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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지리산이다. 품이 넓고 깊은 어머니 산이다. 2016년 봄, 굴뚝여행을 지리산 서쪽자락에서 시작하였다. 이제 마지막이다. 어머니 품에 안기듯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지리산 동쪽자락, 함양 개평마을과 산청 남사마을이다.
 
개평마을 정경 평촌천은 마을 집들을 들락거리며 마을을 굽어 흐르고 천변을 에두른 언덕에 줄잡아 300년은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다. 마을은 그 곁에 있다. 천상(天賞)을 받은 마을이다.
▲ 개평마을 정경 평촌천은 마을 집들을 들락거리며 마을을 굽어 흐르고 천변을 에두른 언덕에 줄잡아 300년은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다. 마을은 그 곁에 있다. 천상(天賞)을 받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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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

남덕유산 자락 함양 땅에 지리산 정기 받고 한 마을이 들어섰다. 개평마을이다. 어머니 젖줄처럼 두 물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고 돌아나간다. 동쪽 물은 지곡천, 서쪽 물은 평촌천이다. 마을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두 개울 사이에 낀(介) 마을이라 개평(介坪)이라 하였다. 두 냇물은 마을 어귀 방앗간에서 만나 남계천에 닿고 산청, 진주, 의령을 거쳐 낙동강 큰물이 된다.

마을 한가운데, 일두고택 자리에서 한 거물이 태어났다.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이다. 뼈대 있는 고장으로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는데 함양의 뼈대는 정여창에서 비롯된 것이다. 졸졸대던 마을 두 물이 낙동강 큰물 되듯 정여창은 함양의 큰 인물이 되었다.

정여창의 본관은 하동이다.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가 고향인 함양 개평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하동정씨의 함양시대가 열렸다. 정복주(1367-?), 정육을(?-1467), 정여창으로 대가 이어져 하동정씨는 개평마을에 세거하는 주요 성씨가 되었다. 15세기에 풍천노씨 송재 노숙동(1403-1463)이 정여창의 고모집 사위가 되어 창원에서 개평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이후 마을에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두 집안사람이 어울려 살고 있다.

개평마을 옛집들

두 집안은 마을에 흔적을 남겼다. 정씨집안 집으로 마을 한가운데 일두고택이 중심을 잡았고 그 위에 하동정씨고가와 오담고택이 자리 잡았다. 노씨집안 집으로 마을 아래쪽에 노참판댁이, 그 위에 풍천노씨대종가가 있다.
  
하동정씨고가 안채옆면 안채는 1644년에 지어진 것이다. 맞배지붕의 삼각형과 보와 기둥이 교차하여 생긴 네모, 부섭지붕까지 건축으로 그림을 그리려한 것 같다.
▲ 하동정씨고가 안채옆면 안채는 1644년에 지어진 것이다. 맞배지붕의 삼각형과 보와 기둥이 교차하여 생긴 네모, 부섭지붕까지 건축으로 그림을 그리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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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담고택 안채와 굴뚝  일두고택에서 분가하여 사랑채는 1838년, 안채는 1840년에 지은 집이다. 조선후기 집답게 굴뚝은 크게 만들었다.
▲ 오담고택 안채와 굴뚝  일두고택에서 분가하여 사랑채는 1838년, 안채는 1840년에 지은 집이다. 조선후기 집답게 굴뚝은 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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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800년대 이후 중건, 중수된 집으로 조선 후기 남부지방 상류주택의 전형을 볼 수 있다. 특히 하동정씨고가 안채의 맞배지붕과 부섭지붕은 볼 만하다. 대체로 굴뚝모양이 조선후기로 오면서 점차 커지고 화려해지는데 오담고택 굴뚝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마을 옛집은 돌담이 잇는다. 간혹 새로 쌓은 흙돌담이 섞여있으나 원래 담은 돌담이다. 예전에 쌓은 돌담은 아래 부분이 불룩한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아랫배가 축 처진 까무잡잡한 돌담이지만 고향집을 묵묵히 지키는 듬직한 장남 같아 어여삐 보인다.
 
