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학에서 공부하다 보면, 여러 가지 담론들을 접하게 되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도 보게 된다. 그 중에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뜨거운 담론을 하나 꼽자면 페미니즘이 있겠다. 대학가에서는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그에 대항하는 백래시(backlash) 또한 만만치 않다. 총여학생회에 대한 부당한 공격부터 교수들의 혐오발언 등, 다양한 문제가 터져 나오는 이곳에서는 더더욱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이상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는 말 한마디면 정말로 차별은 없어진 것 같고 그래서 페미니즘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문제는 이런 말들이 개개인의 왜곡된 사고방식에 그치면 그나마 괜찮은데, 하나의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의 여성혐오, 한국과 닮았네
 
<여성혐오의 시대> 책 표지. 크리스틴 앤더슨 지음.
 <여성혐오의 시대> 책 표지. 크리스틴 앤더슨 지음.
ⓒ 나름북스

관련사진보기

 

이런 현상을 이르는 표현 중에 하나로는 포스트 페미니즘(Post-feminism)이 있다. 요컨대, 페미니즘이 사회변화를 위해 필요한 시점이 있었고, 이제는 성평등이 달성되었으므로 더 이상 페미니즘은 필요하지 않다는 관점이다. 휴스턴-다운타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크리스틴 J. 앤더슨은 지난 10월 한국 출간된 <여성혐오의 시대>에서 포스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혐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사회 현상을 면밀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멀리 갈 것 없이 포스트 페미니즘의 주요 주장은 '남성 역차별론'이다. 페미니즘이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한 결과 이제 남성이 차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남성 역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나온 지는 꽤 오래됐다. 
 
2005년, 미국 국방부는 여성 병사들이 남성 병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수백 건의 성폭행 신고를 다루기 위해 피해자 지원 부서를 신설했다. 안티 페미니스트이자 안티 게이 로비 그룹인 군사 준비태세 센터의 회장 일레인 도넬리는 "남자 까기 부서"가 생겼다며 이 조치를 비난했다. 도넬리는 강간과 추행을 조사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부서가 "남성 혐오 이데올로기를 공부한 '여성학' 전공자의 새로운 직장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다. 여성을 보호하고자 만든 장치들이 남성을 혐오하고 차별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공포는 무의식중에 사회에 스며든다. 이런 편견에 더해 안티 페미니즘은 성소수자를 타겟팅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남성을 근거없이 '혐오'하기 때문에 그들은 레즈비언일 가능성이 높다는 모함이 대표적이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면 레즈비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모함하는 것은 공포를 조장하는 전술이다.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운동에 연루되는 것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다. (중략) 예를 들어 성폭력과 강간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은 종종 레즈비언 사냥의 표적이 된다. 레즈비언임을 모욕과 멸시로 사용하면서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을 동일시하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들 상스럽고 여성적이지 않은 성난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모두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의 목표를 매력적이지 않은 것, 거부감을 주는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당연히, 페미니즘은 유익하다 
 
페미니즘은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차별이 존재하는 이상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차별이 존재하는 이상 필요하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포스트 페미니즘은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의 문제를 지워버린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82년 김지영>에 대한 부당한 평가가 있겠다. "82년생이 무슨 차별을 그렇게 많이 받는다는 거냐", "그야말로 망상이다" 등등. 저자 크리스틴 앤더슨의 표현을 빌리면, 포스트 페미니즘은 "여성이 부당한 일을 겪는 개별 사례가 있을 뿐"이고, 따라서 "여성은 어떤 차별도 당하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페미니즘의 구호인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 "여자에겐 왕자님이 필요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는 가끔 포스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악용되기도 한다. 차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왕자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응수하는 식이다. 달성할 필요가 있는 당위를 말하는 구호 앞에 이미 그러한 현실이 왔다고 전제하는 것은 차별을 은폐하게 된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강조하는 안티 페미니즘의 담론은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무엇이 될지는 그녀에게 달렸고 역사와는 관계가 없으며 앞선 세대들의 투쟁과 사회 운동은 그녀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중략) 이런 종류의 페미니즘은 남성 지배, 남성 권력, 남성의 특권 문제를 다루지 않고, 페미니즘을 단순한 라이프 스타일로, 사회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제시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미 다양한 의제를 포괄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고, 이미 존재하는 차별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더 나은 도구가 무엇인지 각자 생각이 다를 것이지만, 여전히 페미니즘은 필요하다는 저자의 시선에 매우 동감한다. 당연히,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여성학 및 젠더 수업 강좌를 개설하는 학교들의 페미니즘 운동도 여성에게 특권과 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인 틀을 제공한다. 여성학 및 젠더 수업들은 이를 수강하는 여성과 남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수업들을 수강한 여학생과 남학생 모두 주체성, 자기 결정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통제 능력이 증가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중략) 페미니스트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여성은 세상을, 특히 그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의 경험을 이해할 인지적 틀을 얻을 수 있다.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경험할 수도 있는 성차별을 부당한 것, 여성이라서 겪는 것으로 이해할 도구를 갖고 있다. 페미니스트는 성차별의 원인을 사회와 젠더 억압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성차별적 대우를 당할 때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더 적게 한다.

여성혐오의 시대 -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모함에 관하여

크리스틴 J. 앤더슨 (지은이), 김청아, 이덕균 (옮긴이), 나름북스(2019)


태그:##여성혐오의시대, ##포스트페미니즘, ##안티페미니즘, ##여성혐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꾸준히 읽고 보고 쓰고 있습니다. 활동가이면서 활동을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