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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산골에 큰형의 뼈가루가 안장되었다
▲ 큰형의 묘터 고향산골에 큰형의 뼈가루가 안장되었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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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이 한 달 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간암을 발견한 지 불과 10개월도 안 돼 돌아가신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고가의 시술까지 받으면서 치료를 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올해 70세이니 얼마든지 더 살 수 있는 나이인데도 안타깝게 떠나버렸다.

큰형은 경남의 두메산골에 태어나서 자라다가 대구로 이사 나와 학교를 다니게 됐다. 산골집과 농토의 일부가 남아 있어 학교에 다니면서도 고향에 자주 다녀왔다. 방학이 되면 고향 산골집에 가곤 했으니 아마도 자랄 때의 추억으로 정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큰형이 주관해 고향 산골에 산소를 만들어 모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해마다 추석에 함께 성묘를 다녔다. 큰형은 산소를 가면 주변의 땅들도 살펴보면서 나중에 우리 형제들도 부모님 산소 옆에 묘터를 마련해 함께 묻히자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난해말 간암이 발견돼 수술이 어려워 색전술 시술을 받았다. 시술후 결과가 많이 좋아 의사도 안도하면서 지켜보자고 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진료일에 가서 검사를 다시 받으니 급격하게 나빠져 의사도 놀라면서 치료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생명 연장을 위해서라면 한 번에 2000만 원이 드는 아주 고가의 방사선색전술이 있다고 소개했다. 가족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술을 받아들였다. 큰형에게는 차마 치료의 가망성이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살았고 누나와 큰형이 자랐다.
▲ 고향산골 마을 부모님이 살았고 누나와 큰형이 자랐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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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술을 받고 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암은 급속도로 번져나가 더 이상 병원에서는 치료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큰형은 의지를 가지고 자연치료에 희망을 걸고 고향 산골집에 들어가려고 했다.

큰형은 평소에도 고향 산골에 집을 지어 들어가 살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간암이 발병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됐지만, 치료를 위해서라도 빨리 고향 산골에 집을 구하려고 했다. 그곳에만 들어가면 치료를 해서 몸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과 함께 고향 산골을 둘러보면서 지낼 만한 집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마땅한 집이 나오지 않아 차일피일 미뤄지게 됐고 큰형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됐다. 급기야는 통증이 심해지고 식사를 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이르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됐다.

그래도 큰형은 고향 산골집에서 자연치료하는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들에게 계속 집을 찾아보라고 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을 통해 집을 소개받고는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병원을 떠나서는 치료조차 어려울 것 같은데도 오로지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주술처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큰형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져 식사를 완전히 못하고 혼자서 거동도 어려워지게 됐다. 그런데도 고향집을 구해 치료하러 들어가겠다는 집념은 버리지 않고 가족들을 더욱 재촉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농가를 빌리게 되어 들어가려고 준비하는데 큰형이 급작스레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고향산골에 나란히 함께 있다
▲ 부모님 산소 고향산골에 나란히 함께 있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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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의 장례를 치르고 다행히 부모님 산소 옆에 마련된 작은 묘터에 화장한 뼛가루를 묻었다. 결국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서 한 줌 가루가 돼 돌아간 것이다. 고향산골의 흙에 묻혀 바로 옆에 있는 부모님과 함께 어릴 때처럼 평안하게 안식을 찾게 된 것이다.

아마도 밤이 되면 귀신이 된 부모님과 큰형 그리고 조금 떨어져 납골당에 안장된 누나까지 함께 만날 것이다. 마치 옛날에 부모님이 누나와 큰형을 낳아 기르던 젊은 시절처럼 다시 오손도손 지낼지도 모르겠다. 슬픈 마음이 가득하지만 혼령이 다시 모여 산다고 상상해보니 위로가 되기도 한다. 

투병하는 큰형을 지켜보면서 고향이 뭐길래 갈 수 없으면서도 저토록 집요하게 찾는지 매우 안타까웠다. 얼마나 고향에 돌아가 살고 싶었으면 의식이 희미하다가도 고향집에 간다고 하면 눈동자가 살아났다. 무엇이 큰형에게 그토록 절실하게 고향을 찾도록 했는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머잖아 나도 죽게 되면 고향 산골의 묘터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큰형과는 달리 대구에 이사나와 태어나고 자라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은 없다. 그러나 그리운 부모님과 누나와 큰형이 있는 고향 산골에 묻혀, 혼령이라도 가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새롭게 든다.

태그:#큰형, #간암, #고향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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