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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한국이 IMF의 구제 금융 대상국이 된 이래로 '위기'라는 말, 특히 경제적 위기라는 말은 '아닌 적이 있었나'는 말마저 흔할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시기를 넘기면 안정이나 탄탄한 재성장이 과연 다시 올 수 있을까?

만약 생산과 고용이 늘어나는 소위 '좋은 시절'이 다시 온다면, 개인의 일상도 그러할 것인가? 그에 앞서, 개인에게 경제의 위기나 안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들인가?

소규모 사업체들이 보내는 경제 위기의 신호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경제활동들을 현장에서 하나하나 조사한 결과인 사업체조사는 1990년대 초반 이래로 매년 진행되어 왔는데, 그 조사의 결과는 '위기'의 구체적인 현실이 무엇일지 일러준다.

사업체가 가장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는 서울 도심의 사업체조사 결과를 보면, 구제금융이 신청되기 바로 직전인 1996년에 –3.0% 정도의 큰 폭으로 사업체수가 감소했다. 사업체의 개수는 서울 행정구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의 총량으로 매우 단순한 합계에 불과한 숫자이지만, 1996년의 급격한 감소가 1년 뒤 위기의 뚜렷한 전조라면 그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사업체수의 의미를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세계금융위기 앞뒤의 2007년(-3.4%)과 2009년(-3.2%), 그리고 '신용카드 대란' 이후 2004년과 2005년(-1.9%)의 급격한 감소 기록들이다. 도심의 사업체수, 이 숫자의 궤적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위기가 인지되기도 전에 고꾸라지며 매번 신호를 보내온 셈이다.

1인 이상을 고용하는 모든 경제활동 조직을 기록하는 사업체 개수는 일자리의 총규모와 직결된다. 사업체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숫자의 급격한 감소란 개인에게 예고가 아닌 위기 자체이다. 구제금융 선언은 실체적이고 현실적 위기에 대해 1년이나 뒤늦은 공식적인 인정에 불과했던 셈이다.

결국 사업체수의 궤적이 알려주는 바는 도시의 경제적 안정이 일자리의 규모와 무관하지 않다는 매우 당연한 사실이다. 중앙정부는 물론 세계 여려 나라의 도시정부들은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정책적으로 중요하겠지만, 경제적 안정에 관한 한 있던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
 
 2009년 기준 연도벌 사업체수 및 종사자수(출처: 2009년 기준 전국사업체조사 잠정결과 보도자료)
 2009년 기준 연도벌 사업체수 및 종사자수(출처: 2009년 기준 전국사업체조사 잠정결과 보도자료)
ⓒ 통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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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사업체의 큰 경제

큰 대기업에는 많은 일자리가 있고 작은 기업에는 적은 수의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기업만이 도시 정부 일자리 정책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사업체 하나의 고용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절대량은 작은 사업체가 제공하는 일자리의 전체 규모가 더 크다.

서울시만 보더라도 10인 이하를 고용하는 사업체가 91%로 서울시 전체 경제에서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성장을 신성시하는 시각에서는 이윤을 많이 내는 경제활동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예의 위기-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절대적 다수의 소규모 사업체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규모와 관련해서는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작은 규모의 사업체에 대해 대개 영세하다는 인식을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세대가 지날수록 사업체 규모를 그 사업체의 능력에 직결하는 이전의 고정 관념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고용 규모 자체가 그 기업의 생산력과 직접 비례하여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화 기술이나 전문화-외주 덕분에 더 이상 한 기업이 고용의 규모를 키우지 않고도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10인 이하 법률회사를 굳이 영세한 기업이라고 인식하지 않듯, 더 이상 고용 규모가 경제활동의 총량을 직접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더구나 도시 단위의 경제에서는 소규모 경제활동의 증가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새롭게 창업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대기업도 조직 구성을 작은 단위로 재구성하고 유연성을 높이려 한다. 작은 규모는 유연하고 재빠르며 조직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 기업 활동에 상존하는 위험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서울 통계로만 본다면, 경제적으로 위기의 순간이었던 1997년과 1998년에 작은 기업의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 그 늘어난 숫자가 경제 회복을 직접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일자리의 창출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갖는다.

경제적 다양성은 회복력의 원천

경제학 담론에서 위기에 강한 경제는 '회복력'을 가졌다고 일컬어진다. 회복력을 가지는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속성은 '다양성'이다. 한 도시의 경제가 하나의 특정 산업에만 특화되어 있는 경우, 경제적 부침과 일자리 위기가 숙명적으로 따라온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조선업에서 목격했다.

