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 은퇴 이후, 내 주변에 피겨 스케이팅을 챙겨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흥미를 잃어갔다. 핑계는 하나같이 "김연아 선수가 내 눈을 너무 높여놨다"는 거였다. 하지만 상황이 그들의 평가 만큼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한국에는 과거와 달리 복수의 피겨 꿈나무가 기특하게도 김연아 선수의 장점을 습득하며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김연아의 벽을 넘으려는 다음 세대 선수의 노력도 계속되었다.

올림픽을 기준으로 볼 때, 김연아 선수가 거의 선두를 이끌던 2010년과 2014년 모두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콤비네이션 점프는 그녀가 구사한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이었다. (물론 4회전 점프로 구분되는 트리플 악셀의 콤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한 아사다 마오 선수가 있긴 했지만, 실전에서의 성공률이 낮다보니 트리플-트리플(3회전-3회전) 연속 점프가 여자 선수가 할 수 있는 최고난도 점프로 여겨졌다. 김연아는 이 3회전 연속 점프의 앞 점프를 트리플 점프 중 가장 기초점이 높은 트리플 럿츠로 수행했다.)

이 점프를 김연아만큼 안정적으로 해내는 선수가 없었기에 새로운 선수가 이를 뛰어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은퇴하던 2014년 이후,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니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러시아의 에브게니아 메드베데바는 시니어 진출 후 높은 기술점수를 바탕으로 김연아가 만든 세계 신기록을 깨뜨렸다.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첫째, 이 선수가 구사하는 가장 어려운 콤비네이션 점프는 김연아의 그것보다 기초점이 살짝 낮은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이었지만, 뛰는 포즈가 달랐다. 점프시 두 팔을 위로 뻗거나 수직이 되게끔 뻗는 타노 점프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점프시 팔을 안으로 모으지 않을 경우 균형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점프에 성공하면 가산점을 얻게 된다.

둘째, 고난도 점프의 갯수를 늘림과 동시에 이를 일부러 경기 뒷 부분에 배치함으로써 추가 점수를 이끌어냈다. 하나의 프리 프로그램 안에서 3회전 연속 점프를 오직 한 번만 뛰었던 이전 세대 선수와 달리 과감하게 두 차례 집어넣고, 둘 중 한 번은 프로그램의 후반부에 배치시킴으로써 더 높은 기초점도 확보했다. 프로그램의 중반 이후에는 통상 체력이 떨어지게 되므로 이 시간에 수행되는 모든 점프에 대해 기초점을 10% 추가했던 당시의 기준을 십분 활용한 전략이었다. 
 
피겨 스케이팅 점프 기초점 목록 피겨 스케이팅 3회전 점프와 4회전 점프의 기초점. 두 바퀴 반을 도는 더블 악셀은 3회전 점프로, 세 바퀴 반을 도는 트리플 악셀은 4회전 점프로 간주된다. ISU(2018), Communication No.2168의 I. Updated Scale of Value의 내용을 편집해 표로 작성.

▲ 피겨 스케이팅 점프 기초점 목록 피겨 스케이팅 3회전 점프와 4회전 점프의 기초점. 두 바퀴 반을 도는 더블 악셀은 3회전 점프로, 세 바퀴 반을 도는 트리플 악셀은 4회전 점프로 간주된다. ISU(2018), Communication No.2168의 I. Updated Scale of Value의 내용을 편집해 표로 작성. ⓒ 김혜민

 
같은 나라의 알리나 자기토바는 여기에 한 술 더 떠 3회전 연속 점프 자체의 기초점을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3회전 연속 점프, 트리플 럿츠-트리플 룹을 해낸 것이다. 여자 싱글 스케이터의 3회전 연속 점프에서 두 번째 점프는 대부분 3회전 점프 중 가장 기초점이 낮은 트리플 토룹이었으나, 이 선수는 첫 번째 점프를 높은 기초점의 트리플 럿츠로 뛰는 것도 모자라 두 번째 점프도 트리플 토룹보다 점수가 높은 트리플 룹으로 성공시켜내며 또 한 번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결국 2018년 올림픽에서는 자기토바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트리플 럿츠-트리플 룹과 함께 타노 점프, 후반부 점프 몰아뛰기 등의 거의 모든 전략을 완수하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나는 김연아의 은퇴 시점에서처럼, 기술로만 봤을 때 다른 선수가 자기토바의 벽을 깨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또 빗나갔다. 2019-2020 시즌인 바로 요즘, 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한계에 마구 도전하는 선수들이 정말이지 쏟아져나오고 있다. 트리플 악셀을 비롯해 남자 싱글 선수도 완벽하게 수행하기 힘든 쿼드러플 살코, 쿼드러플 럿츠 등 4회전 점프를 장착한 선수가 다음 올림픽을 고대하고 있는 게 피겨 여자 싱글계의 현 주소다.

