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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미스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미스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 단유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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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박사모)은 한때 친박세력 혹은 극우세력의 대명사였다. '박사모 현상'이라 할 만한 센세이션도 일으켰다. 박정희나 1970년대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이들의 집회에 참석해 박정희와 박근혜를 연호했다.

박사모 회원들의 일상을 추적한 2017년 다큐멘터리 <미스 프레지던트>는 아침마다 선비 복장을 하고 의관을 정제하는 조육형 농민을 보여준다. 그는 그런 차림으로 박정희·육영수 영정에 절한 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한다. 그런 다음에야 부모님 영정에 절을 올린다. 청주에 사는 그는 박사모 집회에 참석하고자 자비를 들여 서울역까지 부지런히 행차한다.

울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종효 사장 부부는 식당 벽면을 박정희 부부 사진으로 도배해 놓았다. 이 부부는 "친일을 했다, 사람을 많이 죽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귀에 안 들어와"라며 이런 가치관이 싫으면 식사하러 안 오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매상이 감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식당 손님들한테 자기들의 가치관을 꼭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우에 가까운 일부 한국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다큐 영화 소재로까지 등장했던 박사모다. 그런 박사모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2016년과 2017년 탄핵정국 때만 해도 눈에 자주 띄었던 박사모가 어느 순간 희미한 존재가 되어 있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은 다음카페가 왕성했던 2004년 3월 생겼다. 2선 국회의원인 박근혜가 한나라당 지도자로 부각되던 때였다. 2002년 대선 당시 선거자금을 트럭째 불법 수수한 '차떼기 사건'으로 한나라당이 국민적 지탄을 받는 데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2004년 3월 12일 국회 탄핵소추로 한나라당이 역풍을 받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3월 23일 한나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박근혜가 51.8% 득표로 새 대표로 선출됐다.

당시 한나라당 출입기자였던 천영식 문화일보 기자가 <박근혜,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에서 "박근혜는 차떼기로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의 유일한 구원투수였다"고 한 것처럼, 이 시기 박근혜는 좀 과장되게 말하면 보수세력의 구세주였다. 그 구세주가 한나라당 신임 대표가 된 지 일주일 뒤인 3월 30일, 정광용이라는 전직 CF 감독 겸 광고회사 사장에 의해 박사모가 생겨났다. 박근혜의 지도자 부각과 거의 정확히 때를 같이해 출현했던 것이다.

노무현 팬클럽으로 출발한 노사모의 정식 명칭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노사모에서 '노무현'뿐 아니라 '사람들'도 함께 강조된 것과 달리,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에서는 박근혜만 강조되고 있다. 가벼이 볼 수도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차이다.

처음부터 정치 결사체 지향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2012년 12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박사모' 회원들이 모여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2012년 12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박사모" 회원들이 모여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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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두 팬클럽의 차이는 많다. 초창기 모습도 확연히 달랐다. 노사모는 팬클럽으로 시작해 정치 결사체로 변모해간 데 반해, 박사모는 외형상으로는 팬클럽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처음부터 정치 결사체를 지향했다. 박사모 카페의 게시글들을 분석한 조국현 한국외대 교수의 2011년 논문 '정치인 팬 커뮤니티 분석-박사모를 중심으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박사모는 처음부터 결사체적 팬 커뮤니티로 출발했다. '대한민국 박사모 회칙'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여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실현과 시장경제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포괄적인 정치적 목표와 더불어 (중략) 구체적인 활동 방향을 제시한다."  - 한국텍스트언어학회, <텍스트 언어학> 제31권
 
처음부터 정치 결사체를 지향한 박사모는 박근혜의 정치적 기운 상승과 보조를 맞추며 회원 수를 늘려갔다. 박근혜한테는 영부인 대행을 한 1974~1979년과 한나라당 지도자와 대통령으로 생활한 2004~2016년이 정치적 절정기였다. 박근혜의 절정기가 재개된 2004년에 등장한 박사모는 <미스 프레지던트> 등장인물과 비슷한 사람들을 회원으로 흡수하며 국내 최대의 정치인 팬클럽으로 급성장했다.

