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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0일부터 시작한 100일간의 '당신이 옳다 프로젝트'(이하 '당옳 플백')는 12월 28일 끝났다. 나에게는 '당옳 플백'이 생소했지만 플백 벗들은 책 <당신이 옳다> 워크숍과 속마음을 주고받은 공감콘서트 등을 통해 많이 친숙한 것 같았다.  

'당옳 플백'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당옳 플백'에는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실천하는 공감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않으면서 삶이 극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나'와 '너'에게 공감하는 삶을 살면서 변화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전율이 일었다. 그들은 삶의 스승이었다.

공감은 감정노동인 줄 알았다. 노력해야하고 이타적인 줄 알았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으로도 힘든데, 나한테 집중하기도 힘든 데 무슨 공감까지? 했다. 그런데 공감은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히 요구했고 개별적 존재임을 인정하라고 했다.

무너지면 풀썩 주저앉게 된다. 근데 그것이 삶이란다. 조금 잘 되다가도 다시 떨어지고 그렇게 뭉개다가도 다시 나아가고. 지옥이 일상이고 일상이 지옥이라는 걸 순하게 받아들이면서 죽는 날까지 수백, 수천, 수만 번 무너지는 게 삶이란다. 깨달음을 얻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짜라고 했다. '한빛 엄마이기에' 한빛 때문에 우는 것도 당연한 거고 한빛 때문에 살 의지를 갖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당옳'로 나를 인정하니 큰 위로가 되었다.

또 하나의 위로는 플백 벗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아들 한빛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정혜신 선생님과 플백 벗들은 플백 기부금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위해 쓰자고 했다. 뜻밖이었다. 모두들 이 커다란 계획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지속가능한 센터를 위해 응원했다. 이럴 때 기적이라는 말을 하나? 세상은 살아갈 가치와 이유가 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정혜신 선생님이 지난 12월에 한빛센터 월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시고 100만 원을 기부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울컥했다. 이 세상에 없는 한빛 때문에 인연이 되었음에도 한빛한테 정혜신 선생님에 대해 항상 그랬듯 조잘조잘 얘기하고 싶었다. 한빛이 너무 그리웠다.

지난 1월 4일 2시.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당옳 플백' 쫑파티를 한다는 공지가 떴다. 전국에 있는 플백 벗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광주 세종 부산 대전 등에서 ktx, srt를 예약하고 플백방은 온통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축제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쫑파티 날 서로들 옛 동창을 만난 듯 포옹하며 인사했다. 100일 동안 자신의 속 깊은 상처들을 이야기하고 마음을 포개서인지 어색하지 않았다. 혜신 선생님이 마을방앗간에서 갓 뽑아 온 따뜻한 가래떡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시부터 시작한 쫑파티는 8시가 지나서 끝났다. 그 긴 시간 진행을 혜신 선생님이 혼자 했다. 국회의 필리버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써클식으로 '당옳 플백' 소감도 공유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공감자고 치유자면 좋겠다', '새로운 출발,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이웃들과 당옳하자'고 했다. 모두들 '지금 어떠세요?' 마음을 물었고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는 온 체중을 다 싣는 공감자가 되었다.

'당옳 플백' 벗들에게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대신해 감사 인사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한빛얘기로 옮겨갔다. 많은 질문이 나왔다. 모두들 한빛이 어떤 아들이었는지 궁금해 했다. 애인이 있었냐고까지 물었다. 그 순간 나는 현실감각을 잃었던 것 같다.

3년 동안 가슴속에만 묻고 있었던 한빛에게 막 뛰어갔다. 그리고 한빛을 만났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27살까지의 한빛이가 거기 있었다. 신나서 한빛을 이야기했다. 다 생생했다. 어린 한빛에게 감동했던 기억들이 막 떠올랐다. 커서는 한빛을 존중했으니 말할 것이 더 많았다. 나는 어느새 자랑만 늘어놓고 있었다. 아니 막 자랑질을 했다. 한빛이가 옆에서 "엄마, 그만"하고 말릴 것 같아 하나라도 더 말하려고 쉬지 않고 한빛을 자랑했다.

그동안 나는 한빛얘기를 안했다. 아니 못했고 겁났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받은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혼자 삭혔다. 한빛 아빠는 더 힘들어 하면서도 한빛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자신이 속한 많은 카톡방에 한빛 관련 소식을 올렸다. '다시는' 한빛같은 젊음의 희생이 없는 사회를 위해 한 명이라도 한빛을 알게 하고 지속적인 한빛센터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상처뿐이었다. 한빛 아빠 핸드폰에서 "그만 하셨으면 해요. 여기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단체방 분위기를 묘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친한 분한테만 보냈으면 합니다", "자꾸 올리니까 다들 이 방에서 나간다" 등등을 보았다. 한빛 아빠가 받았을 상처와 슬픔에 내 마음을 포개보지만 힘들었다. 그렇게 살았다.

플백 벗들은 이 시간을 큰 선물이라고 고맙다고 했다. '한빛군이 이어줄 인연에 대해 기대하고 싶다.' '한빛 자랑하실 때 혜영님 얼굴, 정말 아름답고 환했다.' '듣는 저도 환해졌다.' '한빛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맙다.' '포근했다.' '이야기할 때 햇살을 느꼈는데 한빛군이 함께 했던 것 같다.'

세종시의 B님도 '한빛군은 참 아름답고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사회의 아픔에 눈뜨게 되었고 부모로서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들은 것 같다. 아름다운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라고 마음을 포개주었다.

또 벗들은 나를 위해 귀한 선물들을 준비해왔다. 정성스런 손편지, 뜨개질한 노란 목도리, 한빛을 그린 머그컵, 한빛과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달고 다니라고 자기 가방에서 선뜻 떼어 내 가방에 달아준 예쁜 여우, 눈밭에서 신어도 될 겨울 양말 등. 첫 만남인데 받아도 되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기적은 또 있었다. '당옳 플백' 벗들은 '당옳 플백'에서 나온 기부금뿐만 아니라 이후 50여분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월 후원회원으로 가입해 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날 이후 급격히 탈진이 되더니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1월 한 달을 심하게 앓았다. 병원 순례를 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아팠다. 그래. 이 아픔도 당연한 거다. 한빛을 만났으니 기뻤고 그만큼 힘들었겠지. 내가 그동안 너무 용기가 없었다. 한빛은 아름다운 청년이었고 자랑스런 아들이었는데. 한빛아 그동안 미안했어. 앞으로는 너 자랑질 많이 할 거야.

한빛아, 엄마는 이 모든 게 기적 같아.

덧붙이는 글 | 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해냄(2018)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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