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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지만 국민의 약 70%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적폐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험해보니 국가 적폐보다 마을(아파트) 적폐의 청산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4년간 아파트 회장을 하면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경험과 성취한 작은 성공의 이야기들을 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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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2017년 9월 동대표 선거의 막이 올랐다. 총 19개 선거구에 나를 포함해서 내가 섭외한 사람 11명, 적폐세력 쪽에서는 5명, 자발적 출마자 2명, 총 18명이 출마했다. 2개의 선거구만 2명이 출마했는데 거기에서는 적폐세력 쪽과 내가 섭외한 사람이 맞붙었고, 나머지는 다 단독후보였다. 특이한 것은 내가 섭외한 사람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이었는데 반해 적폐세력 쪽의 출마자 평균 연령은 70세가 넘는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선관위, 전자투표로 투표 방식을 바꾸다

투표는 전자투표로 이루어졌다. 적폐세력들과 한 몸이었던 과거 선관위원 전원이 상식적인 위원들로 교체되자마자 첫 번째로 한 결정이 투개표에 부정이 개입되기 쉬운 현장 투표를 폐지하고 전자투표를 도입한 것이다. 과거의 선거는 각 동 경비실에 기표소를 설치해놓고 선관위원들이 배치되어 치르는 방식이었다.

투표에 참여하는 입주민은 경비실을 방문하여 주민등록증을 선관위원에게 제출하고 선거인명부에 서명한 다음 선관위원이 나눠준 투표용지를 들고 기표소에 들어가 기표해 투표용지를 접어 투표함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부정이 저질러졌다.

대표적인 예가 투표 종료 시각이 임박해 선관위원이 선거인명부에 가짜로 서명한 후 투표용지에 기표하고 투표함에 집어넣는 일이다. 선거인명부에 서명된 수와 표의 수가 다르기도 했고, 선거인명부에 서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나중에 당사자에게 확인해보니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계획을 세워서 투명하게 진행하는 국가 선거와 달리, 기본적으로 아파트 선거는 감시와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투개표 부정이 흔하게 발생한다.

이런 문제 많은 투표 방식을 모바일투표로 변경하니 부정이 있을 수 없었다. 투표 종료 시간이 되면 핸드폰이 자동적으로 투표결과를 알려주기 때문에 개표도 불필요해졌다. 우리 아파트의 선거 부정은 이렇게 해서 바로잡을 수 있었다.

11:3:2

동대표 투표결과 나를 포함해서 내가 섭외한 사람 11명이 다 당선되었다. 적페세력과 경쟁한 2개의 선거구에서 우리 쪽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쪽 후보는 둘 다 30대 후반이었는데 반해 상대 후보는 70대 중반, 80대 초반이었다. 동대표에서 나이가 중요하다고 할 순 없지만, 투표 당시 우리 아파트엔 70세 넘은 사람이 동대표직을 맡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쪽 11명, 적폐세력 쪽 3명, 자발적 출마자 2명, 모두 16명으로 입주자대표회의가 구성되었다.

연이어 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사실 동대표 선거보다 회장 선거가 더 중요하다. 왜냐면 회장은 나라로 치면 국회의장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회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아파트 운영이 달라진다.

회장 후보는 2명으로 좁혀졌다. 우리 쪽에서는 내가 회장으로 나왔고, 적폐세력 쪽의 출마자는 나와 함께 동대표 활동을 했던 71세 된 목사였다. 첫 번째 회장 임기 초, 종교도 나와 같아 그가 나에게 당연히 우호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2년 내내 적폐세력에게 일조했다. 몸통과 그의 하수인들이 나에게 쌍욕을 하고 겁박하는 장면을 그렇게 많이 목격하고도 그들에게 보조를 맞추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와 내가 회장 선거에서 맞붙게 되었다.

