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풍남문 현재 남은 전주성의 흔적 중 하나인 풍남문. 한옥마을·경기전·전동성당 인근에 위치해 있다.
▲ 풍남문 현재 남은 전주성의 흔적 중 하나인 풍남문. 한옥마을·경기전·전동성당 인근에 위치해 있다.
ⓒ 이준혁

관련사진보기

지휘부는 이날 오후 전주 부민들을 관아에 모아놓고 일장의 지침을 내렸다.

"우리는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자들이라 백성과 국가를 위하여 노력함이요, 결코 타의가 없으니 동포들은 각기 안심하라."라고 위무한 다음, 관리들에게는, "비록 관리라도 죄 없는 자는 논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죄가 있다하더라도, 전과를 뉘우치고 의거에 합종(合從)하는 자는 특별히 용서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어서 방문을 남문에 게시하여 수구파 정부와 초토사 홍계훈의 죄를 물었다.

방문

방금의 사세(事勢)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다. 웅병 맹장은 각각 그 믿는 땅에 있고 각군(郡)의 재사(才士)는 그를 먼 곳에 보내어 근왕(勤王)의 일을 한다. 대저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형편으로 말하면, 집권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인데 주야로 하는 일이란 오로지 자기의 배만 부르게 하는 일이고, 자기의 당, 자기의 파 만을 각 읍에 널리 보내어 백성 해치기를 일삼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찌 이를 감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토사 홍계훈은 본래가 무식한 사람이라, 동학의 위세를 두려워하면서도 부득이 출병하였다. 망령되게도 공이 있는 김시풍을 죽이고 이것으로 공을 삼으려 하니 홍계훈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 죽을 것이다. 가장 가석한 일은 3년 이내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므로 우리 동학이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함이니라.

갑오 4월 27일 (주석 13)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 SBS

관련사진보기

 
지휘부가 〈방문〉에서 '러시아 귀속' 운운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홍계훈은 황룡촌 전투의 패전소식에도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4월 25일에야 영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27일 금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농민군에게 처형당한 선전관 이주호, 종사관 이효응 · 배은환 등의 시체를 수습하고,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근처에 진출한 것을 알면서도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금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홍계훈이 28일 전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동학농민군이 전날에 성을 점령한 뒤였다. 홍계훈은 1,500명의 병졸을 지휘하여 전주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완산에 포진하였다. 농민군도 이런 정황을 알고 전열을 갖추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양측은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3일 동안이나 대치하였다.

한편 전주성의 탈환을 앞두고 홍계훈은 민심을 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위무책을 썼다. 5월 초에 발표한 농민군 군사들에게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효유문(曉諭文)」도 그 중의 하나였지만, 농민군은 이를 우습게 받아들였다.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 전주역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효유문

슬프다. 너희들은 모두가 국가의 적자(赤子)이나 전명숙(全明叔)의 거짓되고 음험한 말에 무혹되어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죄과에 빠짐을 알지 못했으니 슬프고도 슬프도다. 너희들의 그 동안의 정상만 하더라도 주살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심지어 윤음(綸音)을 가지고 간 관원을 멋대로 살해하여 스스로 부도(不道)한 난적이 되었으니 일이 이에 미치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것이다.

너희들이 이제라도 뉘우치고 귀순하여 척사위정한다면 이는 이른바 "사람이 뉘라서 허물이 없으리요 고치는 것이 선이다"는 말에 합치되는 것이며 "협종한 자는 벌하지 말라"는 유훈(維訓)도 있으니 너희들이 능히 위기를 함출하여 전명숙을 원문(轅門)에 묶어와 왕법(王法)을 바르게 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계문(啓聞)하여 상상(上賞)으로 시행하고 특히 공로를 참작하여 속죄를 표시하겠다는 뜻으로 이미 여러번 유시했건만 아직껏 소식이 없으니 더욱 분원한 일이다.

만약 일향자감(一向自感)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이 애석할 것이 있으리오. 모두 진멸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지실하라. (주석 14)


3일 동안이나 대치하고 있던 관군은 5월 1일 날이 밝자 성내를 향해 야포를 쏘아댔다.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농민군도 즉각 대응하여 전주성 점령 이래 공수가 뒤바뀐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5월 2일과 3일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농민군은 관군이 쏘아대는 "탄환을 피하기 위해서 등에다 황색종이에 붉은 글자로 주문을 쓴 부적을 붙인 채, 입으로는 탄환을 제거하는 주문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을 높이 외치면서 빗발치는 탄환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관군은 신예의 화력으로 이를 맞았고, 내려다보며 총격했다." (주석 15)


주석
13> 『나라사랑』, 제15집.
14> 황현, 『동학란』, 155쪽.
15> 신복룡, 앞의 책, 14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일본군 앞잡이 관군의 만행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