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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휘호 '북진통일' (제3군단 방문기념. 날짜 미상.).
 이승만 대통령 휘호 "북진통일" (제3군단 방문기념. 날짜 미상.).
ⓒ 우남이승만박사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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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이 감도는 한반도

이승만은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1949년 6월부터 부쩍 대북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38선 충돌도 잦아지고 격화됐다.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하자 그에 상응하는 군사원조를 받고자 긴장을 고조시킨 감도 없지 않았다. 그 즈음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부가 무너졌다. 38선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는, 세계적인 화약고로 변했다.

1949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 김일성도 '국토완정론'을 제시해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실질적인 준비도 없는 맹탕이요, 허풍이었다. 이와는 달리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에서부터 탱크 등 막강한 원조를 받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6.25전쟁 바로 직전 38선 부근에서 적진을 경계하는 국군(1950. 6.).
 6.25전쟁 바로 직전 38선 부근에서 적진을 경계하는 국군(1950. 6.).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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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8선 일대. 갑자기 북쪽으로부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이 포성은 이후 3년 동안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6․25 전쟁(한국전쟁) 발발 신호였다. 하지만 그 시각 38선 50km 남쪽의 서울시민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창덕궁(비원)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인민군의 38선 남침을 보고받았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첫 보고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였다. 곧 이어 이 대통령의 지시로 긴급소집된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방 전황과는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적의 공격은 전면 남침이 아니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주의자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한 책략 같으며, 우리 군을 즉시 출동시켜 침략자들을 일거에 격파하겠습니다."

그날 정오부터는 마이크를 단 군용 지프차가 서울 도심지를 질주하면서 다급하게 방송을 했다.

"3군 장병들은 지금 즉시 원대 복귀하라."

그제야 일부 서울시민들이 조금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38선 일대에서 전면전이 일어난 줄은 몰랐다. 그 무렵 서울시민들은 38선에서 우리 국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력으로 인민군을 제압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치며, 국군 전투력을 과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이전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허세와 허풍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곧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6.25전쟁 중, 왜관 철교 복구에 치사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4. 18.).
 6.25전쟁 중, 왜관 철교 복구에 치사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4. 1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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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피란행렬

6월 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전쟁 발발 사실을 알리고 맥아더와 통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부관이 깨울 수 없다고 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맥아더 원수가 깨면 이렇게 전하시오.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

곧 맥아더가 전화를 받자 이승만은 계속해서 분노를 터뜨렸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결국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네가 좀 더 관심과 성의를 보였더라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

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됐다. 이때 비상 국무회의에서 '천도'가 확정됐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당시 150만 서울시민의 안정과 민생 그리고 피란 대책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반 시민들이 정부의 수도 이전을 알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하게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 대기 중인 특별열차에 올랐다. 이 특별열차가 서울역을 떠난 시각은 그날 새벽 3시 무렵이었다.

대통령의 피란행렬에는 부인 프란체스카, 김장홍 경무대 경창서장, 황규면 비서 그리고 경호경찰 1명 등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탑승한 특별열차는 기관차 1량에 객차 2량이 달린 다 낡은 3등 열차였다.

이 열차는 부산과 진해를 향해 출발했다. 그날 오전 11시 40분에 열차가 대구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은 열차를 멈추게 하고 서울로부터의 정보를 취합한 뒤 다시 서울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오후 4시 30분께 이승만을 태운 열차가 대전에 도착했다. 이미 대전에는 서울을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관료들이 상당수 있었다.
   
 홍천, 6.25전쟁 중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홍천, 6.25전쟁 중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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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방송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현지에서 녹음방송을 통해 자신이 마치 서울에 체류 중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

이 방송을 들은 일부 서울시민은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전쟁 발발 66시간 만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첫 육성은 국민을 속였다.

후일 유엔군이 평양을 함락할 때 김일성도 북한 인민에게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라"라고 해놓고 자신은 감쪽같이 도망쳤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무렵,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급보를 받자, 그는 후퇴 중인 부하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인민군의 남하를 한강 이북에서 저지해야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그는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

한강교 곳곳에 미리 폭약을 설치해둔 채 발파 명령을 기다리던 공병들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 철교의 일부 교각이 큰 폭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한강교 폭파 시각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사전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일대의 숱한 피란민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수장 또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한강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은 '독 안의 쥐처럼' 꼼짝할 수 없게 됐다.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은 또다시 자신의 신변을 불안해 했다. 그래서 소수의 경호요원과 비서를 대동하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승용차를 타고 다시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통상적 경로가 아니었다. 그의 승용차는 전북 이리로, 거기서 열차로 타고 목포로 갔다. 목포항에서 소해정을 타고 무려 19시간을 항해한 끝에 부산으로 갔다.

7월 2일 오전에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한강방어선이 뚫리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제야 "내가 잘못 판단했어, 이렇게 빨리 부산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라고 말한 뒤, 7월 9일 대구로 갔다. 이후 8월 18일에는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갔다.

그해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부는 적치하 시민들을 부역, 친공, 북한정권에 협력의 혐의로 처벌했다. 한강을 용케 건넜던 '도강파'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이 대통령의 육성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들은 '빨갱이' '불순분자'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5만5000여 명의 부역자를 검거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박명림 지음 나남출판사 발간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임영태 지음 들녘 발간 <대한민국사>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산책> 등 그밖에 문헌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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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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