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우, 정현, 이덕희는 한국 남자 테니스를 이끌고 있는 20대 초반의 '3두 마차'이다. 올해 첫 그랜드슬램 대회인 오스트레일리아 오픈(AO)에 이들 세명 모두 당초 도전장을 내밀었다.
 
AO 1회전이 21일 끝났다. 64강이 확정된 것이다. 3명 가운데 유일한 본선 진출자였던 권순우는 21일 경기에서 아깝게 지고 말았다. 막이 오르기 무섭게 이번 AO 대회에서 한국 남자 테니스를 정리해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실망보다 더 큰 희망을 볼 수 있는 대회였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권순우 선수.

권순우 선수. ⓒ 위키미디어 커먼스

 
2018년 AO 4강에 진출했던 정현은 이번 대회 예선 대진표에 올랐으나, 손바닥 물집으로 아예 코트에 서지 못했다. 이덕희는 1회전을 통과했지만, 2회전에서 분루를 삼켰다. 선두주자 권순우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자연스레 정현과 이덕희에게서도 '희망의 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선수로서 기초 신상은 다음과 같다.
 
권순우는 세계 랭킹이 87위이며, 만 22세에 신장 180cm이다. 정현은 127위 23세, 188cm이고 이덕희는 21세, 175cm이다. 피지컬은 사실 테니스가 아니라도 거의 모든 스포츠에서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
 
권순우의 1회전 상대는 세계 29위의 니콜로즈 바쉴라쉬빌리 선수로 이번 대회에는 26번 시드를 받고 출전했다. 권순우의 경기력에 대해 얘기하기에 앞서, 바쉴라쉬빌리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바쉴라쉬빌리는 27세로 키는 테니스에 가장 적합하다는 185cm이다. 그는 2018년 7월 30일 전주 랭킹 81위에서 35위로 도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3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한때 16위까지 진입하기도 했다.
  
 정현 선수

정현 선수 ⓒ 위키미디어 커먼스

 
테니스에 필요한 모든 기량을 고루 갖추고 있다. 서브, 스트로크, 발리 등은 물론 경기를 풀어나가는 능력도 순위에 걸맞게 훌륭하다. 2년 가까이 30위권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퀄리티 플레이어이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같은 최일류 선수를 만나도 일정 부분 자신의 경기를 풀어갈 줄 아는 선수이다.
 
권순우와 바쉴라쉬빌리의 경기에 앞서 예상한 바 있지만, 권순우와 바쉴라쉬빌리의 기량은 비슷한 수준이다. 경험에서 바쉴라쉬빌리가 좀 앞서 있고, 서브도 살짝 좋다. 그러나 권순우는 준수한 서브에 세계 남자 선수들 가운데도 수준급의 스트로크를 갖고 있으므로 경기 당일 컨디션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실제로 권순우는 풀 세트 접전 끝에 바쉴라쉬빌리에게 패했다. 내용은 문자 그대로 박빙이었다. 총득점에서 권순우는 179포인트, 상대는 187포인트였다. 8포인트차였다. 바꿔 말하면 4포인트로 승부를 갈렸다는 얘기이다.
 
서브 에이스 숫자에서 14대 22로 밀렸지만, 위너 숫자에서는 66대 61로 앞섰다. 에이스까지는 아니어도 서브 역시 크게 밀리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에이스는 라켓에 아예 공이 닿지 않은 걸 말하며, 네트를 못 넘어오거나 줄 밖으로 나가는 리턴은 에이스로 잡아주지 않는다.
 
 테니스 시즌을 둘로 나눔으로써 선수 수명을 연장하는 페더러.

테니스 시즌을 둘로 나눔으로써 선수 수명을 연장하는 페더러. ⓒ 위키미디어 커먼스

   
최고 서브 속도는 둘 다 시속 198km로 동일했다. 첫 서브 평균 속도는 168km의 권순우 보다 상대가 3km 빠른 171km였다. 두 번째 서브는 권순우가 148km, 상대가 155km였다. 대신 첫 서브 성공률은 권순우가 67%로 56%의 상대를 앞섰다. 서브도 내용을 까보면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권순우가 세계 87위이지만 그의 기량은 최소 50위권 전후로 볼 수 있다. 잘 잡아주면 30위권 안팎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1회전은 패배했지만 권순우가 30~50위권의 '실력'을 갖췄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제 22살의 선수가 30~50위권 기량이라면 앞날이 보통 창창한 게 아니다. 앞으로 쑥쑥 랭킹이 올라갈 날만 남은 것이다. 유일한 걸림돌이라면, 부상이다. 선수 본인과 코칭 스태프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테니스 선수의 부상은 크게 2가지에서 비롯된다, 첫째 폼이나 스윙 혹은 서브 궤도 등의 기술적 결함이다. 둘째, 몸을 과다하게 사용할 경우이다. 한마디로 단위 경기당 승부를 내는 시간이 길수록 부상이 찾아올 확률이 커진다.
  
 동양선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니시코리.

동양선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니시코리. ⓒ 위키미디어 커먼스

 
권순우는 서브와 스트로크 등등에서 대체로 훌륭한 폼과 스윙 궤도를 갖고 있다. 서브가 조금 더 부드럽고 정확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지금으로서도 합격 점수이다.
 
그렇다면 권순우의 부상은 경기 시간에서 비롯될 확률이 높다. 180cm의 신장은 테니스 선수로서 다소 작은 키에 속한다. 서브 속도를 획기적으로 늘리려 한다면 부상이 올 수도 있으니 정확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포인트를 짧게 가져가면 경기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스트로크 구질과 샷 슬렉션을 향상 시키면 포인트를 예컨대 서버 입장에서 5구 이내에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권순우의 스트로크는 최상급이지만 구질 배합이나 어느 방향으로 어떤 공을 보낼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개선 여지가 충분하다. 아마 앞으로 경험도 도움이 될 것이다.
 
