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

KBS 2TV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 ⓒ KBS

 
1980년대 민속씨름은 프로야구, 프로복싱에 버금가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였다. 특히 천하장사 결정전이 열리면 장충체육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당시 주관 방송사였던 KBS 1TV는 5시반부터 중계를 시작하여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9시 뉴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모래판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화면에 담았다.

1983년도에 제1회 천하장사 대회가 개최되기 직전만 하더라도 씨름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1970년대부터 모래판을 평정했던 김성률 장사, 김성률 장사의 아성을 무너뜨린 홍현욱 장사, 그리고 홍현욱 장사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이준희 장사 등이 모래판을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뻔한 결과가 예상되던 승부였다.

그래서 1회 천하장사 대회가 펼쳐지기 직전만 하더라도 천하장사의 주인공은 홍현욱 장사 아니면 이준희 장사가 거머쥘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태백급, 금강급, 한라급 ,백두급 등 체급을 가리지 않고 맞붙는 천하장사 대회에서 체격적인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는 백두급 선수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에서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한라급의 강자 최욱진과 당시 경남대 2학년생이었던 신예 이만기가 맞붙었다. 한라급 선수들답게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기술 씨름을 구사한 두 선수는 모래판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박진감을 선사했고, 마지막 판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이만기 장사가 천하장사를 거머쥐는 대파란을 일으킨다.

당시만 해도 '언더독'에 불과했던 약관 21세 이만기의 천하장사 등극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체격적으로 불리한 축에 속하는 한라급 선수가 내노라하는 거한들을 무너뜨리고 정상에 등극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덩치로 밀어붙이는 싱겁고 지루한 씨름이 아닌 이름(만기)에 걸맞게 화려하고 다양한 기술로 다이나믹한 승부를 펼치는 이만기의 기술씨름에 팬들은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그 후 이만기의 행적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민속씨름에 영원히 남을 전설 그 자체였다. 이만기가 한라급에서 백두급으로 체급을 옮기면서 팬들의 관심은 당연히 백두급에 가장 많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만기의 은퇴 이후 이만기 못지 않게 다이나믹한 씨름을 구사하던 신예 선수들인 강호동, 백승일 등이 예상보다 빨리 모래판 무대에서 퇴장하면서 씨름은 서서히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팬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던 백두급의 씨름은 기술 씨름의 흔적은 갈수록 흐릿해지고 일본의 스모 선수 체형을 방불케 하는 거구들의 둔한 씨름이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씨름의 간판 선수들이 돈벌이를 위해 평생 해보지 않았던 격투기 무대로 진출하는 서글픈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씨름의 흑역사는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지상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채널에서조차 씨름을 접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KBS 2TV <씨름의 희열>의 한 장면

KBS 2TV <씨름의 희열>의 한 장면 ⓒ KBS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지상파 방송을 통해 매주 씨름을 접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스포츠 중계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KBS 2TV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 10시 35분 방송되는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이란 프로그램이다. 민속씨름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와 방송인 김성주 그리고 예능 토크에 일가견을 보유한 붐이 함께 중계를 맡으면서 씨름에서 그나마 경량급에 속하는 태백, 금강급 선수들을 대상으로 오디션 형식을 빌려 경쟁을 펼치는 방식의 프로그램이다.

<씨름의 희열>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씨름의 가치를 모처럼 접할 수 있을 뿐더러 그 동안 씨름에 관심이 없던 시청자들까지 씨름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신드롬이 차근차근 벌어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씨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이나믹함을 확실히 제공한다는 점이다. 중량급인 한라, 백두급에 비해 태백, 금강급은 다양한 기술이 몇 초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선보인다.

1980년대 민속씨름 중흥기 시절 씨름 선수들은 마치 오락 게임의 캐릭터처럼 다들 저마다의 필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만기의 들배지기, 이봉걸의 신장을 이용한 밀어치기, 손상주의 낚시걸이, 이승삼의 뒤집기, 고경철의 잡채기 등 다양한 기술씨름의 진수가 선보이면서 모래판에 넘어가는 순간까지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다이나믹함이 펼쳐진다.

이런 기술의 향연이 <씨름의 희열>에 등장하는 태백, 금강급 선수들에 의해 다이나믹하게 펼쳐지면서 과거 민속씨름의 중흥기를 접했던 이들에겐 짜릿한 향수를, 그리고 씨름을 몰랐던 이들에게는 그 동안 몰랐던 씨름의 매력을 아낌없이 전파해주고 있다. 제목 그대로 씨름을 보면서 짜릿한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선을 겨우 통과한 소위 '언더독'으로 취급되던 선수들이 예선을 1위로 통과한 선수들을 누르는 이변들이 속출하면서 더욱 흥미는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태백, 금강급 선수들은 초라해 보일 정도로 왜소한 체형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정착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태백, 금강급 선수들은 한결같이 몸짱의 매력을 맘껏 과시하고 있다. 보는 즐거움도 배가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승호, 박정우, 임태혁, 최정만 등은 잘 다듬어진 몸매와 더불어 훈남의 외모를 과시하면서 많은 여성 팬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 동안 텅 빈 체육관에서 경기하는 것이 익숙해졌던 선수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급증한 관심을 공개방송을 통해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서 어찌할 바 모르는 그들의 순박함이 인터뷰에 묻어나오고 서로 체육관 밖에선 누구보다 친한 형동생으로 마주하다가 모래판에서 냉정한 승부를 펼쳐야 하는 순간에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각박한 삶에서 훈훈함까지 마주할 수 있다.
 
 KBS 2TV <씨름의 희열>의 한 장면

KBS 2TV <씨름의 희열>의 한 장면 ⓒ KBS

 
<씨름의 희열>은 그동안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민속 스포츠 씨름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 오는 22일 창원실내체육관 (프로농구 LG 세이커스 홈구장)에서 최후의 8강에 진출한 선수들이 태극장사를 두고 피할 수 없는 한판승부를 펼치게 된다. 벌써부터 8강 대진표는 소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금강장사 3인방 이승호, 임태혁, 최정만이 같은 풀에 속해 있어 셋이 동시에 결승에 진출할 수 없는 '죽음의 레이스'가 펼쳐지게 되면서 흥미를 모으고 있다.

그 동안 모래판에서 자신의 모든 기량을 아낌없이 선보인 <씨름의 희열> 참가 선수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씨름은 역시 다이나믹한 스포츠였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이 프로그램이 시즌제로 정착하여 전국에서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는 모든 씨름 선수들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로 작용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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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양형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스포츠 씨름의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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