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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길이 되기 전의 땅 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든 것이 뿌연 새벽안개 속에 있었지만 그들은 첫발자국을 내디뎠다. 한 사람, 두 사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따라 걸어가면서 땅은 길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잊히고 그 길의 시작점에 있던 장소는 대부분 사라졌다. 길은 멈추면 길이 아니다. 루쉰의 말처럼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야 길이 된다. 오레 전 그들이 걸었던 길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만들며 계속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길이 다양해지고 풍성해진다. 그 길을 걷는 우리의 삶도 그렇다.-9쪽
 
여성은 사람이 아니던 시절, 사람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던 여성들이 있었다. '여자도 사람'이라고 절규하던 나혜석, 자유연애를 했던 윤심덕, 김명순, 그들은 편견과 소문의 뭇매를 맞다 결국 가족과 사회, 남성에게 버림받아 미치거나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미치지도 죽지도 않고' 꿋꿋하게 새 길을 만들어 낸 여성들도 있었다.
  
근대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
▲ 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근대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
ⓒ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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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효형출판)는 '사람이 되고자' 길이 되기 전 땅 위를 걸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인격적 존재로 사람 대접받으며 자기 자신으로 살던 여성,  온 존재를 불사르며 길을 만들어 간 여성들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여성들에게도 자신의 길을 가려는 새로운 삶의 의지를 품게 한다.

가부장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을 사람으로 눈뜨게 만든 것은 신식교육이었다. 신식교육은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를 주축으로 이뤄졌다.

메리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세웠을 때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까지 시켜준다는 말에 딸을 맡겼던 박씨라는 여자는 서양도깨비가 아이들을 약으로 쓴다는 소문에 딸을 도로 데려가겠다고 떼를 쓰더란다. 메리 스크렌턴은 박씨의 손을 꼭잡고 서툰 조선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나를 한번 믿어보세요. 나는 꽃님이에게 밥이 아니라 사람대접을 받도록 해주고 싶어요."
"밥이 아니라 사람대접이라니. 세상에. 내 평생 이런 소리는 처음이다!"
"내 딸 꽃님아, 너는 그곳에서 사람이 되어라!" -17쪽
 
난생 처음 사람대접 받게 해준다는 말을 듣고 박씨는 딸에게 사람 대접 받고 살라며 딸을 두고 혼자 떠난다.

시도때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훔치던 박씨 딸 꽃님이를 모두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스크랜턴 덕분에 꽃님이는 이화학당에서 지내며 통역일을 돕다가 전도사와 결혼해 목회일을 했다고 한다. 꽃님이는 마침내 사람대접 받고 사람을 대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상동교회를 통해 중국 상하이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차미리사는 미국 선교사의 우월의식과 차별을 목격했기에 '우리 문제는 우리 힘으로!'라는 정신으로 근화여학교를 세운다. 차미리사는 교훈에 주체성과 자립정신을 투영시킨다. 근화여학교의 후신인 덕성여자대학의 창학 이념에는 차미리사의 정신이 그대로 담겼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92쪽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고 깨우치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은 현대를 사는 모든 여성들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이다.

경제적 자립은 여성을 당당한 사회적 존재로 서게 만든 중요한 요소다. 산파, 여학교 교사, 공장에서 일하며 여성들은 경제적 자립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을 깨우는 새로운 길이 된다. 교육과 경제적 능력을 통해서 여성들은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내며 주체적인 자아를 찾는다. 용기있는 여성들은 수많은 역경을 딛고 미치지도 죽지도 않고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먼저 길을 낸 여성들이 있어 오늘도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의 유리바닥 위를  걷고 또  걷는다. 절망을 의지로 낙관하면서 새 길을 만들어간다. 우리 뒤에 오는 여성 또한 새로운 길을 가게 만들 노정표가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 파란만장, 근대 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

김소연 (지은이), 효형출판(2019)


태그:#근대여성 공간, #교회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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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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