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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협-롯데재단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 심사위원(왼쪽 부터 권희복, 김병기, 김진, 김홍걸, 이종찬, 김삼웅, 박도)들이 '그 마음의 중심에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으라'(允執厥中 윤집궐중)는 백범 유묵을 앞세우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다졌다.
 민화협-롯데재단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 심사위원(왼쪽 부터 권희복, 김병기, 김진, 김홍걸, 이종찬, 김삼웅, 박도)들이 "그 마음의 중심에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으라"(允執厥中 윤집궐중)는 백범 유묵을 앞세우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다졌다.
ⓒ 민화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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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로'를 몰랐던 부끄러움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역에 이르는 6차선 도로명은 '왕산로(旺山路)'다. 나는 이 왕산로를 대학시절 내내 거의 매일 지나다녔다. 그러면서도 그 도로명의 유래를 잘 몰랐다. 간혹 교통방송에서 '왕산로'란 말이 나올 때는 창신동 뒷산이름이 왕산으로 거기서 유래된 줄 알았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1999년 여름방학 때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장군을 알게 되었다. 그분 당숙이 13도 창의군 왕산 허위 군사장으로 내 고향 구미 임은동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러웠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에 있는 일제 통감부를 깨부수고자 진격했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로 일본 헌병들에게 무참히 깨졌다. 그러자 후일을 기약하면서 임진강변에 은둔 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경성감옥(전, 서대문교도소. 현, 독립공원) 신설 후 두 번째로 교수형을 당했다. 일찍이 안중근 의사가 애국의 최고봉으로 여기신,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의병장이시다.

그런데 나는 그 어른의 함자도 모른 채 임은동 길 건너 상모동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만 알고 지냈다. 그런 주제에 '민족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주접을 떨며  글쟁이 행세를 했다. 그런 나 스스로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중국에서 귀국한 뒤 마침 대학시절에 강의를 들은 바 있는 강만길 교수님을 만나 나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그러자 강 교수님은 대한민국 교육 탓이고, 또한 역사학자 탓이라고, 나의 부끄러움을 지워주셨다.

그렇다고 어찌 내 마음 속의 부끄러움이 지워질 수 있으랴. 그때 마침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기에 의미 있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의병전적지를 순례하기로 작정하고, 기왕이면 호남지방을 택했다. 자기 자랑, 자기 조상 자랑, 자기 고향 자랑이나 하면 그게 무슨 바른 서생인가?
  
장학사업 발대식 장면
 장학사업 발대식 장면
ⓒ 민화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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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그리하여 호남지방 고흥반도에서부터 지리산 구석구석을 여섯 차례나 훑었다. 처음에는 외면하던 의병 후손들도 소매를 붙잡고, 내 손에 수저를 쥐여주곤 했다. 그때 많은 의병 후손들을 만났다. 그분들은 대체로 배우지 못했다. 어떤 의병 후손은 배우기는커녕 목숨만 이어온 것만도 다행이었다고 울먹였다(전해산 의병장 후손, 전진규 씨).

또 어떤 후손은 자기 식구는 돼지우리 옆에서 돼지처럼 살았다고 했다. 당신 아버지와 숙부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려면 자식은 낳지 말고, 의병운동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처자식을 두고, 뭔 그런 엄청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조상을 무척 원망했다(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 후손 김복현 씨).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출신 인재를 등용해 쓰려고 해도 고등교육을 받은 이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더라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친일파 출신이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아마도 구차한 변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완서가 쓴 작품 <오만과 몽상>에는 다음의 대목이 나온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이게 작품 속의 이야기만 아니다. 내가 아는 한 독립운동가 후손(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 차리석 아드님 차영조 선생)은 독립유공자후손 규정으로 한전에 취직했으나 학벌이 낮아 내근은 하지 못하고 검침원을 했다는 아픈 얘기를 실토한 적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일제강점기 때 친일을 한 조상 덕으로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의 유수 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된 이들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그들 대다수는 자신의 경력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축적한 부는 자자손손 대물림을 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김홍걸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이 인삿말을 하고 있다.
 김홍걸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이 인삿말을 하고 있다.
ⓒ 민화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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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심사위원장으로 모시다

서론이 길었다. 지난 연초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간곡한 청을 했다. 즉, 민화협과 롯데재단이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바, 심사위원으로 도와달라고 했다. 일찍이 나는 그에게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거나 통일운동을 한 뒤 시인이 되라고 권유한 바 있었다.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길은 나에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의 청을 외면할 수 없어 "알겠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지난달 중순, 2월 6일 11시 민화협 사무실로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날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게다가 때 아닌 '신종 코로나 사태'로 요란했지만 이른 아침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서울로 갔다.

우리는 사제 간이다. 그가 통일운동가로서 민족 화해와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게 그의 꿈이요, 나의 꿈이며, 8천만 겨레의 충심어린 소망이기도 하다.

이 날은 제1차 심사위원회 상견례 및 출범식 날로 이종찬(전 국정원장. 우당장학회 이사장), 김진(백범 장손자),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김병기(광복회 학술원 원장), 원희복(경향신문사 선임기자), 박도(작가) 등 6인의 심사위원과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이시종 민화협 사무차장, 김정호 민화협 특보 등 9인이 모여 조촐한 모임 후 점심을 나눴다.

먼저 심사위원장 선출은 호선으로 연장자인 이종찬 원장을 봉대했다. 이 원장님은 오랜 세월 동안 우당 장학회를 운영해온 경험자로 "실효성이 있고, 민화협 설립 취지에 맞는 타의 모범이 될 수 있는 멋진 장학 사업을 꾸려보자"는 기조 말씀을 하셨다.

아울러 "이 장학사업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말고 연속성이 있고, 나라의 인재를 육성하는 훌륭한 장학사업이 되도록 열과 성을 다하자"고 심사위원과 실무 관계자들을 다독였다.

이번 민화협-롯데재단 장학사업은 국내 장학금 지급 중 가장 고액인 1인당 600만 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아마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국내‧외 대학교에 다니는 재학생 30명이 이 장학금 혜택을 받을 것이다.

또한 독립유공자 범위를 확대해, 국내 거주뿐 아니라 재일조선인, 재러고려인, 재중 조선족, 그리고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증‧고손 포함) 에게도 혜택이 가도록 범위를 대폭 확대할 예정이다.

재물도, 아픔도 서로 나눠 가질 때 민족 화해도, 평화도, 통일도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자세한 모집 공고를 보실 분은 웹사이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회의’에 들어오시거나 민화협 정책홍보팀(02-761-9329)우로 문의하십시오.


태그:#민화협 - 롯데재단, #김홍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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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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