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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는 국내 역사문화 유산의 멋과 서사를 찾아 떠나는 답사기입니다.[편집자말]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다
   
백산상회 1970년대 백산상회가 있었던 건물의 모습이다.
▲ 백산상회 1970년대 백산상회가 있었던 건물의 모습이다.
ⓒ 홍윤호, 백산기념관 전시실 사진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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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안희제는 3년 이상 중국과 러시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14년 귀국해 기업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1915년까지 고향인 의령에서 제지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의 농토 2000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1916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영남 지방의 항일적 성향을 가진 자산가들의 자금을 모아 1919년 5월 최준, 윤현태 등과 함께 자본금 100만 원 규모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당연히 그의 호인 '백산'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2560주를 보유한 회사의 최대 주주였지만, 1800주를 보유한 경주의 최부잣집 최준을 사장으로 선임해 회사 운영을 맡겼다. 최대 주주로서 회사 운영에 일부 관여했으나, 경영보다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 업무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영남 지방 대지주의 적극적인 참여로 부산 최대 규모의 회사로 성장하고 부산의 대표적인 민족 기업으로 발전했지만, 그만큼 일제의 표적이 되어 일본인이 회사 중역으로 침투하거나 경영에 일부 간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희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회사의 경영 수지와 상관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독립운동 자금 전달은 장부상 거래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속적인 자금 지원으로 회사 수지나 경영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주주들은 1921년~1923년 세 차례에 걸쳐 운영 자금을 불입함으로써 회사의 재정 위기를 막았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 총괄 조직을 만주 안동현의 이륭양행과 부산의 백산상회에 두었다는 사실은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 백산상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며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본인이 직접 연락책 역할도 한 사람이 안희제였다.
 
안희제 흉상 백산기념관 전시실 정면에 우뚝하다.
▲ 안희제 흉상 백산기념관 전시실 정면에 우뚝하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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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임정첩보 36호의 총책임자로, 어디를 가든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은폐했으며, 정보 연락을 위해 여관에 투숙할 때는 반드시 36호 객실을 이용했다고 한다. 변장술에도 능숙해 일본 옷을 입고 다니며 일본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의 외모를 보면, 충분히 진짜 일본인으로 위장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첩보활동 중에 여러 번 일본 경찰에 체포, 심문당하기도 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석방되곤 했다. 그가 감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철저하고 조심스럽게 활동했기 때문에 한 번도 꼬리를 잡힌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임시정부의 첩보원이 접촉해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면 그는 항상 요구 금액의 2배를 주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남아 있다.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60%를 혼자서 조달했다는 전설인지 사실인지 모를 이야기도 있다.

모든 조직에는 반드시 돈, 활동 자금이 필요하다는 상식을 생각해볼 때 그가 얼마나 중요하면서 위험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아직도 그가 어떤 일을 얼마만큼 했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백산상회에서의 그의 활동이 끝까지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산기념관에서 만나는 그의 고마운 흔적들
 
백산기념관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가깝다. 백산상회 옛터에 들어서 있다. 백산상회는 사라졌어도 그 터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정말 고맙다.
▲ 백산기념관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가깝다. 백산상회 옛터에 들어서 있다. 백산상회는 사라졌어도 그 터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정말 고맙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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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중국 백산길 11, 이 자리가 바로 백산상회의 옛터이다. 백산길이라는 그의 호를 딴 도로명 주소도 반갑지만, 백산상회 옛터에 들어선 백산기념관도 반갑고 고맙다. 백산기념관이 없었다면 안희제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민족 기업의 터가 흔적도 없이 대도시의 빌딩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백산기념관은 1995년 8월 15일, 부산 중구청이 광복 50주년을 맞이해 백산상회 자리에 개관한 기념관이다. 이곳을 2019년에서 올해 2020년에 걸쳐 두 번 다녀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맙고 또 고마운 곳이다.

기념관을 어떻게 꾸몄든 그저 이 자리가 백산상회 자리였고, 이 터를 지금 공공의 기념관으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마운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입구 안마당과 전시실에서 안희제와 백산상회, 그의 독립운동을 반추할 수 있는 실물 공간을 갖게 된 셈이다.

삼각형 모양의 입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 이 두 개의 전시실이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정면에 그의 흉상이 있으며 주변으로 안희제의 출생과 성장, 구국운동, 백산상회의 활동, 국외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그의 유품으로 벼루와 화로, 도장이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사실 전시실이 그렇게 넓지는 않아서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금방 한 바퀴 돌 수 있다.
 
안희제 유품  백산기념관 전시실에 안희제가 생전에 사용하던 벼루와 화로가 전시되어 있다.
▲ 안희제 유품  백산기념관 전시실에 안희제가 생전에 사용하던 벼루와 화로가 전시되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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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안희제 연보 옆에는 그의 만주 지역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대종교 활동의 내용이 나와 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왜 만주로 갔을까.

