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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 김개남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와 일제의 침략에 맞선 농민혁명 봉기다.

2019년은 동학사상을 연구하는 이들과 동학정신을 이어온 민중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5년만인 지난 2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공식 제정 공포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을 받아 동학정신이 면면이 살아있는 고장마다 동학사상 강의나 유적지 기행, 기념사업회 창립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3차 기행에 함께 한 사람들
▲ 단체 사진  3차 기행에 함께 한 사람들
ⓒ 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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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총부도 문화광광부 후원, 동학혁명기념사업추진단 주관, 서울동학 최보따리 인문포럼 진행으로 동학강의와 동학 기행을 주최해 동학사상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기도 한다. 천도교중앙본부가 주최한 2019 동학기행은 '동학의 창명에서 수운의 순도까지'라는 주제로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서울동학 최보따리인문포럼 최인경 대표는 "동학기행은 동학 발상지 경주와 울산 일원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해 수운 최제우 선생이 관의 추적을 피해 머물던 남원 은적암 일대, 남원의 항쟁터를 돌아보는 것을 중심 주제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학 강의와 동학의 자취를 돌아보는 기행을 통해 동학 정신을 더 많은 이들에게 확산시키고 일상에서 동학 정신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말했다. 
 
 윤석산 교수가 현장 설명을 하고 있다.
▲ 윤석산 교수  윤석산 교수가 현장 설명을 하고 있다.
ⓒ 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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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틀간 남원 일대를 돌아본 3차 동학기행단은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와 남원정신문화연구원 한병옥 선생의 현장 강의까지 들었다.

남원은 동학 역사에 여러 모로 의미가 깊은 지역이다. 경주 용담정이 동학의 발상지라면 동학이란 이름으로 공식화 한 곳은 남원이다. 수운 선생은 은적암에서 동학경전을 집필하며 포교를 했고, 김개남 장군이 남원에 거주하며 혁명군을 지휘했다.

백두대간의 능선을 경계로 남원 일대 곳곳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 민보군, 일본군이 대치하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수많은 희생을 겪기도 했다. 동학의 정신과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 남원 일대다. 동학 발생 초기인 1861년부터 1894년까지, 동학혁명 전 30여 년간의  다양한 동학 유적이 남원에 남게 된 이유다.

남원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전략상 요충지라 전란 때마다 수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다.

남원은 역사적으로 일본과의 악연이 깊다. 일본은 임진왜란의 패인이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탓이라 여겨 1597년(선조 30) 7월 말, 11만 명을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우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좌군은 남원으로 진격하게 한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1만 3000여 명이 싸웠으나 이틀만에 패배했고 왜군에게 학살된 민·관·군의 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南原城)을 지키다 전사한 지사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이 무덤자리마저 식민지 치하 일제에 의해  심각한 훼손을 당한다. 일제가 만인의총을 가로지르며 구 남원역 자리에 철도 플랫폼을 건설한 것이다.

1894년 남원의 중심을 흐르는 강 요천변에 7만여 명이 모여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드높이며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한 훈련을 했다고 한다. 구국의 깃발을 휘날리며 남원 서부평야지대를 장악하고 민보군 관군과 대치하던 동학농민군은 방아치 전투에서 민보군 관군 일본군에게 패해 30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쇠퇴해간다.
 
 남원성 북문 현장을 발굴한 한병옥 선생
▲ 한병옥(남원정신문화연구원)선생  남원성 북문 현장을 발굴한 한병옥 선생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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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항쟁지를 중심으로 유적지를 돌며 현장 강연을 해준 한병옥(남원정신문화연구원)선생은 구 남원역 폐 역사 한쪽에서 남원성 북문터를 발굴한 전직교사 출신 향토 사학자다. 그는 남원 일대 동학 역사를 연구하고 현장을 발로 뛰며 남원 일대 동학 항쟁터를 찾아내 표지석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남원 일대에서 찾아내 표지석을 세운 유적지만 해도 17여 군데에 이른다.

그는 동학혁명군의 자취를 따라 표지석을 세운 유적지를 돌며 표지석을 세운 이유 등을 설명해줬다.

그가 발굴한 남원성 북문터는 구 남원 역사 근처로 발굴작업 진행 중이다. 구 남원 역사 일대는 일제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한 지사들의 무덤인 만인의총을 가로질러 철도 플랫폼을 건설해 망자들의 무덤을 훼손하는 만행을 저지른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군과 관군은 수운 선생이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은적암을 방화해 소실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은적암 터 자리에 천도교 서울교구가 안내 표지판을 세웠다.
  
김개남 북상 후 방아치 전투를 위해 진을 친 곳
▲ 방아치 전투 전 진을 친 장소 김개남 북상 후 방아치 전투를 위해 진을 친 곳
ⓒ 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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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둘은 남원시 이백면 남계리에 위치해 있다. 1984년 7월 15일(음) 7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요천에서 남원대회를 개최한 후 김개남 장군이 북상한 이후에도 남원 지역에는 1만 명 이상의 동학농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쪽둘은 1894년 11월 13일 방아치 전투를 앞둔 남원 대접주 유태홍, 김홍기, 유복만, 남웅삼 등 전라좌도 동학농민군이 진을 친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의 자취를 따라 돌아본 역사의 자취는 쓰리고 아팠다. 
 
서울동학에서 은적암 터에  세웠다.
▲ 은적암터 서울동학에서 은적암 터에 세웠다.
ⓒ 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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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는가. 역사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자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창구며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노정표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과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패배로 끝난 동학혁명농민군의 쓰라린 역사의 자취를 우리는 왜 지금 다시 돌아봐야만 하는가.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지만, 그들이 내건 기치를 우리가 이어가 혁명을 완수해야만 하기 때문 아닐까.

동학농민혁명군이 내건 기치인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을 이뤄내지 못한 탓에 우리는 여전히 미국의 입김과 일본의 만행에 휘둘리고 있다. 하늘인 사람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안전을 위협받는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동학이 내건 기치인 척양척왜, 보국안민, 사람이 하늘인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동학 정신과 혁명이 박제된 과거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현재의 숨결과 삶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태그:#남원 동학유적지, #은적암, #남원성 북문터, #척앵척왜, #보국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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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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