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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 대사 시절의 장면(1950. 6.)
 주미 대사 시절의 장면(1950. 6.)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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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다. 그렇다면 대통령 이야기만 쓰는 게 마땅해 보인다. 그런데 굳이 장면 국무총리를 넣은 것은 제2공화국 시절이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헌법에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수반의 위치였고, 국정의 실권과 책임은 국무총리에게 있었다. 그래서 장면 총리를 이 연재에 포함시키는 것이 대한민국 국정 및 현대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기자 말

NARA에서 만난 장면

4.19 민주혁명 때 나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소재 구미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당시 친구들 가운데 집안 형편이 다소 나은 이는 대구 시내 고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아예 고교 진학을 포기하거나 구미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우리 집은 그 몇 해 전, 아버지가 선산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한 데다가 사업까지 기울자 가계가 몹시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고교 진학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당시 구미농업고등학교는 연중 내내 정원 미달로 입시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중3 시절을 신나게 놀면서 보내던 가운데 서울에서 지내던 아버지가 그해 늦가을 고향집에 오셨다. 아버지는 장면 총리가 당신 사진 뒷면에다가 '박기홍 동지'라고 사인을 한 걸 할머니께 드렸다. 그런 뒤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명륜동 장면 박사 댁으로 인사 차 가셨다. 그때 장면 만나고 오신 할머니는 '인물도, 인품도 참 좋은 분'이라고 추켜세웠다.

얼마 뒤 아버지는 서울에서 자리 잡을 것이라며 내게 서울 소재 고교 진학을 주선하시면서 입학원서 넉 장을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졸업식 다음날 네 학교의 입학원서를 한꺼번에 모두 다 쓴 뒤 이불봇짐을 등에 지고 완행열차로 상경했다. 

전기 공립고교 입시에서 실력 부족으로 낙방한 뒤, 후기였던 중동고교에 다행히 합격했다. 당시엔 경상도 촌놈의 서울 진학은 드문 일이었다. 입시 문도 좁았다. 아무튼 나의 서울 고교 진학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장면 총리 집권 덕분이었다. 
   
2004년 2월,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검색·수집할 때다. 장면 전 총리의 사진이 꽤 많이 나왔다. 영문을 살펴 보니 당시 장면은 주미대사로 한국전쟁 때 유엔 및 미국 트루먼 정부 상대로 종횡무진 외교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NARA 서고에는 그때 활동 사진이 남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러자 장면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훈령으로 유엔 안보리에 참석해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토록 교섭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군사와 경제원조를 받는 등 당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선대의 인연 탓인지, 한국전쟁 당시의 공로 때문인지 나는 NARA 5층 사진 리서치 룸에서 장면 주미대사의 사진을 보이는 대로 모두 수집해왔다. 나는 장면의 사진을 대할 때마다 그의 인생길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종교인이나 교육자로서 풍랑 없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동의 세월은 장삼이사도 편히 살지 못하게 한다. 특히 지식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아마 장면 총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장면(맨 오른쪽) 주미 대사가 유엔안보리에 옵서버로 참석하여 북한의 남침 사실을 알리면서 유엔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1950. 6.).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장면(맨 오른쪽) 주미 대사가 유엔안보리에 옵서버로 참석하여 북한의 남침 사실을 알리면서 유엔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1950. 6.).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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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1961년 5월 16일 새벽 2시쯤이었다. 그 무렵 장면 총리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809호를 총리 공관으로 쓰고 있었다(경무대는 윤보선 대통령이 차지하고 있었음). 조인원 경호대장이 흔들어 깨워 장 총리는 잠에서 깼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다급한 전화 때문이었다.

"총리 각하, 육군 30사단 장병들이 장난질하려는 것을 막았고, 현재 해병대와 공수부대 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 다리에서 막고 있습니다."
"뭐라고?"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
"일주일 전에 내가 말한 것 때문이 아니오?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에게도 보고했소?"

"네, 보고 했습니다."
"알았소. 지금 즉시 이곳으로 와서 자세히 보고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곧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현석호 국방장관이 공관으로 달려왔다. 총소리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경호대장과 현 장관은 장 총리에게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장 총리의 승용차에는 부부와 경호원 그리고 운전기사 등이 탔다.

우선 반도호텔 길 건너편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승용차는 무교동 샛길을 빠져 나가 청진동으로, 거기서 수송국민학교, 숙명여고, 중동고교를 지나 한국일보사 앞 미 대사관 관저로 갔다. 조 경호대장이 관저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명재경각의 순간이었다. 장 총리는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명륜동(자택)으로 가세."
"예, 알겠습니다."


승용차가 곧장 창경궁 앞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다. 그 순간 장 총리는 다시 지시했다.

"혜화동 칼멘 수도원으로 가세."

