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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는 장인, 마이스터가 있다. 그들은 단순한 수공업자가 아니다. 본인이 속한 산업 군을 이끄는 최고 전문가 집단이다. 마이스터 자격을 가진 이들은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학생들을 교육한다. 독일 사회는 수공업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다. 직업 양성 제도도 잘 갖춰져 있다. 대학을 우선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 청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직업 교육을 받는다.

마이스터 과정에 도전하려면 우선 각 직업의 전문가 '게젤레(Geselle)'가 되어야 한다. 게젤레가 되기 위해서는 '아우스빌동(Ausbildung)'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일종의 전문 직업학교 과정이다. 학교에 들어가거나 회사·공방에 소속되어 마이스터 밑에서 능력을 쌓아나가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 있는 도제, 아쭈비(Azubi)들은 실기와 이론을 병행하며 전문지식을 기른다.

스물여덟의 한국인 아쭈비, 장고용환

스물여덟의 한국인 아쭈비, 장고용환은 독일에서 금관악기를 만든다. 아우스빌동 2년 차다.
 
   독일의 금관악기 아쭈비, 장고용환
  독일의 금관악기 아쭈비, 장고용환
ⓒ 장고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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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환은 아침 6시에 일어난다. 그는 독일의 동쪽, 뉘른베르크에 산다. 11월이 오고 나서는 집을 나설 때에도 아직 사방이 어둡다. 세 들어 사는 집에서 금관악기 제작회사까지 1997년식 자동차를 타고 간다. 에어컨도 라디오도 고장 난 낡은 차다. 1년 전, 구입할 때 낸 돈만큼 수리비가 나왔다.

6시 반부터 일을 시작한다. 최근에는 플레스 호른의 연결 작업을 도맡았다. 다른 직원들이 미리 만든 금관들을 이어 악기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몸통을 구성하는 금관을 제도에 맞게 넓히거나 잘라낸다. 손으로 미세한 각도와 길이를 조정하기도 한다. 금관들을 철사로 고정하고 주석과 은을 땜질해 이어 붙인다. 마무리 연마 작업을 하고 악기를 가죽으로 감싼다. 3일이면 악기 10대를 완성한다.

"나는 큰 회사에서 일해요. 70년 넘게 3대가 이어 운영하는 곳이죠. 유럽에서 금관악기를 부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회사예요. 미국과 일본, 중국 쪽으로 악기를 보내기도 하고요. 작은 공방들과 달리 수리보다는 제작이 주 업무인데다 세밀하게 분업화가 이루어져 있어요. 덕분에 다른 아쭈비들과 달리 여러 파트를 옮겨 다니며 실무를 익히는 중이죠."

회사에는 사장을 포함해 마이스터가 3명 있다. 장고용환은 마이스터에게 직접 일을 배운다. 작년에는 트럼펫의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그때 만든 트럼펫 모델은 2019 독일 금관악기 어워드에서 1등을 했다. 회사 설립 이래 일곱 번째로 받은 상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콕 집어서 '장고를 내 파트로 보내줘'라고 말하기도 해요. 어느 파트를 가도 실력을 인정받고 칭찬을 들어요. 아주 작은 부품을 만들어도 끈질기게 완성도를 높이려 했거든요. 오차 없이 꼼꼼하게."

미텐발트 국립악기 제작학교

"한 달 전, 바이에른 주의 미텐발트 국립악기 제작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원래 살던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어요. 지금은 회사에서 다시 악기 만드는 일을 하고요. 듀알레 아우스빌동 과정의 아쭈비들은 학년 당 두번, 6주 정도씩 학교에서 이론 공부를 해요. 전공이론, 도면 작성, 음향학은 물론 독일 사회학과 수학까지 배우죠. 공부를 하고 오면 일할 때, 제작과정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요. 무심코 시키는 대로 만들던 악기가 새롭게 보이죠. 디자인 하나하나 치밀한 계산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미텐발트 국립악기 제작학교의 금관악기 반에는 매년 12명 정도의 학생이 입학한다. 학비는 따로 없다.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기숙사도 무료로 사용한다. 장고용환과 같은 외국인에게도 혜택은 동일하다. 하루에 5.5유로 정도 하는 식비만 내면 된다. 금관악기 외에도 목관악기, 탄주악기, 바이올린, 타악기, 활 등 여러 악기 제작 과정을 배울 수 있다. 만 열일곱부터 마흔아홉까지 나이 대도 다양하다.

학교에 들어가려면 회사에 취직을 하거나 따로 입학시험을 치러야 한다. 아쭈비 장고용환처럼 회사와 병행하는 '듀알레 아우스빌동' 과정 학생들은 학교에 있는 두 달여를 제외하고 회사에서 일하며 소정의 돈을 받는다. 많지는 않지만 유학생들에게는 소중한 돈이다.
  
  미텐발트 국립악기 제작학교. 학비와 기숙사비가 무료다.
  미텐발트 국립악기 제작학교. 학비와 기숙사비가 무료다.
ⓒ 장고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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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공인 수공업 전문가인 마이스터는 자기가 속한 산업을 이끈다. 대부분이 사업체를 직접 운영하면서 다음 세대의 마이스터를 양성한다. 그렇기에 마이스터 과정을 이수하려면 전공 지식뿐만 아니라 디자인 이론, 교육학, 독일 노동법까지 공부해야 한다. 그 초급과정인 아우스빌동 과정에도 예외는 없다.