백산상회를 통한 독립운동 자금 조달, 교통국 지부를 통한 첩보활동뿐 아니라 안희제는 언론인으로서 <중외일보> 사장이 되어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지만, 결국 국내에서의 항일 운동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때 백산상회의 지배인 출신으로 엄청난 금맥을 발견해 조선 3대 금광왕이 되었던 김태원(그도 안희제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 전달을 맡았던 인물이었다)의 부탁으로 중개인이 되어 금광 판매를 주선하고 그 수고비 겸 기부금으로 7만 원을 받았다. 오늘날의 10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1931년 그는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이 돈을 들고 만주로 건너가 옛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개설했다. 그리고 본국의 농민들을 이주, 정착시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했고, 대종교에 투신해 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의 역량 확대를 꾀했다.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 그는 정말 끊임없는 열정으로 일관되게 독립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정치 운동(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으로 대종교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안희제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가 8개월 동안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다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출감한 지 하루 만에 59세 나이로 만주 목단강시에서 순국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지킨 친척 동생 안영제에게 "앞으로 2년 후에 일본은 패망할 것이요, 우리나라는 독립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유언으로 남겼다.

백산기념관의 안마당에서 그의 유언을 생각해보았다. 예언 같은 유언, 확신에 찬 그의 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2년 뒤'라는 시기가 우연히 맞았든 그의 예지력에 의한 확신이었든, 그는 마지막 가는 순간에도 우리의 독립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꺾이지 않는 그의 신념이 현실이 된 1945년 8월 15일, 그리고 2020년 지금, 백산기념관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안희제라는 인물을 오래도록 기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서로 이웃에 있는 삼성 이병철 생가와 안희제 생가
 
안희제 생가 안채  인근 삼성 이병철 생가와 달리 안희제 생가는 주말에도 조용하다.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모하러 와서 그를 기억하길 바란다. 안희제가 있었기에 삼성과 이병철도 있었으리라.
▲ 안희제 생가 안채  인근 삼성 이병철 생가와 달리 안희제 생가는 주말에도 조용하다.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모하러 와서 그를 기억하길 바란다. 안희제가 있었기에 삼성과 이병철도 있었으리라.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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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은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일반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3만 명도 채 안 되는 이 작은 고장에서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으로 유명했던 의병장 곽재우를 배출했고, 설뫼마을에서 안희제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을 배출했으며, 장내마을에서 삼성 그룹 창업주 이병철을 배출했다. 1980년대 씨름 천하장사로 유명했던 이만기도 의령 출신이다.

한때 삼성 그룹 창업주 이병철,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효성 그룹 창업주 조홍제가 같이 다녔다고 해서 유명세를 탄 진주시의 지수초등학교도 거리로 보면 진주 시내보다 의령읍에서 더 가깝다.

2019년 10월 어느 주말에 설뫼마을과 장내마을을 같이 방문했다.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약 10km 정도로 가깝다.

장내마을은 마을 자체가 관광지화 되어 있다. 마을 길은 이병철의 호를 따서 호암길이라 부르고 있으며, 마을을 도는 길은 '부잣길'이라 명명된 걷기 코스가 되어 있다. 마을 앞 넓은 공용 주차장에는 수많은 차들이 들어차 있으며, 사람들은 '부자의 기운'을 받기 위해 이병철 생가로 줄지어 들어간다.

생가 안내판에는 '선생은 창업 이래 사업보국, 인재 제일, 합리 추구의 경영철학과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을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발전시켜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등의 미사여구들로 가득하다.

그에 비해 거의 같은 시간 인근 10km 거리의 설뫼마을은 조용하다. 오히려 이병철 생가에서 보이는 떠들썩함이 없어 더 좋다고 해야 할까.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은 주말이나 휴일에도 편안하고 아늑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안희제 생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세계적인 브랜드 삼성을 일구어낸 창업주의 생가가 사람들로 붐비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아쉽다.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기업을 운영했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독립을 추구하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국했던 한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왕에 부자의 기운을 받기 위해 장내마을을 찾는다면 가까운 설뫼마을도 같이 찾아가 안희제를 추모하면 어떨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

안희제가 있었기에 이병철과 삼성이 있었으리라 믿는다.
  
[답사 정보]

- 주소: 안희제 생가(경남 의령군 입산로2길, 3), 백산기념관(부산 중구 백산길 11)
연락처: 백산기념관 051-600-4067

- 안희제 생가 앞에 20여 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백산기념관에는 주차할 곳이 없다. 인근의 유료 주차장을 이용한다. 부산 용두산공원에는 안희제 동상이 있다. 시간 되면 같이 둘러보면 좋겠다.

[가는 길]

- 안희제 생가는 자가용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지IC → 1021번 지방도로 → 1008번 지방도로 → 입산리

- 대중교통으로는 의령버스터미널에서 신반 행 버스(하루 4회 운행)를 이용, 입산리에서 하차한다.

- 부산 백산기념관은 자가용으로는 남해지선고속도로 서부산IC로 나와 구덕터널을 거쳐 지하철 1호선 중앙역 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장 빠르다. 대중교통으로는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 11번 출구에서 40계단 거리 쪽으로 80m 걸어간다. 7번, 9번 출구에서 나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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