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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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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월 아이의 말은 마음이 앞선다. 아직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딸의 말을 듣다 보면 "응? 뭐라고?" 되물을 때가 많다. 오늘 아침만 해도 "엄마 왜 저기로 오라고 했어?"라는 질문을 엉뚱하게 알아듣고 "응? 뭐라고?"를 반복했다. 그래도 30개월을 같이 산 경험 덕에 금세 이해했다. 답답함이 해소된 아이도 활짝 웃었다.

법관의 말은 논리가 앞선다. 복잡한 전문용어와 법리가 얽혀 있는 재판을 취재하다 보면 '응? 무슨 소리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법관의 말은 명료하다. 수학 공식처럼 원리를 알면 풀어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지난해 10월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1차 공판 전까지는.

아이의 말, 법관의 말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 정준영, 판사 김세종 송영승)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언급하며 이재용 부회장에게 '신경영 방침'을 물었다. 또 삼성 뇌물사건의 재발을 위해선 실효적인 내부 준법감시제도가 필요하며 재벌총수는 재벌체제의 폐해를 시정하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순간 '응? 무슨 소리지?' 하며 귀를 의심했다. 법관의 말인가 싶었다(관련 기사 : 이재용 향한 재판부의 이상한 당부 "만 51세 이건희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계속됐다. 지난 1월 17일 4차 공판에서 정준영 부장판사는 삼성이 최근 만든 준법감시위원회를 언급하며 "양형 심리와 관련해 준법감시제도의 실효적 운영 여부 점검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자신의 당부는 재판진행이나 결과와 무관하다던 첫 공판 때 발언은 공언이 아닌 실언이었을까. 국정농단 특별검사팀은 반발했다(관련 기사 : "이재용 봐주기 명분 쌓기 아니냐" 특검, 재판부 정면 비판).

그러나 재판부는 뜻을 꺾지 않았다. 준법감시제도와 함께 언급한 미국 연방양형기준 8장은 범죄를 저지른 기업을 제대로 감시해 죄를 감면해주는, 즉 삼성이라는 회사의 처벌 수위를 낮춰주는 제도인데도, 이재용이라는 개인의 죗값을 따지는 잣대로 삼겠다고 했다. 또 형사소송법 279조2에 따라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실효성 평가에 전문심리위원 3명을 참여시키기로 했다. 준법감시위는 지난 5일에야 공식 출범했다. 이 재판이 끝나기 전에 잘 자리잡으면 다행일 뿐이다.

여론을 의식했을까. 6일 재판부는 특검과 이 부회장 쪽에 공판준비기일변경명령서를 보냈다. 일단 전문심리위원 선정 등을 논의할 예정이던 2월 14일 공판준비기일을 뒤로 미루겠다는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다만 양쪽 모두 준법감시제도 취지 전반과 이 제도 운영이 양형사유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달라고 했다. 또 '삼성 준법감시위를 전문심리위원 평가를 거쳐 이재용 부회장 양형에 반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특검 주장을 변호인단이 반박하라고 덧붙였다.

3개월만의 변심인가 진심인가
  
준법감시제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재판부인데, 왜 소송 당사자들에게 제도 전반을 설명하라고 할까. 처음부터 재판과 무관하다고 했는데, 왜 양형사유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의견을 달라고 할까. 특검 주장은 당연히 변호인이 방어해야 할 부분인데, 왜 굳이 반박논리를 주문할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액의 회사자금으로 고위공직자에게 뇌물을 준 피고인의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기업의 변화와 재벌체제의 혁신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 성급한 일 아닐까.

법은 인과응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제대로 원인과 결과를 따져야 제대로 처벌과 교화를 할 수 있다. 삼성에 준법감시시스템이 없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굳이 더 보태지 않겠다. 다만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아이보다 마음이 앞선 듯한 재판부의 말을,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글고 왼손에는 법전을 안고 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글고 왼손에는 법전을 안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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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재용, #법원,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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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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