최후의 발악

그런데 선거기간에 갑자기 적폐세력들이 나를 비방하는 감사보고서를 게시판에 붙여 놓는 게 아닌가. 감사보고서에는 내가 회장일 때 부정을 저질렀다는 허위사실이 적혀 있었다. 나를 떨어뜨리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보였다. 그만큼 나의 당선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적폐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관리직원들이 혼자 계신 어르신들을 방문해 상대편 후보에게 표를 던지도록 유도했다는 입주민들의 전언도 있었다.

상대 후보도 낮에 아파트 구석구석 다니며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 정자에 앉아있는 입주민들에게 찾아가서 말을 걸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고, 경로당을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자신의 공약을 설명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으며, 지나가는 입주민들에게도 회장 후보 누구라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직장에 출근해야 했던 나는 입주민들을 직접 찾아다닐 수가 없어서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작한 웹자보를 문자로 전달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다른 주민들에게도 웹자보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웹자보를 보고 직접 내게 전화하는 입주민들도 있었는데, 나는 친절하게 그동안 내가 당했던 괴로운 일들, 아파트의 현 실태, 그리고 회장으로서 나의 포부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선거 열기는 이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 남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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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회장에 당선되다

결과는 '당선'이었다. 투표 마감 일시인 2017년 9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정각에 핸드폰을 통해서 당선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총 571세대가 참여한 가운데 나에게 표를 던진 입주민이 367명, 나머지 203명은 상대 후보를 선택했다.

정말 기뻤다. 첫 번째 회장 선거는 말 그대로 얼떨결에, 회장이 뭔지도 모르고 참여했다면, 두 번째 회장 선거는 회장이 되어야 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더더욱 기뻤던 것은 두 명의 감사도 내가 섭외한 사람들이 모두 당선된 것이다. 감사직 선거에도 적폐세력 쪽에서 73세 된 동대표를 후보로 내보냈지만, 그는 입주민들에게 선택받지 못했다. 아파트의 선출직 임원 모두 내가 섭외한 사람이 당선된 것이다.

지난 2년 동안의 모욕과 고통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눈물이 났다. 선거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많은 입주민들이 하나같이 이런 말을 했다. 아파트 회의 시간에 남기업이 혼자 속절없이 당하는 걸 보고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고, 그래서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장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나만 이렇게 당하는 건가,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대한민국에 나처럼 고생하는 동대표와 회장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때는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대부분 죽도록 고생만 하고 아무 결실도 없이 막을 내리는 일이 허다했다. 급기야는 병을 얻거나 집을 팔고 이사 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만큼 나의 사례는 많은 입주자들이 지지해주고 동참해주었기에 가능했다.

개혁의 시동을 걸다

2017년 10월 23일 두 번째 회장이 되어서 첫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 내용과 분위기는 첫 번째 회장일 때와는 전혀 달랐다. 토론의 질이 높아지고 질문하는 수준도 차이가 났다.

첫 번째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3명의 이사를 뽑는 일이다. 총무이사, 환경이사, 기술이사 3명을 호선으로 뽑는 일인데, 적폐세력 중 한 명이 기술이사가 되겠다고 자천했지만, 아파트 공사에 전문성이 있는 내가 섭외한 동대표가 기술이사로 선출되었다. 이사 3명도 상식적인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출마해서 당선된 2명의 동대표들도 첫 번째 회의 이후에 자연스럽게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대표 총 16명 중에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대표가 11명에서 13명으로 늘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개혁을 해나갈 수 있는 조건이 완비된 것이다. 첫 번째 회장 임기 2년 동안 내가 한 일은 저들이 하려는 이상한 공사 중에 절차적 오류가 있는 몇 개를 막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 말이다. 반면에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하나도 진행할 수 없었다. 저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태그:#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 #아파트 비리, #아파트 민주주의, #마을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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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전 국민 주거권과 토지공개념 실현, 토지보유세를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인 토지배당제를 위한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땅에서 온 기본소득, 토지배당》(2023, 공저), 《아파트 민주주의》(2020),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2018, 공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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