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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동 윤보선 사저 사랑채
 안국동 윤보선 사저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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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꾼의 아들

1961년 5.16쿠데타가 나던 그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휴학을 했다. 생활고로 자살을 꾀하던 중 한 걸인을 만난 뒤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주머니 속 약을 탑골공원 화장실에 버린 뒤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경향신문>을 배달했는데 그 구역은 종로구 가회동과 삼청동, 화동 일부였다. 재동 입구 창덕여고(현 헌법재판소)에서 배달을 시작해 북촌 가회동길을 따라 삼청공원 어귀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고개를 넘어 삼청동 윗동네에서 내려와 화동 경기고등학교(현 정독도서관) 앞에서 끝났다.

바로 그곳에 윤보선 대통령 자택이 있었다. 주소는 안국동 8번지로 무려 250간의 대저택이었다. 복학 뒤 고3때 전남 보성 양조장집 아들 염동연이란 친구가 내 짝이었는데, 그의 집이 안국동 윤보선 댁 옆에 있었다.

그 친구는 그때부터 영남 친구를 좋아한 듯, 수시로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가난한 친구의 굶주린 배를 채워줬다. 그의 너그러움과 인정이 후일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도 한 듯하다(그는 훗날 노무현의 측근으로 평가받았다). 그 친구 집을 갈 때마다 윤보선 사저를 볼 수 있었다.

윤보선 집안은 대통령을 비롯해 집권당 대표, 서울대 총장, 대사, 장성, 장·차관 등 고위 고직자 등 13명을 배출했다. 의사만 60여 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가히 '세도가'라 할만 했다. 

윤보선은 1897년 충남 아산군 음봉면 뒷내 마을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신학문을 배우고자 상경해 교동소학교(현 교동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4년제를 수료한 뒤 히노데(日出)소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게이오(慶應)의숙 중등부에 입학, 2년 쯤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다시 상하이로 건너간 뒤 임시정부 최연소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6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다. 당시 영국인 평균 임금이 7파운드이었는데, 그는 400파운드를 주고 이탈리아제 스포츠카를 구입해 타고 다녀 한국의 '프린스'로 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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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대통령이 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 상공부장관, 적십자총재 등을 역임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후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에 들어가 서울 종로갑구에서 3,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자기 돌아가자 일약 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임돼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4.19 혁명 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책임제로 개헌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갈려 파벌싸움을 벌였다.

구파 핵심 인물은 윤보선과 김도연이었고, 신파의 핵심인물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이었다. 당시 신파에서는 '대통령은 구파에 양보하고, 국무총리는 신파 장면을 옹립한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구파는 '우선 윤보선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다음, 김도연마저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는 전략이었다.

구파 계획대로 윤보선은 국회(민의원, 참의원 양원)에서 무난히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에 오른 윤보선은 애초 복심대로 김도연을 지명했다. 하지만 국회 인준 투표에서 부결됐다. 윤보선은 하는 수 없이 장면을 지명했다. 결국 국회 인준이 통과돼 장면이 총리가 됐다.
 
 윤보선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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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대통령의 옹졸한 처신

사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실권은 총리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윤보선은 장면 정부를 도와주지 않고 비판을 쏟는 등 사사건건 정쟁을 유발케 했다. 신구파의 대립은 끝내 분당사태로 이어졌다.

1960년 9월 22일 민주당 구파는 장면 내각이 발족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신당 발족을 선언했다. 신당의 이름은 '신민당'이었다. 그들은 장면 내각이 4월 혁명 정신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데다가 한 정당이 국회의석의 2/3 이상을 차지하면 1당 독재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시 나는 고교생 신문배달원이었다. 하지만 날마다 그런 뉴스가 실린 신문을 보면서 무척 짜증이 났다. 특히 윤보선 대통령의 장면 내각에 대한 너그럽지 못한 태도는 어떤 불길한 예감을 갖게 했다. 이는 4.19 혁명 정신을 외면한 오만으로 후일 5.16 군사쿠데타를 초래하는 빌미가 됐다.

4월 혁명 이후 우리 사회는 둑이 무너지듯이 그동안 이승만 정권에 꽉 막혀있던 각종 현안들이 분출됐다. 민족 자주 통일 문제, 6.25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 한미경제협정 문제 등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남북 학생 회담을 촉구하는 데모대의 플래카드
 남북 학생 회담을 촉구하는 데모대의 플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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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라는 구호의 플래카드를 앞세운, 남북학생 회담을 촉구하는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자 정가에서는 불길한 '3월 위기설' 또는 '4월 위기설'이 나돌았다. 그럴 때일수록 윤 대통령은 장면 내각을 도우는 게 정치 도의상 옳은 처사였다. 하지만 그는 그릇이 작은 정치인으로 사사건건 장 내각을 비판만 하다가 함께 넘어지고 같이 망하는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을 걸었다.

그의 옹졸함은 헌정을 중단시켰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 실록> / 서중석 지음 <현대사 이야기>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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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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