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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는 국내 역사문화 유산의 멋과 서사를 찾아 떠나는 답사기입니다.[편집자말]
안희제 사진 부산 백산기념관 전시실에 걸린 안희제 생전의 모습
▲ 안희제 사진 부산 백산기념관 전시실에 걸린 안희제 생전의 모습
ⓒ 백산기념관 상설전시실 사진 재촬영,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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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일화

1909년 국권 회복을 위해 국내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대동청년당 단원인 백산 안희제는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약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귀국하다가 상하이에 들렀다. 이미 그는 망명 생활 중에 만난 독립운동가들과 논의하면서 국내에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고 해외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한다는 '정말 절실하고 어려운' 역할을 맡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1914년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안희제에게 국내 정세를 물었다.

"지금 국내에는 변절자가 많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애국정신을 가진 사람도 <정감록>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가활만인(可活萬人, 만 명이 들어가 살 수 있는 땅)만 안일하게 찾고 있어요."

식민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거나 뜻이 있는 사람조차 <정감록>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이 어지러울 때 들어가 살 만한 피난처(이른바 십승지)'를 찾아 도피하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김구가 안희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백산, 양백지간은 바로 우리 두 사람이오. 나 '백범'의 백(白)과 그대 '백산'의 백(白)을 합하면 '양백(兩白)'이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합시다."

그로부터 31년 뒤, 1945년 광복을 맞아 고국에 돌아온 김구는 영남의 명문가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 최준을 만났다. 안희제와 함께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람이 최준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안희제를 통해 최준이 보내준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보여 주었다. 최준도 안희제를 통해 임시정부에 보낸 지원금 명세서를 갖고 있었기에 이를 펼쳐 들고 김구의 장부와 비교해보았다.

장부를 들여다보던 최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울음으로 바뀌더니 이어 통곡으로 변했다.

최준이 안희제에게 준 독립운동 자금이 한 푼도 빠짐없이 그대로 임시정부에 전달됐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최준은 안희제가 활동 자금과 여비 등으로 그 돈을 상당 부분 사용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금의 절반이라도 임시정부에 들어갔으면 다행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김구의 집무실 바깥 창문을 열고 나가 2년 전 순국한 안희제 묘소 방향을 향해 목 놓아 울며 말했다.

"백산, 나를 용서해주게! 내가 준 돈이 절반만이라도 임시정부에 전달됐으면 다행이라고 늘 생각했던 나를 용서해 주게!"

그는 김구가 위로할 때까지 하염없이 감동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창가에 서 있었다.

백산 안희제,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뛰어난 사업 역량을 가졌으며 돈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기업인. 얼마든지 자신의 부(富)를 추구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입한 회사의 대주주로서 자기 회사의 돈을 독립운동에 조달하고 스스로 첩보원 역할까지 맡았던 인물. 큰돈이 생기면 그 돈을 모두 항일 운동에 투입했던 인물. 교육 계몽 운동 → 민족 기업 설립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 → 항일 언론 활동 →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독립운동에 나서고 순국하는 순간까지 민족의 독립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지자적 인물. 역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기업인의 표상.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령 설뫼마을 안희제의 생가를 걷다
 
안희제 생가 바깥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안희제 생가. 경남 의령 설뫼마을에 있다.
▲ 안희제 생가 바깥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안희제 생가. 경남 의령 설뫼마을에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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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 일명 설뫼마을(입산마을)은 그다지 특별날 것 없는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탐진 안씨의 집성촌으로 집들이 채 40여 채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입구의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와 마을에 남아 있는 숱한 기와집들은 마을의 역사와 전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마을 앞을 흐르는 유곡천은 제법 폭도 넓고 깨끗해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찾아들고, 유곡천 옆으로 충효 테마파크와 캠핑장이 조성돼 있어 공기 맑은 시골에서 하룻밤 캠핑을 즐기려는 캠핑객들도 찾아든다.

마을 중심부에는 대대로 천석지기였던 탐진 안씨 종택이 들어앉아 있고, 그 주변으로 근현대사에 이름을 남긴 안호상, 안준상, 안범준 고택 등 고택의 전시장이라 할 만한 집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그 고택들 끝자락에 백산 안희제 생가가 있다. 생가 뒤 작은 길을 따라 뒷산으로 올라가면 안희제 묘소에 닿는다. 마을 곳곳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기도 한다.

생가에 들어서면 초가집의 사랑채와 기와집 안채의 두 동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와 안채가 바짝 붙어 있어 그런지 안마당이 비교적 넓게 보인다. 앞쪽의 사랑채는 조촐하지만 뒤쪽의 안채는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이 안채에는 '백산고가(白山古家)'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안희제 생가  안채에는 유려한 글씨로 '백산고가'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는 조선 후기 한옥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안희제는 이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안희제 생가  안채에는 유려한 글씨로 "백산고가"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는 조선 후기 한옥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안희제는 이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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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는 이곳에서 1885년 8월 4일(음력), 안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른바 전형적인 양반 지주 마을의 향반 집안이자 유림 마을에서 출생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다가 부친과 조부를 찾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옛 책을 읽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무식자보다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서울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공맹의 도라고 생각합니다. 산림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부친과 조부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네 말이 옳다'고는 하면서도 좀 더 기다리라면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날 밤 여장을 갖추어 상경했다.

그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집안에서는 그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조부가 직접 서울로 찾아가 안희제에게 "너의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 그러나 기왕 하고자 한다면 나라에나 집안에나 웃음거리는 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설뫼마을 담장 벽화  설뫼마을(입산마을)의 담장 벽에는 이런 벽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 설뫼마을 담장 벽화  설뫼마을(입산마을)의 담장 벽에는 이런 벽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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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인정을 받은 후 그의 구국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우선 그는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에 나선다. 1907년 서울에서 교남학우회('교남'은 '영남'과 같은 의미)를 조직해 민중 계몽 활동에 나섰고, 자신의 고향인 입산리에도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유학의 뿌리가 강한 고향 마을에서 반대하는 집안 어른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문중의 재산으로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운 것이다. 보수 유림의 전통이 강한 영남 지방에서 선구적인 근대 교육 기관의 설립이었다.

안희제 생가 안쪽으로 외따로 떨어진 상로재라는 한옥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창남학교였다. 안희제의 집안 형님이자 홍문관 교리를 지냈던 안효제가 안희제의 뜻을 이해하고 완고한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서 세운 학교이다. 이후 그는 의령읍에 의신학교를 설립했고, 동래 구명학교, 대구 교남학교 등의 건립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나라가 망했다고 판단하고 구국 운동의 뜻을 세운 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집안을 박차고 서울로 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안희제. 그의 강인한 결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안온한 느낌마저 드는 작은 시골 마을의 생가 한복판에서 생각에 잠겨 본다.

이곳 안희제 생가는 최근에 조선 후기 남부 지방의 민가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다 안희제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점에서 국가 사적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어서 결실을 봤으면 한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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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문화유산답사 전문가, 역사 전공과 여행을 결합시켜 역사여행으로 의미를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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