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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백산창의비.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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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에서 백산(白山)으로 이동한 동학군은 대오를 편성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후 4월 3일(음) 1대를 부안현 부안역(驛)으로, 다른 1대를 태인현 인곡 북촌 용산으로 진주시켰다.

이곳에서 1박한 동학농민군의 1대는 익일인 4월 4일(음) 금구현 원평으로 진출하여 이곳 봉기군과 합류한 후 금구현 관아를 습격하고 현감을 결박하여 이곳 무기를 접수하였다.

한편 다른 1대는 부안현 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이철화를 결박하고 무기고를 파괴한 후 이곳 무기와 전곡을 접수하였다.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 등 지도부가 인솔하였다.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바로 옆에 '피체지 표석'을 건립하고, 10월 29일 추모제 때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위 사진은 피체지 표석 건립공사 후 제를 지내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1895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된 관군 순무영 보고서 안에서 태안 백화산에서 동학농민군 다수가 체포된 사실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피체지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 피체지 표석 건립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바로 옆에 "피체지 표석"을 건립하고, 10월 29일 추모제 때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위 사진은 피체지 표석 건립공사 후 제를 지내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1895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된 관군 순무영 보고서 안에서 태안 백화산에서 동학농민군 다수가 체포된 사실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피체지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 문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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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지도부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태인ㆍ금구를 거쳐 곧 전주로 공격해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전주 영병(營兵)이 출동한다는 정보를 듣고 금구ㆍ부안에서 다시 고부로 돌아와 고부군 도교산에 둔진하였다.

이에 앞서 금구ㆍ부안을 점령한 이들은 2통의 통문을 법성포 등지에 발송하여 농민군 봉기의 목적을 다시 천명하였다. 즉 전운사 조필영의 횡포, 균전사 김창석의 불법 수탈, 일본 밀무역상들에 의한 미곡 매점에 따른 미가(米價)의 상승, 지방관의 백지(白地) 및 개간지의 과세 등 전라도 일대의 민폐를 바로잡고 위로는 국가를 도우며 아래로는 빈사의 민생을 건지는 것이 죽음을 맹세하고 무기를 든 목적이라고 설명하였다. (주석 1)

 
모의탑에 새겨넣은 사발통문 형태. 네모 안에 써진 것이 전봉준의 이름이다.
 모의탑에 새겨넣은 사발통문 형태. 네모 안에 써진 것이 전봉준의 이름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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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지도부는 황토현 전투를 앞두고 몇 차례 사발통문과 밀서 형식의 통문을 돌려서 혁명의 의지를 거듭 천명하였다.

동학농민군 통문

성명(聖明)이 위에 있고 생민이 도탄이니 누가 민폐의 근본인고. 이는 포흠질하는 관리로 말미암은 것이니, 포흠질하는 관리의 근본은 탐관(貪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탐관의 소기(所紀)는 집권의 탐람(貪婪)에 있다. 오호라, 난(亂)이 극한 즉 다스려지고 흐린 즉 바뀌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지금 우리들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이 마당에 어찌 이서(吏胥)와 민인(民人)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 근본을 캐면 이서 역시 백성이니 각 공문부(公文簿)의 이포(吏逋 : 관리들의 포흠질)는 민막(民瘼 : 백성에 대한 병폐)의 조건이므로 몰수하여 와서 보고하라. 또한 시각을 어기지 말기를 특별히 명심하라. (주석 2)

 
이곳이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팻말을 누군가 세워두었습니다.
▲ 교룡산성 성벽 이곳이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팻말을 누군가 세워두었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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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 (1)

1. 전운영(転運營)이 이서와 백성에게 미치는 폐해를 혁파할 것.
2. 균전관(均田官)의 폐해를 혁파할 것.
3. 각 시정(市井)에서 분전수세(分錢收稅)를 혁파할 것.
4. 각 포구에서 선주(船主)의 늑탈을 혁파할 것.
5. 다른 나라 참상(濳商)의 준가역미(貿米)를 금지할 것.
6. 염전에 대한 징세를 중지할 것.
7. 각종 물품의 도가취리(都價取利)를 금지할 것.
8. 백지징세(白地徵稅)의 폐단을 혁파할 것.
9. 와환(臥還)은 발본하여 시행하지 말 것. (주석 3)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봉기를 일으켰던 대뫼마을 동학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봉준 장군의 절명시
▲ 전봉준 장군의 절명시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봉기를 일으켰던 대뫼마을 동학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봉준 장군의 절명시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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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은 접전을 앞두고 농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위하여 여러 가지 홍보전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여건상 사발통문을 통해 알리는 방법이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두 번째 공포한 통문이다.

통문 (2)

오늘 우리의 의거는 위로는 종사를 보호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이니, 놀라지 말고 차례로 우두머리들은 와서 회개할지어다.

전운영이 이민들에게 끼치는 폐단과 균전관의 거폐생폐(去弊生弊)와 각 시정의 분전회수와 각 포구의 선주늑탈과 타국 밀무역상들의 무역과 소금의 시장세와 각종 물건의 도매상의 폭리와 백지징세와 송전기진(松田起陳)과 고리대의 발본 등 많은 폐악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우리 사농공상의 사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동심협력하여 위로는 국가를 돕고 아래로는 빈사의 민생을 편안케 하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주석 4)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충천했지만 막상 무기는 형편없이 열악하여 화승총과 칼ㆍ죽창이 전부였다. 반면에 관군은 나름대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또 보부상을 풀어 정보를 취하고 있어서 농민군의 무장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황토현에서 승전한 동학농민군지도부는 전투에 앞서 다시 한번 전의를 다지고 기의(起義)하게 된 이유를 방문(榜文)을 통해 밝혔다.
 
백산성에 있는 동학정
▲ 백산성에 있는 동학정 백산성에 있는 동학정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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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방문(榜文)

방금의 사세(事勢)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다. 웅병 맹장은 각각 그 믿는 땅에 있고 각 군(郡)의 재사는 그를 먼 곳에 보내어 근왕(勤王)의 일을 한다. 대저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형편으로 말하면, 집권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인데, 주야로 하는 일이란 오로지 자기의 배만 부르게 하는 일이고, 자기의 당, 자기의 파만을 각 읍에 널리 보내어 백성 해치기를 일삼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찌 이를 감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토사 홍계훈은 본래가 무식한 사람이라, 동학의 위세를 두려워하면서도 부득이 출병하였다. 망령되이도 공이 있는 김시풍을 죽이고 이것으로 공을 삼으려 하니 홍계훈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 죽을 것이다. 가장 가석한 일은 3년 이내에 우리 나라가 귀속될 것이므로 우리 동학이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함이니라. (주석 5)

갑오 4월 27일


주석
1> 김의환, 『전봉준전기』, 84~85쪽, 정음사, 1974.
2> 『비서류찬(秘書類纂)』 중권, 「동학당휘보」, 갑오 4월초 4일자.
3> 『일본공사관기록』, 1894. 1895년, 전라도 민요보고(民擾報告), 「동학당휘보」.
4> 박은식,『한국통사』, 제26장, 「갑오동학지란」.
5> 『나라사랑』, 제15집, 12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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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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