러시아에서만 4회전 점프 및 이에 뒤따르는 연속 점프를 안정적으로 구사하는 여자 싱글 선수가 세 명이나 되다보니, 2018년 평창에서 사이좋게 금과 은을 획득했던 러시아의 자기토바와 메드베데바는 다음 시즌에 얼굴 내밀기도 힘들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의 키히라 리카 또한 단독 트리플 악셀은 물론 트리플 악셀 뒤에 트리플 토룹을 붙이는 콤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러시아 3인방 못지 않은 기량을 뽐내고 있으며, 이번 사대륙 경기에 함께 출전한 와카바 히구치와 카오리 사카모토도 각각 트리플 악셀 및 쿼드 점프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유영은 트리플 악셀 성공률을 높이며 한국 피겨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
 
 4대륙 피겨선수권의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가 열리던 2월8일 오후 목동 종합운동장 실내 아이스링크 관객석

4대륙 피겨선수권의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가 열리던 2월8일 오후 목동 종합운동장 실내 아이스링크 관객석 ⓒ 김혜민

 
그리하여 지난 주 서울특별시 와이키키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ISU 사대륙 피겨 선수권 대회의 여자 싱글 경기에서는 유영과 키히라 리카, 두 명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브래디 테넬도 좋은 성적을 내고있지만, 요즘의 분위기에서 4회전 점프가 없는 프로그램 구성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자 싱글 스케이터의 기술 싸움, 특히 고난도 점프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나 또한 한국의 김예림, 임은수를 비롯해 다른 모든 선수의 프로그램이 궁금했지만, 유영의 트리플 악셀을 눈 앞에서 본다는 기대로 한층 더 상기되었다. 관객석은 마스크를 쓴 채 눈만 빼꼼 내놓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날만을 기다려온 우리에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사대륙 경기 때문에 이 곳에 온 '피겨 관광객' 숫자가 한국인 관람객의 수와 비슷해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선수가 경기를 마칠 때마다 경기장은 더 큰 함성으로, 아이스 링크는 관객석으로부터 날아온 인형과 꽃으로 가득 찼다. 

이틀 전 쇼트 프로그램 순위의 역순으로 매겨진 프리 스케이팅 순서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장은 더욱 더 열기로 달아올랐다. 마지막 그룹의 호명과 함께 상위 6명의 선수가 빙판 위에 차례로 등장하며 웜업을 시작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국의 유영과 임은수가 이 그룹에 당당히 속해있었고 키히라 리카를 포함한 일본 선수 세 명, 미국 피겨의 자존심인 브래디 테넬 등 6명의 탑 스케이터가 각자의 화려한 몸짓으로 빙판을 수놓았다. 개인적으로 직관에서 가장 흥분되는 순간 중 하나가 이 때, 바로 마지막 그룹의 웜업 시간이다. 대부분의 선수가 6분의 짧은 시간에 본인의 주요 점프를 연습한다. 기대한대로 유영은 트리플 악셀을 연습했고, 한 번의 넘어짐에 이은 한 번의 성공으로 내 맘을 뒤흔들어놓았다.

쇼트 3위였던 유영의 차례. 커다란 함성과 함께 등장한 소녀가 혹시라도 안방이라 오히려 더 긴장하진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워낙 당찬 성격으로 잘 알려진 유영은 첫 점프 트리플 악셀과 함께 망설임 없이 날아올랐다. 아주 깔끔하게 착지했고, 관중은 하나된 마음으로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후 고난도 점프인 트리플 럿츠-트리플 토룹 연속 점프가 몰아쳤고, 양 다리를 교차시켜 진입하는 아름다운 트리플 룹 점프를 거쳐 또 한 번의 고난도 점프, 트리플 럿츠-싱글 오일러-트리플 살코가 훌륭하게 수행되었다.

그동안 시니어 여자 싱글 스케이터 중 3회전 연속 점프의 중간에 반바퀴 도는 룹 점프의 일종인 오일러를 끼워넣은 선수는 많지 않았다. 김연아 선수도 이 스타일을 보여준 적이 없기에, 피겨 스케이팅을 잘 모르는 관객은 점프 중간에 실수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영은 트리플 럿츠 후, 도약하는 발을 바꾸기 위해 오일러로 반 바퀴를 돈 뒤 트리플 살코를 이어가는데, 이렇게 중간에 끼워진 오일러도 연속 점프에서는 점프로 인정받아 0.5점을 추가로 챙길 수 있는 요소가 된다. 기술 전쟁과 함께 지금은 이 스타일의 점프를 구사하는 선수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어지는 더블 악셀-트리플 토룹, 그리고 트리플 플립까지, 기초점이 꽤 높은 점프들을 후반부에 차곡차곡 성공시키는 유영의 체력 또한 놀라웠다. 
 

