 함께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라는 녹음된 기계음이 나오게 해놓은 시스템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녹음 음성이 남자 목소리였고, 할머니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당장 떼어버렸다고 하셨다. 간병사의 말을 전해 듣고 그 이유를 여쭈어보니, 그 음성이 꼭 위안소에 들어올 때 일본군인들 인기척처럼 들리고 목소리도 남자라서 너무 싫다고 하셨다."

"동맥을 두 번이나 끊어서 죽으려고 했다"

위안소 생활도 털어놓으셨다. 할머니는 "만주에 도착하고 갑빠(텐트)처럼 생긴 집에다 끌고 간 여자들을 밀어 넣었고, 다음 날부터 군인들이 들어왔다"고 했다.

"군인들이 한도 없이 들어와. (울먹임) 무섭기도 한도 없이 무섭고, 처음이니까 저희들 말을 안 들을라 하제, 이놈들은 자꾸 달려들제, 말을 안 듣는다고 야구방망이 같이 생긴 방망이로 때리는기라. 딱 때렸는데 내 허리가 부러져버렸어. 내가 맞아서 앞으로 엎어지니까 거짓말인가 싶어 일으켜 세웠고.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갈비뼈가 2개 나갔더라."

"강제로 달려든다 아이가. 군인들이 또 들어와 … 사는 것이 하도 기가 막혀서 군인한테 얻어놓은 면도칼로 동맥을 두 번이나 끊어서 죽을라고 했다가 발각돼서 죽도록 맞았어. 이게 그때 생긴 흉터 아이가."


할머니는 왼쪽 손목에 두 줄의 흔적을 죽을 때까지 있었던 것이다. 증언은 계속 되었다.

"군인들 가는 데로 데리고 댕겨. … 말도 다 못해. 하루 열 명도 좋고 스무 명도 좋아. 그러니까 죽은 송장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남자가 달려드는 기라. 군인들이 사정도 없는 기라. 사람으로 취급 안해. 짐승도 그리 안 키울 끼라. 군인들이 화가 나모 머리를 때리 쌌거든. 그래 귀가 먹고 눈이 어두벗는기라. 그때 맞아 골병 다 들고, 병신 다 되고 고마 그리 됐는기라."

"공일(일요일)에는 나래비로 들어와 오는 대로 다 받아야 돼. 말로도 다 몬해. 그 고통을 당하고 살았는기라. 우리가. 남자들이 여럿이서 건드리는데 어떻게 애가 생길끼고. 생각해 봐라. 공장이(몸이) 싹 다 망가졌는데, 우찌 아이가 들어서것노. 그리 아이를 낳고 싶어도 별별 수를 다 쓰도 안되는 기라."
 

할머니는 '일본군 성노예 트라우마'를 평생 갖고 살았다. 다음은 김정화 회장이 들려준 일화다.

"3‧1특집 취재 인터뷰에서 기자가 직업의식이 발동했는지 '하루에 얼마나 많은 군인들을 받으셨어요'라고 질문을 했다. 할머니께서는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인터뷰를 하시면서 '그런 거는 물어보지 마라. 나도 이래 됐지만 여자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기자면 다냐? 물어볼 걸 물어봐라'며 역정을 내셨다."

김 회장은 "일본군 성노예 트라우마가 생활 곳곳에서 할머니를 아프게 했던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다"며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경험이 학생들을 위해 역사교육에 쓰이기를 희망하셨지만, 의도와 달리 함부로 여긴다고 느끼시면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셨다"고 했다.
  
김정화 남해여성회 회장이 경상대 대학원 학위논문(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박숙이 할머니 생애사 연구)을 남해추모누리 공동묘지에 있는 박 할머니의 묘소 앞에 놓아두었다.
 김정화 남해여성회 회장이 경상대 대학원 학위논문(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박숙이 할머니 생애사 연구)을 남해추모누리 공동묘지에 있는 박 할머니의 묘소 앞에 놓아두었다.
ⓒ 남해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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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손자들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날 때까지는"

할머니는 80대 후반에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결심했다. 김 회장은 "할머니는 손녀와 손자 3명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날 때까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가 85살이 되어서 신고를 결심했다"고 들려주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어디에 어떻게 신고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결심을 하고 나서 3년 넘게 관공서를 왔다갔다 했지만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내가 위안부 갔다 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박숙이 할머니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한 '제보자' 때문이다. 몇 번을 관공서에 찾아갔지만 '공개'하지 않다가 하루는 찾아가 "내가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대하느냐. 내가 왜정 때 일본 사람들 밥, 빨래해주고 일한 사람인데…"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위안부' 말을 못했다고 한다.

당시 이런 할머니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던 '제보자가' 남해로 출장을 갔다가 할머니가 관공서에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보고는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를 찾아 연락했던 것이다. 이후 이경희 대표가 할머니댁을 찾아 피해자 등록을 주도했다. 

김정화 회장은 "박숙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해자가 맞다는 생각에 밤 12시경 여성가족부 담당관에게 전화를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박 할머니는 236번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이 되었다.

할머니가 말년에 학생들 앞에 서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소원? 내 소원은 딴 거 없다. 내 한테 아무 일도 없었던 16살 그 때로 내를 돌리놔라(한숨). 일본놈들이 내 청춘을 다 뺏어 갔다 아이가. 억울하고 분해, 잠도 안와. 나이를 이 만치 묵어서 뭔 소원이 있것노? 할 수만 있다카모 학생들한테 강연하는 거. 그기 젤로 하고 싶다. 이제는 훌훌 다 털어내고 싶다."

김정화 회장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말하지 못했던 일을 강연으로 풀어내려 하신다는 것에서 할머니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고 했다. 할머니는 대학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우리가 일본한테 진 것은 무기가 없어서라. 우리 조선은 칼인데 일본놈들은 총을 들고 싸운 게 우찌 이기것노. 열심히 공부해서 부디 잘 사는 부국 만들어달라. 무기도 많이 장만해서 전쟁 하면 이겨야 된다 (…) 텔레비전 보면 지가 놓은 애를 못 키워서 갖다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천벌 받을 짓이다 (…) 요즘 아이를 안 놓고 개만 키워. 전쟁나면 개가 나가서 싸울 거가."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한일 위안부 회담'에 대해, 박 할머니는 "내한테 위안부 협상이 있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어떤 건지 말해주는 사람도 니(김정화)가 처음이다. 고통을 당한 거는 낸데, 미안타고 사과한다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와서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가"라고 했다고 한다.

김정화 회장은 "기록과 기억 행동, 사회적 재현으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이어갈 때,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같은 반인도적 전쟁 성범죄가 인류에게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을 비롯한 남해여성회는 2017년부터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에 남해지역 인권문화제인 "숙이나래 문화제"를 열어오고 있으며, '경남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활동도 하고 있다.

남해에는 2015년 박숙이 할머니의 모습을 재현한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고 이곳을 '숙이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박 할머니는 남해추모누리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19명만 생존해 있다.

태그:#일본군 위안부, #박숙이 할머니, #남해여성회, #경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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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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