이 단체의 절정기는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 대선 때였다. 2016년 11월 8일자 <매일경제> 기사 '최순실 정국 속 박사모 회원 수 2012년 수준으로 증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2012년 당시 박사모 회원은 7만 명 이상이었다. 물론 그 전부가 다 진성 회원은 아니지만, 이 숫자는 이들의 영향력을 반영할 만했다. 전년도인 2011년 4월 2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박사모 7주년 창립기념 대회장에 한나라당 전·현직 최고위원들을 포함해 6000명 정도가 참석했다. 그들의 세를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전국 주요 시·도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지부를 뒀다. 해외 지부도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일례로 미주본부는 대선 5개월 전인 2012년 7월 중앙선관위의 경고를 받았을 정도로 열심히 '불법선거운동'을 했다. 국내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박사모 해외 지부가 열성을 보였던 것이다.

미주본부장 션리(Sean Lee)는 그해 대선 3주 전인 11월 27일, 박근혜 당선 축하 행사 초대장을 돌렸다. 로스앤젤레스 한식당을 예약까지 해두고 초대장을 발송했다. 이 때문에 12월 6일자 <한겨레>에 '박사모 벌써 김칫국··· 박근혜 대통령 당선 축하 초대장 발송'이란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박사모의 과도하지만 적극적인 열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런 세를 발판으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 2012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및 대선 운동에서 박근혜 유세장에 군중을 모으고 열렬한 환호를 표시했다. 이들은 박근혜가 출마하지 않은 선거들에도 지나친 적극성을 보이는 바람에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으로 카페 활동이 위축된 뒤에도 그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일례로 20대 총선 직전인 2016년 2월 13일에는 박사모 구미지부·김천지부 및 박사모 동우회가 새누리당 예비후보 백승주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백승주는 이때 당선됐다.

맹목적 애정
   
 박사모, 탄기국 등  박근혜 지지자들이 모여 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새누리당 중앙당창당대회를 열고 있다. 왼쪽부터 새누리당 권영해, 정광택 공동대표, 정광용 사무총장, 조원진 사무총장, 박근혜 전 대통령 전 변호인 서석구 변호사.
 2017년 4월 5일 박사모, 탄기국 등 박근혜 지지자들이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모여 새누리당 중앙당창당대회를 열고 있다. 왼쪽부터 새누리당 권영해, 정광택 공동대표, 정광용 사무총장, 조원진 사무총장, 박근혜 전 대통령 전 변호인 서석구 변호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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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우경화됐다.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유연해진 가운데 국정교과서 사태에서 드러나듯 우경화 경향이 힘을 얻었다. 일반 국민들의 분위기와 관계없이 정권 차원에서 조장된 경향이기는 하지만, 이런 속에서 박사모 회원들은 자유롭게 말하고 외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극우 목소리를 쏟아낼 뿐 아니라 박근혜에 대한 맹목적 애정을 함께 드러냈다. 박근혜를 위해서라면, 같은 편일지라도 가차 없이 공격했다. 2008년 총선 때 친이명박계인 이재오를 포함한 5명을 상대로 '5적 낙선운동'을 벌여 4명을 낙선시킨 일은 유명하다.

이때 그들은 '5적' 일원인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경남 사천에서 당선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차라리 강기갑 민주노동당 후보가 낫다'는 내용의 기자회견까지 했다. 이때 당선자는 강기갑이었다.

이렇게 맹목적인 열성을 보이던 박사모는 2016년 연말의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거리로 광장으로 뛰어나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그들은 태극기 집회 초반에 주도적 세력으로 부상했다. 카페지기 정광용이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대변인이 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었다.

그들은 '박근혜 무죄'를 외치며 새누리당 재건에도 나섰다. 자유한국당 출범으로 새누리당이 없어지자, 박근혜의 흔적이 묻은 그 당명을 되살리고자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당을 재건한 것이다. 정광용은 재건된 새누리당에서 사무총장이 됐다.

박사모는 2012년 박근혜 당선 때도 절정기를 맞았지만, 2016년 촛불정국 때도 비슷한 절정기를 맞이했다. 이전보다는 줄어들었지만 박근혜를 연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가장 인상적인 극우세력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얼마 뒤, 박사모는 언론 지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조직이 그 자리를 점유한 것이다. 서울역 친박집회나 서울구치소 앞 친박집회는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조원진으로 대표되는 우리공화당(대한애국당의 후신)이 2017년 이후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정광용의 절대적 영향력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정광용 회장이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정 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안국역 인근 집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 등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2017년 4월 12일 박사모 정광용 회장이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안국역 인근 집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 등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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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5일 현재 8만 1178명이라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박사모는 더 이상 예전의 박사모가 아니다. 81178이라는 숫자는 더 이상 이들의 영향력을 반영하지 못한다.

