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다른 문화예술계는 영화계의 단결력에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한국영화가 이런 흐름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검열과 표현의 자유 제한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저항해 온 영화인들의 노력이 수십 년 동안 쌓인 결과다. 이들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영화운동'이었다. '기획-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영화운동에 매진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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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자의 전성시대> 스틸 사진

<영자의 전성시대> 스틸 사진 ⓒ 김호선 감독 제공

 
1970년대 군사독재시절 사회적 문제를 담은 영화의 대표작은 1975년 개봉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군사정권 초기 정진우 감독의 <증언>이 자유당시절 정치깡패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가 유가족들의 진정으로 심한 가위질을 당한 적이 있었으나, <증언>은 이전 정권인 자유당 시절에 대한 비판이었다.
 
반면 <영자의 전성시대>는 서슬 퍼렇던 당대의 사회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사회파 영화의 출발이라고도 볼 수 있다. 3중, 4중의 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 당하던 암흑의 시절이었지만 영화는 기적처럼 검열에서 살아나 호평을 받았고, 지난 100년의 한국영화사에서 100대 작품에 오를 만큼 중요한 영화로 각인되어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가난한 영자가 부잣집 가사도우미로 일하다 주인집 아들에게 겁탈당한 후 쫓겨나 여공, 버스차장, 호스티스와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하는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가사도우미로 있을 때 만난 철공소 노동자 창수와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희망이 없는 군사독재시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사회문제를 보는 감독의 시선이 잘 담긴 영화이며, 뛰어난 작품성으로인해 70년대 영화 중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 호평받고 있다.
 
개발독재시대, 무자비한 권력과 매판자본의 폭력 아래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시 사회를 대놓고 비판하거나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그저 밑바닥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삶의 면면과 등장인물들의 충돌을 통해 사회현실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리고 은유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인의 인권과 삶이 짓밟힌 채 쓰레기더미 속에 팽개쳐져 스러져 가는 개발독재시대의 처참한 현실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건, 오직 주인공 영자를 향한 창수의 사랑이었다. 그게 영화의 가장 큰 힘이었고, 그래서 감동은 순애보에서 온다.

김호선 감독은 <영자의 전성시대>에 대해 "아마도 내 잠재의식 속에 쌓여있던 뭔가가 이 작품을 만들게 했는데. 잘 모르겠다. 아쉬운 게 너무 많다"며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같은 질곡의 역사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와 인권의 문제가 심각했고 관심사였기 때문에 <영자의 전성시대>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작가주의적 성향을 띤 의식 있는 영화감독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액션과 멜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주류를 이뤘던 현실에서, 사회적 가치에 주목한 감독의 인식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개발독재를 은유와 상징으로 비판
 
 지난 7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포스터로 본 한국영화 100년' 전시회에 전시된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와 스틸사진

지난 7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포스터로 본 한국영화 100년' 전시회에 전시된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와 스틸사진 ⓒ 성하훈

 
<영자(英子)의 전성시대(全盛時代)>는 조선작 원작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김호선 감독은 "우리 사회가 산업화 시대로 전환되면서 쓰레기더미 속으로 밀려가는 소외계층의 빈곤과 고통의 비명 속에서 '영자'라는 이름은 대중에게 위로의 대상이자 상징적 인물이었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회 지도층이나 빈곤층을 소재로 영화로 만들 수가 없었다. 특히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했다. 오직 정부의 정책이나 시책을 따라야 했고 개인의 의사까지도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용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영화제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따기에 혈안이 되어 정부시책영화를 만들던 시대였다. 한국영화 3편을 만들어야 돈이 되는 외국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다보니, <영자의 전성시대>와 같은 작품성 높은 영화를 제작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검열의 칼날을 피하는 일도 간단치가 않았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길을 찾게 된 것은 김호선 감독이 2년여에 걸쳐 제작자를 찾아 나서다가 영화기획자 황기성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작품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김승옥 작가와 의기투합해 당시 태창영화사에서 작품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주연 여배우 캐스팅 문제로 제작사와 대립하게 되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회사에선 당대 톱스타 여배우를 캐스팅하려 했지만 김호선 감독은 반대했기 때문이다. 기성배우는 이미 매너리즘에 빠져 영자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감독은, 반드시 신인이어야만 작품이 성공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김호선 감독이 선택한 배우는 TV에서 단역으로 잠깐씩 나오는 염복순 배우. 사실 김호선 감독은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그를 관심 있게 지켜봐온 상태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제작사가 발칵 뒤집혔다. 신인감독에게 톱스타 배우를 캐스팅해 준다는 건 행운인데도 이를 거절하니 '미친 놈, 건방진 놈' 등 온갖 비난을 들을 수밖에. 뭐 회유도 안 되니까 끝내 감독을 교체하기로 결정을 하더라. 하지만 원작의 판권을 내가 갖고 있었다. 내가 판권을 넘기지 않는 상태에서 제작사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작사가) 굴복하게 된 거다."
 
