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 주말 사극 <간택-여인들의 전쟁>에는 왕실을 능가하는 2대 가문이 등장한다. 김만찬(손병호 분)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와 조흥견(이재용 분)으로 대표되는 풍양 조씨가 바로 그들이다.
 
세도가문으로 불리는 이들은 국가대사를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왕실 일상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임금의 혼례에 대해서까지 이러쿵저러쿵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다.
 
이런 속에서 임금 이경(김민규 분)은 독자 영역을 확보하고자 나름대로 무던히 노력한다. 특히 왕비를 맞이하는 혼례 문제에서 왕실의 독립성을 추구한다. 그런 노력이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이 드라마의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추동력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민간경제 파탄, 도처에서 민란 빈발하던 그때

드라마 <간택>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세도정치시대(1800~1864년)는 조선왕조가 결정적으로 쇠약해진 시기다. 왕실이 무기력해서 외척 가문(왕실 사돈)이 정권을 농단하는 속에서 전정·군정·환정이라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간경제가 파탄이 나고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빈발했다. 토지세, 병역 문제, 정부 대출이라는 3대 분야의 문란이 백성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던 때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된 것은 세도가문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자기 가문의 관점으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동인당이니 서인당이니 남인당이니 북인당이니 노론당이니 소론당이니 하는 붕당들이 하나의 조직체계를 이뤄서 집권한 것도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한 가문이 일족 성원들을 동원해 하나의 집권당을 이룬 상태에서 나라를 운영했다. 이들은 가문의 이익이라는 좁은 관점을 가진 채, 자신들의 권세를 확대하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왕실은 설령 무능할지라도 나라 전체를 조망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려 한다. 하지만, 세도가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의 일차적 관심은 가문의 이익이었다. 이런 가문들이 집권당이 되어 60년 이상 나라를 운영했으니, 민간 경제가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도처에서 민란이 우후죽순처럼 터져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러시아·프랑스 등 서양열강은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그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조선에서는 가문의 미시적 이익만 추구하는 집단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세도정치 시대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 하나
 
 김만찬.

김만찬. ⓒ TV조선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이 마비되고 백성들이 주먹과 곡괭이를 들고 일어서는 이 혼란한 세도정치의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시대에 정권 장악을 가능케 했던 키워드가 바로 그것이다. 어수선한 상황과 너무나도 판이한 키워드, 그것은 바로 '혼인'이었다.
 
정조 임금이 1800년에 만 10살 된 순조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정조의 새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와 경주 김씨 가문에 돌아갔다. 정순왕후가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이 가문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와 혼인해 왕후 지위를 획득한 데 더해, 증손자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경주 김씨 집권의 실마리가 됐다.
 
오늘날의 대통령 부인은 법적으로 대통령의 가족에 불과할 뿐, 공식 지위를 갖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부인도 관저를 나가야 한다. 이와 달리 왕후는 독자적 권한이 있었다. 궁녀들로 구성된 내명부를 이끄는 것은 물론이고, 신하들의 부인으로 구성된 외명부를 이끌었다. 그뿐 아니었다. 왕이 도성을 비우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는 임시로나마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그에 더해, 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면, 새로운 왕을 결정할 권한도 있었다. 대통령 부인의 취임식은 없어도 왕후의 책봉식은 있었던 것은, 왕후가 갖는 그 같은 독자적 위상 때문이었다.
 
정조 사후에 임금은 나이가 어린 반면, 전직 왕후인 정순왕후는 대비로서 정권을 운영할 능력이 있었다. 그런 정순왕후의 일족이라는 지위를 발판으로 경주 김씨는 세도정치시대의 첫 번째 집권당이 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03년, 순조는 만 13세 나이로 친정 체제에 돌입했다. 이로써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경주 김씨의 세도는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런데 형식상으로는 순조가 직접 정치를 하게 됐다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순조에게는 김조순이라는 장인이 있었다. 김조순은 순원왕후의 아버지다.
 
사돈인 정조로부터 순조를 부탁받은 김조순은 정조의 유지를 앞세워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를 개시했다. 순조의 친정으로 경주 김씨가 힘을 잃은 틈을 타서 그 유명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첫 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배우 손병호가 연기하는 <간택> 속의 안동 김씨가 권력을 갖게 된 계기는 그것이었다. 경주 김씨가 그랬던 것처럼 안동 김씨 역시 왕후를 배출했다는 점을 근거로 이 시대의 집권당이 됐던 것이다.
 
왕실과의 결혼을 명분으로 집권당이 된 집안
 
 조흥견.

조흥견. ⓒ TV조선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그로부터 24년간 이어지다가, 1827년에는 새로운 집안이 세도정치 가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간택>에서 배우 이재용이 연기하는 풍양 조씨 가문이 바로 이때 등장했다. 이 집안 역시 왕실과의 혼인을 배경으로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1827년이면 순조가 아직 살아 있을 때다. 순조는 1834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풍양 조씨가 세도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 권한을 부여했고 효명세자의 처가가 바로 풍양 조씨였기 때문이다. 이 집안 역시 왕실과의 결혼을 명분으로 집권당이 됐던 것이다.
 
그 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정권을 주고받는 양상이 이어졌다. 최초의 세도가문인 경주 김씨가 퇴장한 가운데, 후발주자 2곳이 이 시대를 주도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다가 1849년에 안동 김씨가 '강화 도령' 철종을 옹립한 뒤로는 안동 김씨의 시대가 계속 이어졌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아들 고종을 앞세워 왕권 강화를 추진하기 전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됐던 것이다.
 
세도정치시대에 조선왕조의 시스템은 허약해지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까지 쌓여만 갔다. 이토록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에 정권 획득의 키워드는 뜻밖에도 '혼인'이란 단어였다. 권력투쟁과 거리가 있는 '결혼'이라는 뜻밖의 단어가 이 시대의 권력장악 수단이 됐던 것이다. 시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가 이 시대의 권력 장악을 설명하는 단어가 됐던 것이다.
 
역사 속의 혼란스럽던 시대에는 창검으로 대표되는 군사력을 동원해 권력을 잡는 일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의 왕명을 빌려 정적들에게 사약을 먹이는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하는 일도 많았다.
 
창검이나 사약이 권력투쟁 수단으로 부각되던 시기와 비교할 때, 세도정치시대에는 왕실과의 혼인이 정권을 잡는 주된 도구로 활용됐다.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거나 그런 관계를 이용할 역량이 있는 가문들이 이 시대의 주역이 됐다.
 
창검이나 사약을 활용해 정권을 잡을 구상을 하던 여타 시기의 정치집단들과 달리, 이 시대의 가문들은 어떻게 하면 혼인관계를 활용할 수 있을까 하면서 열심히 두뇌를 가동했다.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혼란한 이미지와 비교한다면, 이 시대의 정권 장악 수단은 상당히 낭만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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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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