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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별세계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신이 옳다' 프로젝트 100일(이하 '당옳 플백')도 그 중의 하나였다. 100일 동안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속 깊은 상처들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타인의 상처를 마주하며 피드백을 통해 마음을 포개주고 안아주는 벗들이 있는 공간. 나로서는 별세계였다.

책 <당신이 옳다>를 한 번 읽었기에 '당옳 플백'이 낯설지는 않았다. 당시 아무 거라도 붙잡고 싶었다. 잘 사는 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최소한이라도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곰과 호랑이도 사람이 되기 위해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었다. 쑥과 마늘 대신 10만원의 참가비를 내면서 매일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난 절실했다.

그러나 금방 혼란스러웠다. 지금 나에게 한빛의 부재 이상의 절실함이 있을까?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공감? 그런 건 지금 나에게 사치 아닌가? 그렇게 100일을 해서 뭘 어쩌자고? 성실하게 100일을 하고 나면 한빛이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면 나, 다 잘 할 수 있는데. 결국 이것도 한빛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것이네.

나는 98% 인증으로 마무리했고 103명 중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이틀 결석해 기부될 2천 원에 집착하는 나를 보았다. 한심했다. "아마 100일이 지나고 나면 자신의 변화에 놀라 전액을 다 기부하게 될 걸요?"하던 정혜신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나는 속으로 절대 아니라고 했다. 10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그리고 개근한다는 것은 성실히 노력한 결과인데 당연히 돌려받으리라 했다.

한빛 아빠와 처음 정혜신 선생님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예전에 정혜신 선생님이 쓰신 책과 <한겨레> 칼럼을 많이 읽었다. 한빛을 보내고 나서도 세 권인가 읽으며(죽음이라는 이별앞에서/사람공부/당신이 옳다) 위로를 받기도 했다.

정혜신 선생님이 지난 15년간 '거리의 치유자'로 살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혜신 선생님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만든 재단 '진실의 힘'에서 집단 상담을 이끌었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심리치료공간 '와락'을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안산으로 이주해 '치유공간 이웃'을 만들고 참사 피해자들의 치유에 힘썼다. 또한 서울시와 함께하는 힐링프로젝트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를 통해 시민들에게 공감의 힘을 전파하고 있다.

이렇게 바쁘니 정혜신 선생님이 한빛 아빠의 상담요청을 받아주리라고는 기대 안했다. 우리 사회에는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 개인적인 사정까지 다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락을 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안국동에 있는 군더더기 하나 없던 정갈한 작은 방에서 정혜신 선생님을 만났다. 한 번 보고 무슨 답을 얻으랴? 정혜신 선생님도 예의상 우리가 가엾으니까 한 번은 만나주는 거겠지. 절대 서운해하지도 말고 기대도 하지말자 하고 나를 다독였다. 이것도 과분하지 하면서.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조급해졌다. 그동안 상담을 받아본 경험상 주어진 시간은 50분인데 이 짧은 시간에 한빛 얘기를 먼저 해야 하나? 우리가 살아갈 날에 대해 말해야 하나? 횡설수설하다 시간만 보내면 안 되는데, 가느다란 끈이라도 잡고 싶은 간절한 욕심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혜신 선생님은 이후 시간을 다 비워놓으셨고 하염없이 얘기하는 한빛 아빠를 다 수용하고 있었다.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여기에도 상담 규칙이 있고 최소한 기본 예의는 차려야 하는데. 그동안 상담이란 것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한빛아빠는 처음 붙잡은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시간관념 없이 계속 토해내고 있었다.

혜신 선생님은 다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마무리하시면서 다음 주 어느 요일 볼까요? 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만났다. 정답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지만 불안감이 조금씩 옅어짐을 느꼈다. 한빛 아빠가 그렇게 말이 많은 지도 처음 알았다. 그동안 이런 공간을 가져보지 못했기에 더 그럴 것이다.

한빛 아빠가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끄집어 낼 수 있게 나는 꾹꾹 눌렀다. 한빛 아빠의 한빛에 대한 그리움이 어떠할지는 짐작했지만 들으면서 나도 많이 울었다. 한빛도 울고 있는 아빠를 보겠지. 나처럼 한빛도 아빠가 가여워 많이 울겠지. 한빛은 여리고 착하니까.

혜신 선생님의 '당옳' 강연 횟수가 1년간 180회임을 플백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전국 강연을 다니시는 빡빡한 일정을 살고 계셨다. 한빛아빠는 상담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자고 했다. 이만큼도 감사했다. 다행히도 나는 '당옳 플백'을 통해 혜신 선생님과의 끈은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솔직히 상담료도 많이 걱정되었다. 지난 3년동안 나는 이곳저곳 상담실을 두드렸다. 1회당 50분이고 10회 이상이 기본이었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기서 안 되면 저기로 상담실을 순례했다. 어느 날 카드 명세서가 나왔는데 상담료가 월급의 2/3였다. 상담실 가기가 겁났고 내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 마음이 힘든 사람들은 다 어떻게 사나? 나는 그래도 월급을 쏟아부으면 되지만(상담료를 무시하는 게 절대 아니다) 경제적인 곤란까지 겹치면 얼마나 더 힘들까? 가슴이 아팠다.

이 상황을 겪어봤기에 정혜신 선생님께 드릴 상담료가 어느 선인지? 감당 못할 정도면 어떡하지? 겁도 났다. 선생님은 상담료 얘기하려면 다음 상담은 안 잡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무슨 무료봉사활동도 아니고 더구나 시간도 이렇게 많이 내서 하는데. 아니지. 나는 다행히도 경제적 능력이 있고 우리도 염치없는 사람도 아니니까.

우리가 더 부담스럽다고 했다. 혹시 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그곳에 후원금으로 대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정말 진심이실까 헷갈렸다. 혹시 나중에 더 큰 무엇을 요구하시려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했다.

그러나 이 헷갈림도 곧 무너졌다. 우리의 요청으로 상담 후 식사하기로 했다. 메밀면을 좋아하신다는데 마침 단골집이 휴일이었다. 어디로 가지? 하며 인사동으로 나왔는데 "잠깐만 여기 계셔요" 하시더니 막 뛰셨다. 왜 그러시지? 하며 우리는 어리버리하게 인사동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골목길 끝에서 선생님께서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가보니 그 식당도 문을 닫았을까봐 미리 살피러 가신 것이었다. 우리는 대접받아야 하는 대단한 손님이었고 혜신샘은 이리 저리 식당을 알아보는 어린 사람이 되었다. 역할이,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한빛아빠와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처음 만난 S교사가 마음을 포개며 준 책 <당신이 옳다>는 나에게 '당옳 플백'과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혜신샘은 주저앉아 있는 손을 잡아주고 온 체중을 실어 공감해주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혜신샘은 '당옳 플백'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연결시켜주는 커다란 계획을 한빛에게 선물로 주셨다. 

덧붙이는 글 | 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해냄(2018)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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