개평마을 돌담 흙돌담이 있기는 하나 마을담은 돌담이 대세다. 돌담은 곱게 늙어가고 있다.
▲ 개평마을 돌담 흙돌담이 있기는 하나 마을담은 돌담이 대세다. 돌담은 곱게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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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

고샅마다 게으른 겨울 햇살이 눈부시다. 일두고택의 골목길에 접어들자 눈이 편안해 졌다. 고샅에 가득 박힌 박석(薄石)이 비스듬한 겨울햇살을 받아낸 것이다. 일두의 대문은 고샅 모퉁이에 숨어 있다. 일부러 담을 쌓아 외부의 시선을 돌린 것이다.
  
일두고택 박석길 이 길 끝에 한 굽이 돌아 일두고택이 있다. 박석을 깔아 질퍽거리지 않고 비스듬히 비추는 겨울 햇살을 분산시켜 눈이 덜 부시다.
▲ 일두고택 박석길 이 길 끝에 한 굽이 돌아 일두고택이 있다. 박석을 깔아 질퍽거리지 않고 비스듬히 비추는 겨울 햇살을 분산시켜 눈이 덜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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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 대문 마을 큰 길에서 바로 보이지 않게 길을 한번 꺾어 놓았다. 솟을대문 안 다섯 개 정려패가 범상치 않다.
▲ 일두고택 대문 마을 큰 길에서 바로 보이지 않게 길을 한번 꺾어 놓았다. 솟을대문 안 다섯 개 정려패가 범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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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위에 붉은 정려편액이 훈장처럼 달려있다. 모두 다섯 개. 네 개는 효자, 하나는 충신 정려패다. 맨 위쪽이 정여창의 할아버지 정복주가 받은 것이고 나머지는 정여창 후손이 받은 것이다. 선조의 효심과 충심이 후손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일두고택은 정여창 사후에 지은 집이다. 안채는 300년 되었고 대부분 조선후기에 중건한 것이다. 사랑채, 안채, 곳간, 사당, 안사랑채, 별당 영역을 담으로 구획하고 각 영역을 샛문과 중문을 통해 드나들게 하였다. 영역을 오가는 경로를 복잡하게 하여 집터는 더 넓어 보인다. 집구조로 볼 때 튼튼한 가세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집이다.

일두의 집안은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관료로 있었고 아버지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사망하여 그 대가로 국가포상을 받았다. 여기에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의 외가 재산이 더해져 함양의 사방 이웃 백성들이 곡식을 꾸어갈 정도로 부자였다.

일두고택 영역과 굴뚝

사랑채는 잘 생겼다. 곱게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사랑채에 달린 매서운 '충효절의(忠孝節義)' 글자는 정려패에 대한 집주인의 묵직한 다짐으로 보인다. 사랑마당 한편에 석가산을 만들어 이상세계를 꿈꿨다.
  
일두고택 사랑마당  대문 밖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생긴 사랑채가 서있고 한편에 석가산이 있다.
▲ 일두고택 사랑마당  대문 밖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생긴 사랑채가 서있고 한편에 석가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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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마당에서 일각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에 딸린 중문간채. 토방에 걸쳐 놓은 엉성한 돌계단은 집주인의 속마음이다. 정형적인 사랑채의 지루함을 덜었다. 마루 한쪽에 마련한 통나무 통은 오줌통이다. 그 앞에 있는 굴뚝모양이 요상하다. 예전에 널굴뚝이 이처럼 바뀐 것이다. 오줌 누는 아이의 발랄한 모습처럼 연구(煙口)를 튀어나오게 하여 익살을 부렸다.

아래로 볼록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마당이다. 비스듬한 겨울 햇살은 마당 구석구석, 마루와 방문에 닿았다. 마당 구석에 있는 굴뚝은 지붕 처마를 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있다. 몸체는 암키와로 점선무늬를 내고 연가(煙家)는 연화문(蓮花紋) 암막새로 맵시 나게 꾸몄다.
  