우리는 세계 원유 가격과 미국의 셰일 유전 생산비 사이의 함수가 거제의 해양플랜트 조선소에서의 대량 해고로 바로 직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망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 도시의 경제와 국제 경제가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있는 초연결 시대에, 경제적 다양성은 도시 경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균형추와 같다.

여기에 제조업 이야기를 덧붙여 보자면, 과거 도시의 탈산업화는 산업고도화란 이름으로 경제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지만, 지금과 같은 기술 변화의 시대에 어떤 탈산업화된 도시들은 재산업화를 꿈꾼다. 정보화-자동화 기술로 점차 무인화되고 있는 거대한 공장과 달리, 도시의 재산업화는 사람의 일자리를 품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도시 경제의 탈산업화가 유일한 성장의 길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서비스와 금융만이 도심에 적합한 산업이라 말하지 않는다. 제조업도, 심지어 농업도 도시로 회귀하려 한다.

뉴욕 맨하튼의 의류제조업 보호는 이미 알려진 사례이며, 런던의 산업단지 파크로얄(Park Royal)은 도심제조업 진흥을 위한 새로운 산업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자칫 오해할 수 있겠지만 이런 제조업 공간은 최첨단 산업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런던의 부엌(London's kitchen)'이라는 별칭이 붙은 제조업 공간은 시민들이 매일 먹을 음식과, 가구와, 옷, 부엌 용품 등 우리가 전통산업이라고 여기는 제조업과 그 노동자들이 채운다. 새로운 제조업 혹은 첨단 기술의 혁신 산업도 그 전통산업과 함께 공존하면서 도시 경제와 일자리의 다양성 속에서 성장한다.
 
 로얄 파크 산업 단지
 로얄 파크 산업 단지
ⓒ 런던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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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도심은 다양성의 인큐베이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 부문에 다양한 규모의 경제활동이 공존할 수 있는 경제. 그것을 위한 도시의 경제정책, 일자리 정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한 국가의 거시 경제정책은 당연히 중요한 변수이겠지만, 도시 차원에서도 경제적 다양성을 위한 정책은 직접적인 효과를 가진다. 특히 공간에 관한 정책은 도시경제에 즉각적이고도 막대한 영향을 발휘한다.

대도시의 도심은 기업들의 탄생과 성장을 위한 요람과 같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다. 오래된 건물의 작은 공간은 도심의 높은 임대료 압력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 줄 수 있고, 편리한 교통은 판매처를 확장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제공한다. 도심에는 사람들이 모이며, 따라서 사업에 필요한 정보도 집중된다.

일찍이 탈산업화되고 국제적 금융허브가 되어버린 런던의 경우도 다양한 일자리의 중요성을 금융위기 때 절실하게 체감했다. 점차 비중이 커지는 작은 규모의 경제(The growing small unit economy)가 도심 안에 자리 잡고 런던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토지이용에서 산업 용도를 보존하고 무분별하게 주택용도로 전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재개발 사업에서도 신축 면적의 일정 비율은 저렴한 임대료(Affordable workplace)로 묶어 기존의 경제활동을 위한 공간을 확보한다.

도시에 저렴한 작은 공간이 없다면 일자리를 만들어낼 시도도 할 수 없고, 도시 정부가 바라는 혁신적 창업은 힘들 것이다. 도시의 공간 정책은 구체적인 수준의 경제 정책이다.

서울 도심은 위기에 앞서 반응하고 회복기에는 다른 곳보다 더 빨리 일자리가 성장한다. 마치 경제 환경의 변화를 예민하게 탐지하는 동굴 속 카나리아와 같은 것이다.

서울 도심의 중구 종로구에는 1만 4400여 개의 제조업 사업체와 4만 3천개의 기술자들의 일자리가 있는데, 여러 통계와 조사는 이들이 금융업, 서비스업, 상업 등의 다른 산업 부문과 연결되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초연결의 시대. 그 연결의 주체들인 기업과 사람이 모여든 도심은 새로운 기술과 최신 정보가 집중되는 곳이다. 새로운 시도의 씨앗과 같은 작은 제조 활동은 물론, 무엇이든 생산하려는 어떤 활동이든지, 그 모두를 담을 수 있고 다양성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서울 도심에도 필요하다.
 
심한별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선임연구원
도시계획학 박사,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선임연구원으로 산업과 도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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