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포토뉴스

성 프란치스코 성당 아시시의 맨 꼭대기, 로카 마조레에서 내려다 본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모습.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모셔진 곳으로, 그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조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 서부원
 
로마를 떠나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중부의 작은 도시 아시시였다. '맨 발의 성자'로 알려진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고 수많은 기적을 행한 가톨릭의 성지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이탈리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로부터 이탈리아에서 어디를 가장 가보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아시시라고 답했다. 이번에 이탈리아를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고, 발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도시라는 찬사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녀온 사람들은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부러 사흘을 머무르기로 했다. 아무리 도시가 작아도 성인의 발자취를 차분히 더듬어보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아시시는 800여 년 전 성 프란치스코가 살던 그때의 모습과 거의 달라진 게 없다.

마음은 이미 그곳에 닿아 있었지만,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간다는 곳에 쾌속열차나 직통 버스를 타고 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부러 가장 저렴하고 느린 완행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나마 중간에 폴리뇨라는 작은 도시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해서 내내 깨어있어야만 했다.

속도가 느린 만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눈에 오래 머물렀다. 성인이 선행을 베풀고 기적을 행하며 맨 발로 오갔을 길이다. 예상 외로 기차의 객실이 텅 비어 있어 묵상하는 마음으로 세 시간을 보냈다. 순례를 위해서라면, 감히 아시시로 가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 추천한다.

성인의 모습을 닮은 기차역
 
아시시의 거리 풍경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아시시는 중세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골목길 뒤로 저 멀리 아시시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군사시설인 '로카 마조레'가 보인다. 가장 큰 요새라는 뜻이다. ⓒ 서부원
 
아시시 기차역은 가난한 성인의 모습을 닮았다. 우리나라의 시골 간이역보다 작은 규모다. 간판을 세울 공간 자체가 부족했던지 건물 바깥에 역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다. 기찻길과 승강장이 있고, 손님을 태우려는 택시들이 늘어서 있어 이곳이 기차역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상시 근무하는 역무원도 없고, 급한 용무가 있다면 역에 딸린 매점 주인에게 물어야 한다. 대합실과 승강장에 기차표 자동 발매기가 설치돼 있어, 역무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그만큼 기차 편을 이용해 아시시를 찾는 관광객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기차역에서 보면, 저 멀리 아시시는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세의 성곽 도시가 대개 그렇듯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산 중턱에 요새처럼 마을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현재 아시시의 중심은 기차역 부근이지만,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아시시는 저 언덕 구름 위에 있다.

산 중턱에 매달려 있는 까닭에 길이 가로 방향으로 길게 나 있다. 양 옆으로 1.5km, 위아래로 0.5km 남짓에 불과한 규모로, 가파른 계단 길을 감안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조차도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걸었던 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아시시는 과연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다. 곳곳에 세워진 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집도, 길도, 분수도, 한 그루의 나무까지도 어느 것 하나 성인과 관련되지 않은 게 없다. 성인의 생애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온다면 그만큼 아시시는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거리를 거닐 수 있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뒤 영적 깨달음을 얻고 수행 정진한 동굴을 가볼 수 있다. 세속의 욕망을 끊어내기 위해 몸부림친 인간적인 고뇌를 엿볼 수 있는 곳도 있으며, 그의 무덤 앞에서 기도를 바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탁발승으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감화돼 기꺼이 제자가 된 이들의 성스러운 삶의 자취도 함께 남아있다. 그의 삶은 극도의 청빈과 구도를 실천하는 '작은 형제회'와, 성녀 키아라(영문명 클라라)의 수녀회로 이어졌다. 성인의 삶을 본받겠다는 이들의 순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시시 순례의 시작
 
프란치스코의 수행처 세속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행정진한 동굴 위로 봉쇄수도원이 조성되어 있다. 동굴은 물론, 수도원 내부조차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 서부원
 
사흘 동안 아시시의 고샅길을 걷고 또 걸었다. 같은 길이어도 걸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단체 관광객들로 종일 북적이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기념품 가게와 식당 등이 몰려 있는 코뮤네 광장 근처를 제외하면, 여전히 아시시는 성지의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남아있다.

여느 패키지여행처럼 한두 시간 잠깐 들렀다 가는 여행으로는 아시시에서 성인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중세 도시의 예스러운 풍광과, 해질 무렵 들판을 물들이는 보랏빛 석양을 만끽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성 프란치스코는 없다. 그런 곳이라면 이탈리아에는 아시시 말고도 숱하다.