중문간채 굴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연구(煙口)를 길게 빼 마치 오줌 누는 아이처럼 만들었다. 옆에 있는 오줌통이 그렇게 생각하게 했는지 모른다.
▲ 중문간채 굴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연구(煙口)를 길게 빼 마치 오줌 누는 아이처럼 만들었다. 옆에 있는 오줌통이 그렇게 생각하게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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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 굴뚝은 대체적으로 모두 낮다. 낮은 굴뚝은 바깥사람들에 대한 배려고 자신은 겸양과 겸허의 자세를 다지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여창의 호는 일두, 한 마리 좀이라는 뜻이다. 물론 좀이 의복이나 책을 갉아먹는 벌레이니 책벌레라는 뜻이겠지만 내 귀에는 자신을 낮추고 낮춘 자기 비하, '자학적' 겸허로 들린다.
  
 안채 굴뚝  균형 잘 잡힌 맵시 있는 몸매에 반듯하고 중후한 멋까지 있다.
▲ 안채 굴뚝  균형 잘 잡힌 맵시 있는 몸매에 반듯하고 중후한 멋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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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동쪽 굴뚝  공예적인 면은 모두 생략한 담백한 굴뚝이다. 이 굴뚝의 매력은 연기구멍에 시커멓게 묻은 검댕이다. 아직 이 굴뚝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 사랑채 동쪽 굴뚝  공예적인 면은 모두 생략한 담백한 굴뚝이다. 이 굴뚝의 매력은 연기구멍에 시커멓게 묻은 검댕이다. 아직 이 굴뚝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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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와 어울리는 상징물이 있다. 사랑채 동쪽의 낮은 굴뚝이다. 마루 밑에 숨어 있다. 최소한의 기능 요소만 남기고 장식이나 겉치레는 모두 생략했다. 검댕을 뒤집어쓰고 꾸미지 않은 수더분한 굴뚝이지만 내 눈에는 아주 매혹적으로 보인다. 생기 넘치는 살아있는 굴뚝이기 때문이다.

눌재고택과 솔송주

일두고택 앞집은 눌재고택이다. 일두만은 못해도 눌재(訥齋) 또한 겸손의 뜻이 담겼다. 눌재는 일두의 13세손으로 제천현감을 지낸 눌재 정재범이다. 눌재고택 뒤편에 솔송주문화관이 딸려있다. 솔송주는 500년 전부터 이 집안에서 빚어온 가양주로 임금에게도 진상하였다.
  
솔송주 설 선물 성종대 진상품이던 솔송주는 이제 거꾸로 독립유공자등 국민에게 보내지는 선물품목이 되었다.
▲ 솔송주 설 선물 성종대 진상품이던 솔송주는 이제 거꾸로 독립유공자등 국민에게 보내지는 선물품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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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는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 올랐다. 이 맛이 그리웠는지 노무현대통령은 퇴임 후 여기에 들러 솔송주를 들었고 2016년 당시 문재인 대선후보는 이곳에 들러 '신선의 술'이라 하였다. 2018년에는 이낙연총리도 다녀간 적이 있다. 2019년에는 청와대 설 선물로 선정되었으며 최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담의 만찬장에 건배주로 올랐다.
  
눌재고택 화덕굴뚝 몸체 무늬와 생김새가 이웃집 일두고택 안채굴뚝을 많이 닮았다. 오래돼 보이지 않지만 솔송주 익어가듯 세월을 보내며 익어가고 있다.
▲ 눌재고택 화덕굴뚝 몸체 무늬와 생김새가 이웃집 일두고택 안채굴뚝을 많이 닮았다. 오래돼 보이지 않지만 솔송주 익어가듯 세월을 보내며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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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빚은 사랑마당 굴뚝이나 솔송주 빚는 화덕굴뚝이 눌재의 뜻을 이었다. 크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욕망이 컸겠지만 집안과 문중, 이웃의 집단적 가치를 생각해 일두고택 굴뚝 모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는 굴뚝이지만 솔송주 익듯 푹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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