장 총리는 명륜동 자택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장 총리는 혜화동 칼멘 수도원은 아무도 짐작치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장 총리는 그때부터 5월 18일 낮 12시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55시간 동안 그곳에 은신했다. 장 총리는 그곳에 머물며 몇 차례 미 대사관에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불개입 입장만 취했다. 끝까지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했다.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회 지도자들이 장면 주미 대사의 안내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을 만나 미국의 원조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가운데 애치슨 미 국무장관 그 왼쪽 신익희 국회의장, 오른쪽 장면 주미 대사1950. 3. 22.).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회 지도자들이 장면 주미 대사의 안내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을 만나 미국의 원조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가운데 애치슨 미 국무장관 그 왼쪽 신익희 국회의장, 오른쪽 장면 주미 대사195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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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총리, 배신감을 느끼다

장 총리는 그 순간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미국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주미대사로 미국을 가장 잘 알면서도 정작은 잘 몰랐다. 미국은 자기들 판도 내 피지배국에서 대체로 이긴 자와 손을 잡는다. 그래서 내부 싸움은 집권자가 스스로 도전자를 이겨내야만 한다. 그는 미국의 그러한 대외정책을 잘 몰랐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내부 강자가 우두머리로 자기네 지배 정책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해 주면 OK다. 그때뿐 아니라, 아마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지일 듯하다. 민족주의자나 진보적 인사는 달갑지 않다.

그런데, 장면은 집권 후 시민들을 너무 많이 풀어줬다. 그래서 학생 및 진보인사들은 저희 맘대로 남북협상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미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장면은 아니다'라며 제3의 인물을 필요로 했다. 대체 인물은 육군소장 박정희였을 것이다. 미국에게 친일은 흠결이 아니다. 친일한 자는 친미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정기에도 친일한 자들을 등용해 썼다.

배신감의 두 번째 대상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었다. 장 총리는 일주일 전, 그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물었다.

"장 총장! 박정희 육군소장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여러 경로로 들어왔소.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박 장군에 대한 모략입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자가 쿠데타를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참모총장으로 있는 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장도영은 충성을 다짐하면서 장 총리를 안심시켰다. 그 무렵 장 총리는 장도영을 신뢰하고 있었다. 장도영은 미국이 추천한 인물이고, 자기와 같은 장씨인 데다가, 또한 같은 평안도 출신이 아닌가. 이런저런 연유로 장 총리는 장도영 만은 틀림없는 자기 사람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장 총리는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장도영에게 쿠데타 설을 추궁하며 확인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결과적으로 장도영은 두 진영에 발을 담근 기회주의자였다. 장 총리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다. 아마도 장도영으로서도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을 것이다.
  
 국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한 윤보선 대통령에게 장면이 축하의 악수를 건네고 있다(왼쪽부터 윤보선 대통령, 장면 의원, 정일형 의원.1960. 8. 12.).
 국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한 윤보선 대통령에게 장면이 축하의 악수를 건네고 있다(왼쪽부터 윤보선 대통령, 장면 의원, 정일형 의원.1960. 8. 12.).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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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다. 윤보선은 민주당 신파가 적극 밀어줘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윤보선이 경무대에 들어간 이후, 사사건건 내각에 간섭했다. 그 무렵에는 아예 장 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는 듯이, 여러 사람을 동원하여 총리 퇴진 여론몰이를 하고 있었다.

또한 국군 통수권은 자기에게 있다고 줄곧 주장했다. 그런 사람이 정작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군 통수권은 행사치 않았다. 군사반란 곧 쿠데타가 일어났으면 대통령은 지체없이 병력을 동원해 진압하는 게 올바른 처사 아닌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윤보선이 쿠데타 세력을 용인 협조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해상이동 방송선 '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1951. 2. 15.).
 대한민국 해상이동 방송선 "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195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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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총리의 하야

장면은 5월 18일 낮, 윤 대통령이 이미 박정희의 쿠데타를 인정했다는 보도를 보고 스스로 칼멘수녀원에서 나왔다. 자탄했지만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는 중앙청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이로써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1961년 5월 18일 <경향신문> 석간 제1면 보도다.
 
장 총리 하야 성명 발표.
유혈 방지와 반공 강조, 18일 중앙청 각료들 참석리.
장 국무총리는 18일 하오 1시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전 각료 사퇴를 의결하였다. 이로써 작년 9월에 집권한 장 내각은 약 9개월 만에 군부 혁명에 의해 퇴진케 된 것이다. 장 총리는 마지막 각의 후 혁명위의 주선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군사혁명이 발생한데 대해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한 후, 유혈이 없어야 하며, 반공태세를 더욱 강화하고, 국제적 지지를 계속 받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호외 재록 군검 필).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이용원 지음 <제2공화국과 장면> /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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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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