그의 44년 동안의 삶을 생애 순서대로 더듬어보기로 했다. 전쟁 중 포로 생활을 했던 곳과 마귀를 쫓아낸 기적을 행한 이웃 도시 아레초 말고는 그는 평생 아시시 주변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묻힌 곳을 탁발을 하는 마음으로 찾아 걸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알려주는 모든 곳에는 표지판처럼 크고 작은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의 제자 성녀 키아라와 나란히 동상이 세워져 있는 누에바 성당이다. 중심가인 코뮤네 광장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을 아시시 순례의 시작점으로 삼는 게 좋을 성싶다.

중심가인 코뮤네 광장은 그의 부친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포목점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 부의 상속을 포기한 장면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르네상스 미술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조토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수행에 나선 그가 찾아간 곳은 바깥의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동굴이었다. 그가 정진했다는 동굴에는 수도원이 세워져 있는데, 외부인의 출입은 허용되지만 별도의 대중교통편이 없어 찾아가자면 걸어가거나 콜택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시내에서 대략 5km 남짓 떨어져 있다.

살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다. 그 오랜 기간 두 다리조차 뻗을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깨어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동굴 안에는 그의 수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을 나무 십자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시시를 지키는 수호천사
 
산타 마리아 델레 안젤리 성당의 장미 덤불 성 프란치스코가 세속적 욕망을 끊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장미 덤불이 남아있는데, 놀랍게도 줄기에 가시가 돋아나있지 않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라 더욱 큰 울림을 준다. ⓒ 서부원
 
아시시로 돌아와 탁발을 하던 그의 강론에 감화돼 수행에 나선 이가 바로 성녀 키아라다. 당시 18세였던 그녀는 여자 성 프란치스코로 불릴 만큼 청빈한 성인의 삶을 그대로 본받았다. 그가 외침에 맞서 도시와 성당을 지켜낸 기적을 행하고 수녀회를 세웠으며 생을 마감한 곳 역시 아시시다.

그녀는 도시 외곽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수녀회를 세우고 이끌다 생을 마감했다. 거친 듯 검박하지만 결코 누추해 보이지 않는 수도원 안팎의 풍경은 성녀 키아라의 삶을 그대로 닮아있다.

시내에서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향해 난 1km 남짓의 산책로는 걷는 것 자체가 수행이고 순례다. 조금 가파르긴 해도, 올리브 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뜻한 햇볕을 쪼이며 걷다 보면 헝클어진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 든다. 800여 년 전 성녀 키아라도 걷던 길이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아시시를 향해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성 키아라 성당이다. 그녀의 이름을 딴 이곳 성당 지하에 유해가 모셔져 있다. 위치 상 도시의 동쪽 끝으로, 서쪽 끝에 자리한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함께 아시시를 지키는 수호천사로서 우뚝하다.

청출어람의 성녀 키아라를 알현했다면, 다음에 찾아갈 곳은 아시시 기차역 부근에 세워진 성 마리아 델레 안젤리 성당이다. 당시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 성당을 허물지 않고, 그 위에 포개듯 세운 거대한 성당이다. 그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른바 '아시시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아시시를 찾은 순례자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다. 성당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세속적 욕망을 끊기 위해 몸을 던진 장미의 덤불이 지금껏 보존되고 있다. 그가 찔려 피를 흘렸을 이곳의 장미는 신비롭게도 줄기에 가시가 돋아나 있지 않다.

깨달음을 얻고 고행을 자처한 성인일지라도 세속의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을 쉬이 억제하지 못했음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그도 성인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에 더욱 큰 울림을 준다. 가시 없는 장미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려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가슴으로 느껴야 보이는 것들
 
성녀 키아라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 성녀 키아라(클라라)가 수녀회를 꾸리고, 청빈을 실천하다 삶을 마친 곳으로, 건물은 낡았지만 조금도 누추해보이지 않는다. ⓒ 서부원
 
코뮤네 광장부터 성 마리아 델레 안젤리 성당까지 다 둘러본 후라야, 그가 잠들어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남달리 느껴질 것이다. 아시시까지 와서 이 성당만 들렀다 가는 건, 책 내용을 읽지 않고 제목만 보는 격이다. 여느 성당과는 달리 내부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침묵을 강조하는 것도, 눈이 아닌 가슴으로 성인의 삶을 느껴보라는 뜻이다.

성당 자리는 본디 아시시 주민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성인이 마지막 남긴 말은 그곳에 이웃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청빈한 삶을 강조한 그다운 유언이다. 그의 무덤 위에 거대한 성당을 세운 건 분명 그의 뜻이 아니다. 하지만, 800여 년이 지난 지금 아시시의 상징이 되어 수많은 이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으니, 그도 하늘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모셔진 성당 지하는 순례자들의 공간이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곁에 앉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태그:#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성 클라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