2017년 초반까지만 해도 왕성했던 박사모가 이렇게 유명무실하고 형해화된 것은 정신적 구심점인 박근혜가 구속되고 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가 진보를 지향하게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근혜가 구속되고 보수가 위축되는 속에서도 토요일마다 서울역에서는 여전히 친박집회가 왕성하게 열린다. 박사모가 위축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2016년 촛불혁명은 극우세력한테도 기회였다. 한국 사회가 진보로 기울자, 위기감을 느낀 보수가 극우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중도 성향의 보수한테는 불리해도, 극우한테는 꼭 그렇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박사모가 오히려 위축됐던 것이다.

촛불혁명 직전까지 극우세력 중에서 비교적 잘 준비된 곳은 박사모였다. 그런데도 박사모는 촛불 정국 몇 개월 만에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된 원인 중 가장 중요한 2가지는 그들의 조직 구조와 대선 정국 때의 패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군중이 집회에 참석하고 지부들의 모임도 왕성했지만, 실제로 박사모는 카페지기 1인의 절대적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다음카페를 통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카페지기 정광용 1인을 중심으로 중요 결정들이 이뤄졌다.

2011년 창립 기념대회에서 정광용의 대회사 첫마디는 "2004년 3월 30일 밤, 정광용이라는 네티즌 한 사람이 포털사이트 다음에 1인 카페를 개설한 것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정치인 팬클럽인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대한민국 박사모의 태동이었습니다"였다. 다소 감상적이고 자화자찬 같은 언급이 대회사 첫머리에 나올 수 있었던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박사모는 정광용 1인의 절대적 영향력 속에 운영됐다. 박근혜를 구심점으로 하는 조직이면서도 실상은 정광용을 중심으로 작동됐던 것이다.

이로 인해 2017년에 정광용이 폭력집회 혐의로 구속되자, 박사모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이 알고 있던 외양과 달리 박사모의 내실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던 것이다. 충무체육관에 6000명을 모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면서도, 카페지기가 없으면 운영되기 힘들 정도로 내적 원동력이 취약했던 것이다.

박사모에서 레지스탕스로
 
 박사모 카페 갈무리
 박사모 카페 갈무리
ⓒ 박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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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정광용은 이듬해 5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하지만 3개월 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지금은 다시 활동하고 있지만, 2017년 이후로 박사모는 재기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1인 카페를 그 정도까지 키운 능력은 대단하지만, 1인이 없으면 조직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들의 한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과도한 1인 체제에 더해 2017년 대선 때의 노선 혼란도 박사모 약화의 계기가 됐다. 새누리당이 재건된 뒤의 노선 혼란이 박사모를 흔드는 원인이 됐다.

2017년 4월 5일자 <중앙일보> '박사모 등 친박단체 새누리당 창당 ···독자 후보 내겠다'에 보도된 것처럼, 새누리당 재건 당시 정광용은 조원진 의원,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 등과 더불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용의를 피력했다. 그 뒤 그는 후보가 된 조원진에게 반기를 들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지지했다.

이것은 박사모 회원들의 정서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박사모 회원들은 당선 가능성을 떠나 '극우이념과 박근혜'를 가장 잘 대변할 후보를 선호했다. 당락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대변해줄 후보를 원했던 것이다. 정광용의 홍준표 지지는 이런 분위기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는 많은 박사모 회원들이 정광용한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보수세력 내에서 극우의 입지가 강해지던 때였다. 대선 득표율과 관계없이 그런 현상이 강해지던 때에, 박사모 지도자 정광용의 노선 이탈은 박사모를 위축시키는 원인이 됐다. 지금도 여전히 박근혜 석방을 외치는 목소리가 작지 않고 친박집회도 계속 열리고 있지만, 박사모가 우리 귓전에서 멀어진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2018년 5월 석방 뒤 정광용은 조직 명칭을 박사모에서 레지스탕스로 변경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의 카페에는 박사모와 레지스탕스라는 두 개의 명칭이 병기돼 있다. 그들은 조직 명칭을 '박사모(레지스탕스)'로 표기하기도 한다.

정광용과 박사모는 한때 큰 성과를 본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체가 향후 재기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박사모의 초기 성장을 가능케 했던 '박근혜의 정치적 기운 상승'이라는 요인이 사라진 데다가, 과도한 1인 체제와 2017년의 정치노선 이탈로 극우 지지자들의 신망을 잃어버린 박사모가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활로를 모색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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