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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리원자력발전소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발전소이다. 중수형 원자로를 설치한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 신라 제4대 탈해왕의 탄생 설화가 스며있는 곳이 있다.

석탈해왕 탄강유허비가 없었더라면 그냥 멀리서 발전소 겉모습만 보면서 그냥 지나쳐야 한다. 탄강유허비 덕분에 최근접 거리에서 월성원자력발전소를 구경할 수 있다. 월성원자력발전소 정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에 주차장이 보인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주차장 한편에 고풍스러운 비각이 한 채 세워져 있다. 여기가 바로 석탈해왕 탄강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있는 석탈해왕 탄강유허 모습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있는 석탈해왕 탄강유허 모습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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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왕 탄생 설화

왜국에서 동북으로 400여 km 떨어진 용성국 왕비가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7년 뒤에 큰 알을 하나 낳았다. 이는 상스럽지 못한 일이라 하여 왕이 궤 속에 알과 칠보(七寶)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왕은 궤를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고 한다. 궤를 실은 배를 붉은 용이 나타나 호위하며, 그 궤가 신라 땅에 와닿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이를 발견한다.

<삼국유사> 기이편 기록에 의하면 신라 동하서지촌 아진포라 기록되어 있는 곳에 아진의선이란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는 매일 멀리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살았는데, 하루는 한 척의 배 위에 수많은 까치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다. 노파는 이상한 배가 포구 앞바다에 있는 것을 보고 배 위로 올라가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배 위를 살피던 중 갑판 위에 놓여있는 큰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궁금하여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알에서 깨어난 남자아이와 종들이 있었고, 수많은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다. 이 사내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한다.

노파가 발견하여 데려올 때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다. 그래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고 전해진다. 탈해는 62세 때 왕위에 올랐다. 탈해라는 이름은 상자를 열 때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한다.

유허에는 비각과 비석이 있는데 조선 헌종 11년(1845) 이종상이 비문을 지었으며, 상량문은 1845년 한문건이 썼고, 비각기는 조선 헌종 13년(1847) 이시우가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 아진포'가 궤가 닿은 바닷가이다. 지금의 유허비가 세워진 곳이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석탈해왕 탄강유허)
주차료 및 입장료 : 없음

 
탈해가 호공의 집을 모략을 써 빼앗았다는 경주 반월성 모습
 탈해가 호공의 집을 모략을 써 빼앗았다는 경주 반월성 모습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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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 거주할 집을 마련하다

신라 땅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는 거주할 집을 찾기 위해 토함산에 오른다. 토함산에 올라 7일 동안 서라벌을 관찰하다 초승달 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한다. 풍수지리적으로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난감해 하며 고민을 하던 탈해는 모략을 써 타짜 같은 지혜를 발휘한다.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이 집이 원래 자기 조상의 집터라고 주장한다. 탈해의 강력한 주장에 황당해하던 호공은 이를 관청에 신고한다. 그러나 이게 패착이었다.

신고를 받은 관리가 직접 현장에 와서 "무슨 근거로 너희 집이라고 우기느냐?"라고 물었다. 탈해는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에게 "이 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던 곳으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으니, 집 주변을 파 보면 그 증거물이 분명히 나올 것이오"라고 허위 진술하여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탈해가 자기 집터라고 우겨 뺏는 집터가 바로 지금의 경주 반월성이다.

요즘 같으면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골목마다 주차한 차량들의 블랙박스가 있어 이런 모략을 사용할 수가 없다. 금방 들통나 사기죄로 교도소로 직행해야 할 탈해였다. 그러나 이런 탈해의 행동을 지켜보던 신라 제2대 남해왕이 탈해의 지혜로움을 높이 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 남자가 바로 탈해이다.
 
경주 북쪽 소금강산 아래에 있는 경주 탈해왕릉 모습
 경주 북쪽 소금강산 아래에 있는 경주 탈해왕릉 모습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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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

신라왕은 박, 석, 김 세 성씨이다. 그중 석씨 왕 가운데 최초가 제4대 탈해왕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탈해왕릉은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이다.

신라에서 석씨 성을 가진 여덟 왕 중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은 '탈해왕릉' 뿐이다. 왕릉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아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삼국사기에는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이 현재의 탈해왕릉 위치와 부합된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죽은 후 탈해에게 먼저 임금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임금이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신라 제4대 임금으로 탈해왕이 즉위하였다.
 
경주  탈해왕릉 동편에 있는 숭신전
 경주 탈해왕릉 동편에 있는 숭신전
ⓒ 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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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 동편에는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숭신전이 있다. 숭신전은 경주 반월성에 있던 민가를 철거하면서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서북쪽에는 경주 표암이 위치해 있다. 경주 표암은 신라 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탈해왕릉은 8년 전만 하더라도 경주 시민들의 화장터가 있었던 소금강산 아래 위치해 있었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주차장과 현대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왕릉의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산책로가 만들어지자, 요즘은 힐링 숲으로 널리 알려져 주민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부쩍 잦아진 곳이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윗동천안길 93
입장료 및 주차료 : 무료

* 참고문헌
- <삼국유사>(최광식, 박대재 옮김)
- <역주 삼국사기 2>(권덕영외 4인) 

태그:#경주 석탈해왕 탄강유허, #경주 탈해왕릉, #경주 숭신전, #경주 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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