당시 제작사가 물러났던 건 이미 시나리오만 갖고 입도선매를 통해 제작비를 받아 놨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배급을 권역별로 했기 때문에 지역의 극장주들이 기획 중인 영화를 선금을 주고 완성 전에 선점하곤 했다. 제작비를 받아 놓은 제작자들은 대신 정해진 기한 내에 영화를 완성 시켜야 했다.
 
신인배우 고집한 감독의 모험
 
예나 지금이나 신인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 한다는 건 제작사에게 모험이고, 톱배우가 출연해야 흥행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공식은 똑같다. 그런 공식을 무시하고 신인 감독 김호선은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염복순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녀에겐 잡초 같은 강한 생명력이 있어 좋았고 백치미가 있어 좋았다. 더구나 기성 배우의 때가 묻지 않아 신선했다"고 말했다. 이어 "캐스팅 과정서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고통을 당할 만큼의 보상과 가치는 충분했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한다"고 술회했다.
 
주연 여배우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제작사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을 건다. 첫째는 구정(설날) 프로로 극장과 계약이 돼 있으니 개봉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감독 의도대로 영화를 만들어 검열이 통과 안 될 때는 모든 책임을 감독 혼자 져야한다는 것이었다. 주연 여배우 선정 문제로 2개월여 시간을 소비한 감독으로서는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75년 <영자의 전성시대>를 촬영 현장

1975년 <영자의 전성시대>를 촬영 현장 ⓒ 김호선 감독 제공

 
김호선 감독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김승옥 작가와 숙의 끝에 영자와 창수의 러브코드를 표면에 세우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들을 희화화시키기로 작품을 수정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탓에 영화의 내용도 일부 바뀌었는데, 시나리오는 원래 주인공 영자가 서울역 육교 위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는 것은 돼 있었다. 그러나 제작자가 만일 주인공이 죽게 되면 잘못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되니,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반대하면서 결국 한창 개발이 시작되던 여의도를 배경으로 영자의 모습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담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촬영준비에 들어갔다. 모든 상황이 열악했지만. 환경 탓을 할 수만은 없없다. 김호선 감독은 불가능은 없다'는 각오로 충무로에 여관 두 곳을 얻어 야전사령부를 차리게 된다. 주연배우는 물론, 전 촬영 스태프들이 합숙하며 주야로 촬영을 강행했다.
 
사실 당시 제작사는 감독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작품에 대한 흥행은 포기한 상태였다고 한다. 오직 검열통과와 약속된 개봉 일만 지켜지면 그만이었다 이미 지방 극장에 입도선매를 통해 영화를 배급계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제작비를 적게 들여 수익을 남기자는 심산이었다. 촬영현장에 당시 깡패 수준의 힘 센 제작부를 투입해 협박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름을 주지 않아 NG도 못 낼 판이었다.
 
이런 악조건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연기자들과 연습을 반복해 극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김호선 감독은 "나에겐 불가능 없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싸워나갔다"고 회상했다.
 
가위질한 원판 필름은 검열 당국이 폐기

1974년 12월 준비기간을 거쳐 1975년 1월 2일 크랭크 인이 들어간 영화는 약 40일 동안 촬영과 후반작업, 검열을 거쳐 약속된 개봉 날자인 2월 11일 하루 전에 가까스로 완성됐다. 김호선 감독은 "모두가 신인감독 능력으론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건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숙지와 현장답사(헌팅)를 철저히 했기에 콘티도 없이 영화를 찍을 수 있었고, 스태프들이 잘 따라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개봉 전날 밤 10시께 검열을 마쳤는데 20여 군데 화면과 대사가 잘려나갔다. 잘린 부분을 프린트 편집이라도 해야 되는 데, 작업할 수 있는 시사실이 없었다.
 
개봉 첫날 김호선 감독은 영화가 개봉하는 을지로 국도극장 길 건너편에서 떨리는 심정으로 서 있었다. 길게 늘어서 있던 버스 몇 대가 떠나자 극장 앞은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의 감정을 김호선 감독은 이렇게 회고했다.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나를 부정적으로 폄하하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극장에서 내가 만든 작품을 처음 봤는데, 검열에서 가위질당한 부분의 사운드와 화면이 툭툭 끊기고 영화가 거칠었다. 편집을 다시 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엔 검열에서 잘린 부분의 원판 필름(네가필름)자체를 검열 당국에 강제적으로 압수하고 폐기 처분했다. 영원히 <영자의 전성시대> 원본은 복원이 불가능했다. 마치 내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 것처럼 많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앞은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낮 12시 전에 전회 매진되고 암표 장사가 판을 치는 가운데 처음 한 달 동안은 청량리 588성매매들과 구로공단, 청계천의 여공과 창수와 같은 공장 노동자들로 매일 만원사례를 이뤘다. 이어 두 달째는 대학생과 일반인들로 만원사례가 이어졌다.
 
1970년대 초반 서울 인구가 600만 명을 넘어섰는데, 당시 영화를 개봉한 곳은 국도극장 하나뿐이었다. 영자 신드롬에 대한 언론 보도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시사평론지였던 <서울평론> 표지에 영자의 얼굴이 실렸다. <영자의 전성시대> 현상을 사회적 이슈로 다루는 사회학자와 종교학자들의 기고가 이어졌다. 그러자 상류층 관객까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구토하듯이 말했다. "정말 우리 사회가 이렇단 말인가?!"
 