테니스 감각에서만큼은 세계 최상급 선수 가운데 하나인 정현은 이 점에서 되새김질해야봐야 할 부분이 많다. 정현은 서브나 스트로크 폼 자체가 훌륭하다고 할 수 없고, 스윙궤도도 좋은 편이 못된다. 더구나 뻣뻣하기까지 한 모양새를 보여줄 때가 많다.
 
한때 정현은 나달 못지 않을 정도로 수비 실력이 좋다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실제 수비력점수에서 톱 10안에 너끈하게 들기도 했다. 하지만 수비 중심의 선수들은 포인트를 길게 가져갈 수 밖에 없고, 경기 시간이 오래 걸리며 엄청나게 뛰어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체력이 고갈되기 쉽다. 이러면 부상이 불가분 부상이 찾아온다.
 
정현 선수의 잦은 부상은 그의 스윙 스타일이나 경기 스타일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가지 정도의 처방이 가능할 듯 하다. 첫째 188cm의 신장으로서는 꽤 무거운 90kg 안팎의 체중을 줄여야 한다. 5kg 정도 뺄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다. 서브나 스윙 폼 자체를 바꾼다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저 조금 부드러운 쪽으로 길게 보고 서서히 스윙 폼이나 서브 자세를 개선해나가는 게 좋겠다.
 
둘째 연중 경기 스케쥴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게 쉽지는 않다. 특히 하위 랭커일수록 선택의 폭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하지만 페더러의 장수를 보면 답이 나온다. 테니스 시즌은 프로 운동 가운데 아주 긴 편에 속한다. 연초에 시작해서 11월까지 투어가 있다. 그리고 한달 남짓 쉰다. 개인 운동이라 단체 운동처럼 대체 선수를 넣고 빼고 할 수가 없다.
 
'늙은' 페더러는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체력을 요구하는 스케쥴에 대해 답을 찾았다. 1년에 한번 쉬는 게 아니라 두 번을 쉬게 스케쥴을 조정한 것이다. 5월을 전후로 한 이른바 유코 클레이 시즌에 달포 가량을 쉼으로써, 1년을 정확히 두 토막 내버렸다.
 
1년에 한 달 쉬는 것과 1년에 두 달 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1주일에 주말 이틀 쉬고 5일 일하는 것과 일주일에 3일 쉬고 4일 일하는 것은 전적으로 피로도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페더러가 답을 찾자, 나달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나달도 만 33세이다.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며 테니스의 최전성기라는 만 27~28세 권을 한참 벗어나 있다. 나달은 자신의 강점인 흙코트 시즌을 살리는 대신 윔블던 시작 전 3주가 될까 말까한 잔디 코트 시즌을 건너 뛰고(때로는 윔블던 까지도 생략), 체력이 바닥나는 11월은 경기 참가를 줄이고 있다.
 
페더러의 시즌 쪼개기는 나달에 이어 나달 보다 한 살 아래인 조코비치도 따라할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 권순우든 정현이든 이덕희든, 동양인들이 피지컬에서 밀릴 확률이 높다는 점을 일정 부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동양인으로서 세계 랭킹 10위 안에 '최장기 거주'했던 일본의 케이 니시코리 선수의 이력을 더듬어봐야 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니시코리는 반박자 앞선 받아치기와 빠른 발을 앞세워 세계 랭킹 4위까지 진입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체력 소진과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178cm의 키를 가진 선수가 다른 신체능력이 엇비슷한 185cm의 선수를 꺾기란 확률적으로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이덕희의 호주오픈 예선 1회전 경기 중계 화면

이덕희의 호주오픈 예선 1회전 경기 중계 화면 ⓒ S&B컴퍼니/연합뉴스

 
우리 테니스의 3두 마차 가운데 누구보다 니시코리를 본봐야 할 선수가 이덕희이다. 이덕희는 폼이나 스윙 궤도 등은 무난한 편인데, 체중이 조금 많이 나간다. 니시코리보다 3cm 가량 작은데 체중은 2~3kg 더 나간다. 이게 상당히 큰 차이이다. 동양인이 100미터 같은 육상에서 절대 약자라고는 하지만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1~2초 차이로 하위권을 맴도는 게 아니다. 0.1초라는 미세한 시간에 승부가 갈리듯, 신장에 따른 적정 테니스 체중 여부가 승부를 가르는 눈에 안 보이는 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다.
 
권순우, 정현, 이덕희는 나이를 볼 때, 랭킹 곡선이 결코 나쁘지 않다. 아니 권순우는 성장세가 아주 좋은 축에 속하고 크게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지만, 정현도 그 나이 때 선수로 실망할 수준은 아니다. 이덕희도 마찬가지이다.
 
나달이나 페더러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선수가 만개하는 데는 프로 입문후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하다. 절정기량을 보인다는 평균 나이 27~28세까지 권순우와 정현 이덕희는 적어도 5~6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테니스 선수층이 한국보다 훨씬 두텁고 단단하며, 전략 측면에서 앞서 있는 일본은 이번 AO 본선에 4명이 나가, 3명이 2회전 진출에 성공했다. 사실 일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불모지 급인 한국 남자 테니스 환경을 고려하면, 한국의 3두 마차는 개천에서 용난 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망보다 희망이 훨씬 큰 이유이다. 아쉬움이라면 이들 3두 마차를 이을 재목이 그리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테니스 선수들의 잘못이 아니라, 테니스 관계자들과 테니스를 좋아하는 시민들이 해결해줘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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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권순우 정현 이덕희 페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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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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