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당시 농민군이 사용하여 관군을 놀라게 하고, 전세에 크게 영향을 미친 '장태'에 대해 알아본다.

농민군은 장태를 앞세우고 관군에게 돌진했다. 장태는 청죽(靑竹)을 얽어 만든 것으로 그 밑에 차바퀴를 달았다. 그 속에 사람이 앉아 총을 쏘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그 둘레가 열 아름쯤 되고 길이가 열 발쯤 되었다고 한다. 광산(光山) 접주 이춘영의 손자 이찬종과 이현종의 증언에 따르면, 장태의 크기는 길이가 11~12자였고 높이가 4.5자였다고 한다.

그들의 아버지 이규익(李圭益 : 1898~1973)은 장태는 방탄용으로 당시 죽세공 기술자들이 황룡촌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임곡(臨谷)의 가정부락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서 7, 8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장태는 대를 쪼개 원통을 만들고 그 안에 볏짚을 채워 넣은 일종의 방탄차였다. 황현은 "큰 죽룡(竹龍)이 몰려오는데, 크고 둥글며 닭우리처럼 생긴 것이 수십 개다.

게다가 밖에는 칼을 꽂아서 마치 고슴도치와 같고 아래는 두 바퀴를 달아서 굴러서 몰려온다. 관군이 연환과 시석을 쏘았으나 죽룡이 모두 막아주고 적은 그 뒤를 따라 포를 몰면서 몰려온다."는 기록도 있으나, 바퀴가 달렸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다.

장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기록이 일정하지 않다. 오지영은 장흥 접주 이방언이 장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장태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최현식의 주장에 따르면, 장태를 만든 사람은 이방언이 아니라 담양의 이용길(1857~?)인데 그는 월평 싸움에서 장태를 만들어 이장태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이찬종의 증언에 따르면, 장태를 만든 사람은 그곳의 죽세공이었던 김남수라고 하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월평 삼봉에서 관군이 연환과 시석을 쏘았으나 모두 죽롱이 막아내고 농민군은 그 뒤를 따라 포를 쏘면서 몰려왔다. 초토사의 대영(大營)에서도 멀리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할 수가 없어서 제 마음대로 달아나게 내버려두니 농민은 쫓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퇴각했다. 이날 죽은 관군의 수가 7명이요 대환포 2문을 빼앗겼다.

농민군 가운데는 대환포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아 이들을 끌어 모아 무덤 17개를 만들어 하나에 시체 4, 5구씩을 묻었다. 농민군은 다시 월평으로 들어가 마을 가득히 깃대를 세우고 밥을 지으려 하다가 경군이 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나팔소리 한 번 나더니 군사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가는데 말탄 자가 200여 명이었다. (주석 6)

 
동학혁명 최초로 경군과 싸워 승리한 황룡 전투 승전기념탑
▲ 황룡전투승전탑 동학혁명 최초로 경군과 싸워 승리한 황룡 전투 승전기념탑
ⓒ 고광춘

관련사진보기

 
동학농민군은 황룡촌 전투에서도 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관군지휘자가 공명심에 들떠서 전열이 갖춰지기도 전에 대포를 쏘는 등 서두르다가 농민군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농민군도 40~50명이 사망하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전과는 승리한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동학농민군은 대관 이학승을 죽이고, 야포 2문과 양총 1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황룡 전투와 관련하여 관변의 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출전장병이 당황하며 달려와 말하기를 관군이 장성 월평에 닿았을 때 그들 무리(동학군)가 마침 황룡촌에 이르러 서로 접전하며 '구드프포' 한 방을 쏘니 그들에게 맞아 죽은 자가 가히 수백이라. 그들 1만여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격해와 30리 지경까지 추격해 왔다. 그들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피곤하여 자빠지며 창황히 본진으로 돌아왔으나 대관 이학승은 칼을 휘두르며 뒤에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더불어 그들에게 죽었다. 그리고 '구드프포' 1좌와 '회선포' 및 탄환을 잃었다. (주석 7)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 SBS

관련사진보기

 
농민군과 전투에서 거듭 패배한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면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오도록 건의하였다. (청군의 원군요청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쓰겠다)

홍계훈의 증원 요청을 받은 정부에서는 16일 강화도에 주둔한 수비병을 전라도에 파견키로 하는 한편 김문현을 전라감사에서 파면하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후임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진을 계속하던 동학농민군은 방향을 바꾸어 25일 정읍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한번 관아를 점거한 뒤 태인→금구를 거쳐 26일에는 전주성 인근인 삼천(三川)에 도착하여 포진하였다.

농민군은 북상하던 중 태인 원평리에서 경군을 위문하기 위해 내탕금 1만냥을 갖고 왕명을 받고 내려온 선전관 이주호와 부하 2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전날 왕의 윤음을 전달하러 왔던 초토사 종사관 이효응, 배은환과 함께 이들을 원평 장터에서 참수하였다.

연전연패의 소식에 놀란 정부에서는 4월 27일 이원회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임명하고, 홍계훈의 군대를 통제할 권한과 강화ㆍ청주지역의 군사를 호남에 파견하면서 이들의 지휘권을 이원회에게 주었다. 이후 이원회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주석
6> 신복룡, 앞의 책, 141~142쪽.
7> 『동학란기록(上)』· 양호초토록, 최현식, 앞의 책,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장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