▲ 유영의 트리플 악셀 지난 2월8일 서울특별시 와이키키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20 ISU 4대륙 피겨 선수권대회의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대한민국 선수 유영 선수가 자신의 프리 프로그램인 영화 에비타 OST에 맞춰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뒤 관객석으로부터 환호를 받는 모습 ⓒ 김혜민

 
쇼트 프로그램에서 유영을 누르고 2위를 차지했던 브래디 테넬은 프리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트리플 럿츠-트리플 토룹의 고난도 3회전 연속 점프를 전반과 후반에 각각 한 번씩 구성한 테넬의 프로그램 또한 기술점이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유영의 트리플 악셀을 맨 눈으로 지켜본 나의 마음은 이후 펼쳐질 키히라 리카의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었다. 어쨌든 기술점수보다는 스텝 시퀀스 등의 비점프 요소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아온 브래디 테넬인 만큼 그녀의 연기는 정말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프리에서 선전한 유영은 은메달을, 브래디 테넬은 동메달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4대륙 대회의 디펜딩 챔피언, 일본의 키히라 리카가 등장하자 역시 강한 환호가 터져나오며 관객석이 일장기로 가득 찼다. 지금으로는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터인 그녀의 경기를 본다는 감정에 나 또한 들떴다. 트리플 악셀 단독 점프에, 트리플 악셀-더블 토룹 콤비네이션까지 장착한 그녀의 프로그램 구성점수는, 4회전 점프로 무장한 러시아 3인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다.

초반의 단독 트리플 악셀에서는 한 번 실수가 있었지만 두 번째 시도한 트리플 악셀-더블 토룹 콤비네이션은 오히려 깔끔하게 성공시켰고, 이 밖에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더블 토룹과 같은 과감한 3-3-2 연속 점프와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의 고난도 점프를 프로그램 후반부에서 선보이며 깨알같이 추가 기초점을 챙겼다. 한국에서는 유독 '안티팬'을 많이 거느렸던 일본의 아사다 마오와는 달리, 키히라 리카는 한국 관객도 좋아하는 호감형 스케이터다. 아무래도 그녀의 꾸준함에서 비롯된 탄탄하고 기복 없는 실력이 우리나라 피겨 팬도 감동시키는 것 같다. 결과는 금, 이변은 없었다.

유영의 은메달 또한 김연아 이후 11년 만에 한국 선수가 4대륙 선수권에서 차지한 것이어서 의미가 남달랐다. 시상식에서는 김연아가 선물 시상자로 등장해, 모든 관객 및 포디움에 든 선수들에게까지 기분좋은 '서프라이즈'를 선사했다. 이 날 김연아와 유영의 포옹을 보고 목이 멘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전 피겨스케이팅 관람 때와 전체적으로 눈에 띄게 달라진 분위기가 있다면 음악 선곡이었다. 2014년 이전까지는 피겨 스케이팅 경기에서 쓰는 음악에 가사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이 2014-2015년 시즌부터 이를 허용하면서, 보컬이 들어가는 대중적인 곡을 경기장에서 훨씬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여자 싱글 메달리스트들의 프로그램은 대부분 가사가 없는 클래식이나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었으나, 이제는 경기에서 가사가 없는 곡을 듣기 힘들 정도다. 팝음악의 비율은 이와 함께 훨씬 높아졌다. 키히라 리카는 쇼트 프로그램 음악으로 나윤선이 부른 breakfast in Bagdad를 선곡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유영은 영화 에비타 사운드 트랙에 맞춰 마돈나의 음성과 함께 프리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프리 스케이팅에서 미국의 제니 슈가 롤링 스톤스 원곡의 Paint it black에, 카자흐스탄의 아이자 맘베코바가 강렬한 메탈 비트의 카자흐스탄 전통 곡인 Jumyr-Qylysh에 맞춰 연기를 펼쳐보이는 모습은 아주 인상깊었다. 피겨 스케이팅 경기장에서 귀가 닳게 들어온 클래식 음악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것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개척해나가는 선수들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한편, 네 바퀴 점프를 구사하지 못하면 포디움에 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재의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의 현실에 "피겨 스케이팅의 예술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건 거의 곡예 아니냐"며 개탄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 해 12월에 열린 2019-2020 시즌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결국 러시아의 3인방 알료나 코스토르나야, 안나 셰르바코바, 알렉산드라 트루소바가 차례로 금/은/동메달을 획득했고, 이들의 총점은 이미 200점을 넘어 250을 향해 가고있다. (1위한 알료나 코스토르나야의 점수는 247.59로, 같은 경기에서 남자 싱글 5위를 차지한 중국 진보양의 총점이 코스토르나야보다 낮다.) 하지만 기술성과 예술성이 항상 반비례하는 건 아니다. 김연아 선수도 예술성으로 많은 감동을 줌과 동시에 점프 또한 당시 최고의 기술을 인정받지 않았는가.

방구석 피겨팬은 그저 이들의 끊임없는 진화에 입을 헤벌쭉 벌리며 넋이 나간 채로 박수를 보낼 뿐이다. 3월엔 올림픽 다음으로 큰 대회인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모든 선수가 부상 없이 최고의 기량을 뽐냈으면, 우리의 유영 선수가 이번 4대륙 선수권에서처럼 힘껏 날아올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경기를 보며 감동하고 눈물흘릴 때마다, 팍팍하던 내 인생에 피겨 스케이팅이란 아름다움을 최초로 선사한 김연아 선수에게 어김없이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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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만들기와 글 쓰기를 좋아하는 여행 가이드. 포토그래퍼 남편과 함께 온 세계를 다니며 사진 찍고, 음악 만들고, 글 써서 먹고 사는 게 평생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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