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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화랑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수련활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주 화랑마을. 석장사지 주변에 위치해 있다.
 신라 화랑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수련활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주 화랑마을. 석장사지 주변에 위치해 있다.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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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운 임금으로 진흥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흥왕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화랑도 창설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은 민가의 낭자 중에서 효도와 우애 그리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슬기롭고 의로운 인재를 뽑아, 이들을 육성하기 위해 원화(原花) 제도를 만들었다.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를 먼저 만든 것이다.

젊은 여성들을 뽑아 무리를 지어 놀게 하면서 그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해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인재들 중 남모낭(南毛娘)과 교정낭(峧貞娘)이라는 두 여성을 선발하여 무리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우두머리를 원화라고 부르며 그들을 중심으로 무리와 어울리게 하였다.

두 원화는 300~400여 명이 넘는 무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였으나, 서로 자신의 우월성과 아름다움을 뽐내며 시기하고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교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모를 자기 집으로 꾀어 술을 잔뜩 먹인 후 돌을 사용하여 죽인 후 북천에 빠뜨려 버렸다.

죽이는 모습을 누가 보았는지 '교정이 남모를 돌을 사용하여 죽인 후 북천에 빠뜨렸다'는 노래가 어린아이들 사이에 널리 불리게 되었다. 노래를 들은 성 안의 젊은이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북천을 뒤져 남모의 시신을 찾아내자마자 분노하여 곧 교정을 죽인다. 이를 전해들은 진흥왕이 크게 노하여 명을 내리고 원화 제도를 폐지시켰다.

진흥왕은 비록 원화 제도는 실패하였지만, 나라를 융성하게 하기 위해 외모가 뛰어나고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양갓집 곱상한 남자들을 뽑아 '화랑'이라 부르게 했다. 화랑들은 경치가 빼어난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였다.

화랑들은 무엇보다 친구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는 의리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교우이신의 표본, 임신서기석을 발견하다

1934년 경주 송화산 기슭 석장사지에서 작은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게 바로 임신서기석이다. 임신서기석은 길이가 약 30cm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로 아주 작으며, 한 면에 5줄 74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임신서기석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임신서기석 모습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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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였다."
 
비문의 내용을 읽어보면 화랑으로 보이는 두 젊은이가 나라에 충성을 다짐하고, 열심히 학업에 증진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중 '교우이신'에 해당하는 내용도 들어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신서기석이 처음 발견된 석장사지 주변에는 현재 신라 화랑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수련활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화랑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 임신서기석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석장동 1272 (경주 화랑마을 - 석장사지)
입장료 및 주차료 : 무료

원광법사와 세속오계

경주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20분 거리에 있는 금곡사지에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세워져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의 계율, 즉 세속오계의 정신이 스며있는 곳이다.

경주 시가지에서 안강을 거쳐 영천 고경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도로변에 하곡지라는 연못이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면 '화산곡지'라는 큰 저수지가 보인다. 화산곡지 초입부터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계속 산길을 타고 가면 금곡사지가 나온다. 인적과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이라 너무 한적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는 수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가슬갑사'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다. 가슬갑사는 지금의 청도군 운문산에 있었던 어느 한 곳의 사찰을 말한다. 어느 날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젊은이가 원광법사를 찾아왔다. 두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원광법사에게 "젊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법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원광법사는 두 젊은이에게 "그대들은 속세에 있는 몸이니 부처님의 계율을 다 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그대들이 지킬 수 있는 세속오계를 가르쳐 주리라.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치 말라 "라는 말을 남겼다.

원광법사가 남긴 다섯 가지 계율이 바로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다. 화랑도는 이 '세속오계'를 신조로 삼아 크게 발전하였으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었다.
  
 경주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모습
 경주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모습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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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원광법사 부도탑은 원래 부서져 있던 것을 삼층석탑 형태로 복원하였다. 지금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7로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원광법사는 중국에서 불교를 배웠으며, 화랑도의 생활신조인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주었고,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기 위해 보낸 걸사표(乞師表)를 지을 정도로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원광법사는 신라 진평왕 52년(630)에 황룡사에서 입적하시자 명활산에 장사 지내고, 삼기산 아래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탑은 높이 2.15m이며,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얹어 놓았다. 1층 몸돌은 여러 곳이 파손되었지만, 4면에 마련된 문틀에 감실을 만들고 좌불을 돋을새김 하였다.

원광법사 부도탑이 있는 금곡사는 경주 도심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편이다. 금곡사에 다다르면 한편에 주차할 공간이 있는데 여기서 주차를 하고 도보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된다. 산길이라 운치도 있고 올라가는 길 옆으로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금곡사지는 외곽에 위치해 있는 골짜기로, 주변에 야생화도 보이며 인적은 드물지만 혼자 걸어가도 외롭지 않다. 흐르는 계곡물소리를 벗 삼아 걸어가는 재미도 있으니 말이다.

*찾아가는 길

주소 :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산 9-1
입장료 및 주차료 : 무료

* 참고문헌
- <삼국유사>(최광식, 박대재 옮김)
- <역주 삼국사기 2>(권덕영외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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