"사실 사회학이나 노동법 수업은 정말 어려워요. 이제 독일어 기본 회화는 문제없지만 전문용어는 또 다른 세상이더라고요. 한국말로 '설명하시오'와 비슷한 고급어휘를 몰라서 내용은 아는데 답을 못 쓴 적도 있었죠. 스펠링 하나를 틀려서 쓴 문장의 의미가 아예 달라지기도 하고. 같이 다니는 독일인 학생들은 한두 번 훑어보면 통과하는 작은 테스트도 나는 밤늦게까지 준비해야 해요."

올해 금속악기 반의 외국인은 트럼펫 연주를 전공하던 일본인과 그, 단둘이다. 한국인은 거의 없다. 용환이 졸업한다면 미텐발트 제작학교를 졸업한 첫 한국인 금관악기 제작자가 된다.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내년 3월 중간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독일에서 일하기

2017년 2월, 독일에 도착한 용환은 아우스빌동이 가능한 회사들에 지원 메일을 보냈다. 어학원을 다니며 반년 넘게 쉬지 않고 문을 두드렸지만 회신이 없었다. 그는 독일의 모든 금관악기 제작회사 리스트를 구했다. 가장 가고 싶은 세 곳을 정해서 직접 찾아갔다. 당시 머물던 서쪽의 슈투트가르트에서 동쪽의 뉘른베르크까지. 아주 먼 여정이었다.

"사장님이 열정을 좋게 봤나 봐요. 일반적인 이력서뿐만 아니라 트럼펫을 불고 놀던 어릴 때 사진, 콩쿠르 나갔던 사진에 한국을 모를까 싶어 서울 전경 사진까지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갔거든요. 내가 이 악기와 이렇게 가깝다, 이 일을 정말 하고 싶다, 어필했죠. 작년 1월쯤 한 달 인턴을 거쳐서 정식으로 취업을 했어요.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일을 했죠. 비자도 해결해야 했고."
 
  일은 일이고 나는 나다. 장고용환의 동료
  일은 일이고 나는 나다. 장고용환의 동료
ⓒ 장고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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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접 겪어본 독일의 노동 환경은 아주 만족스럽다"고 했다.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준수하며 연장 근무는 거의 없다. 용환은 아쭈비로 주 40시간씩 일한다. 게젤레들의 일반적인 업무시간은 주 38.5시간이다. 1년에 휴가만 30일이 주어지고 병가도 자유롭다. 감기에 걸린 김에 1, 2주 쉬는 직원도 있다. 동료들은 일을 마치고 남은 시간들을 취미 생활에 쏟는다.

"한 번은 동료 집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취미로 목공을 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직접 보니 거의 목공소 수준의 장비를 집에 들여놨더라고요. 남는 시간과 돈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모두 쏟는 것이 참 부러웠어요. 여기서는 일은 일이고, 나는 나예요. 한국에서는 일과 관련한 대부분의 것들이 스트레스잖아요. 독일 사람들은 업무 시간과 자기 시간을 정확히 분리하죠."

그 다음, 마이스터로

"악기를 하나 완성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요. 이 기분을 어떻게 비교할 말이 생각 안 나네요. 그냥 좋은 거죠. 내 손으로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낸 보람이."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찾던 장고용환은 인터넷에서 파이프 오르간 마이스터 '홍성훈' 이야기를 접했다. 그때부터 그는 독일 마이스터 과정을 조사했다. 치기공, 플로리스트, 제빵, 피아노 조율사 등 배울 수 있는 분야가 다양했다. 하지만 금속악기 제작만큼 그의 마음을 끈 일은 없었다.

트럼펫 연주자의 길은 포기했지만 악기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1년여 독일어를 배우고 아르바이트로 자금을 마련해 일단 독일로 떠났다. 모두들 쉽지 않을 것이라 했다. 흔한 말이지만, 그는 노력으로 자기가 있을 자리를 찾아냈다.

"가끔 홀로 외국에 있는 것이 정말 힘들어요. 달리 해소할 방법도 생각 안 나죠. 그래도 이 일이 있어서 버틸 수 있어요.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런 굳은 마음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해요."
 
  장고용환의 작업대. 그는 마이스터까지 공부할 예정이다
  장고용환의 작업대. 그는 마이스터까지 공부할 예정이다
ⓒ 장고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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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제를 몸에 익혀나갈수록 자신감이 붙는다. 불안한 허공을 향해 팔을 뻗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계단을 밟아나가며 천천히 목표를 향해 오르는 중이다. 화요일과 수요일은 퇴근 이후 전공 이론과 수학, 독일어 수업도 따로 받는다.

"마이스터까지 가야죠. 그 뒤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장고'를 새긴 악기를 만드는 회사를 차릴 수도 있고 지금 회사에 남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지금은 악기를 잘 만들어야지, 최선을 다해 눈앞의 일을 해야지, 이 생각만 하고 있어요."

태그:#인터뷰,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 #금관악기 제작, #아우스빌동과 아쭈비,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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