군사독재 빨리 무너지길 바라게 돼
 
 영화 촬영현장에서의 김호선 감독

영화 촬영현장에서의 김호선 감독 ⓒ 김호선 감독 제공

 
변인식 영화평론가는 당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김호선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물게 흥행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가지 미덕을 지닌 특출한 감독으로 손꼽힌다"며 "70~80년대 군부 독재의 서슬 퍼런 검열의 시간대(時間帶)를 헤쳐나가는 한 가지 방법론으로서 그는, 각박한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상을 그의 작가적 필모그래피를 통하여 표출해 내며 앞에서의 두 가지 미덕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수남 교수(영화평론가)는 개인 평론집에서 "김호선 감독의 평전에서 주제의식과 작가정신이라는 작품세계 분석을 통해서 살펴보면, 고통과 모의 시대에서 영화가 무엇을 표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김호선의 물음을 읽을 수 있다"며 "김호선의 작품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시의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에 직접 다가선 영화였다"고 평가했다. 
 
또 "1970년대 우리 사회는 급속한 경제개발과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가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과 도시화에 따른 빈부의 격차로 흔들리는 가치관이 어지럽게 혼재한 시대였다"면서 "풍요와 성공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것을 얻은 사람보다는 가난과 절망 속에서 짓밟히며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영자의 전성시대>는 그 같은 현실에 영화가 다가서야 한다는 것을 실증한 영화다"라고 호평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개봉 2개월여 만에 단일극장에서 40만이라는 관객이 찾으면서 당시 최고의 흥행 영화가 됐다. 이어 전국으로 개봉이 확산됐다. 제작자는 입이 찢어져 다물 줄 모르며 이번 성공은 회사가 감독을 열심히 뒷바라지한 덕분이라며 자화자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호선 감독은 하루아침에 유명감독 대열에 섰지만 "별로 달갑지 않았다"고 소회했다. 독재정권과 매판자본이 결탁해 만들어 내는 영화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외면하는 메시지가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으나, 영화감독으로 살아남으려면 정부 시책 영화나 만들며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럴 바에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없는 높은 현실의 벽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김호선 감독이 당시의 심정을 영자의 모습에 빗대 이렇게 말했다.
 
"'영자'가 한쪽 팔을 잃고 절망 속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화려한 도시를 배회하지만 , 아무도 그녀에게 구원을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그녀는 서울역 염천교 위에서 달리는 기차 위로 자살을 시도한다. 내가 그때 딱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개인의 인권을 무차별로 짓밟고 있는 군사독재 정권이 하루빨리 무너지기만 바라게 됐다."
 
'영상시대'로 이어진 <영자의 전성시대>
 
 '영상시대' 회원들. 왼쪽부터 이장호 감독, 홍의봉 감독, 김호선 감독, 하길종 감독, 변인식 평론가

'영상시대' 회원들. 왼쪽부터 이장호 감독, 홍의봉 감독, 김호선 감독, 하길종 감독, 변인식 평론가 ⓒ 김호선 감독 제공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사회 비판 영화였던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이후 '영상시대'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김호선 감독은 '영상시대'에 대해 "새로운 영화 흐름에 대해 고민하며 당대 감독과 평론가가 뭉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뉴 시네마 운동'을 전개하는 모임이었다"고 말했다.
 
'영상시대'는 영화가 더 이상 독재정권의 하수인이나 나팔수 역할을 하지 않기 위해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영화제작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꿔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하며, 둘째는 검열제도를 폐지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고, 셋째는 우리 영화감독들은 외국영화(미국, 일본, 홍콩)베끼기에서 벗어나 작가의식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를 통해서만이 한국영화가 발전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영상시대'는 단순한 흥행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작의 용광로를 스스로 달궈가는 작가적 고민에 기인했다. 김호선, 하길종, 홍의봉, 이장호, 홍파 감독, 변인식 평론가, 김화영 교수(불문학) 등은 잡지 <영상시대>를 발간하며 뉴 시네마 운동을 전개했다. 불황이 늪에 빠져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한국 영화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좌표를 제시한 것이다.
 
김종원 평론가는 "'영상시대'는 '예술로서의 영화'를 표방한 새로운 영화운동의 일환이었다"며 "30대 중후반에 이르는 영화인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연출 지망생과 신인배우를 모집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새로운 영화운동의 모색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3년여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다"며 "그러나 이들은 1977년과 1978년에 두 권의 <영상시대>라는 수준 높은 영화잡지를 발간했다'고 설명했다.
 
김종원 평론가는 '영상시대'에 대해 "하길종 감독과 변인식 평론가가 새로운 표현 방식과 영화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했던 시도였다"며 "힘을 얻기 위해 김호선 홍파, 이원세, 이장호 감독 등에게 함께하기를 제안해 이들이 동참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길종 변인식 이원세 감독 등은 평론도 쓸 만큼 필력을 갖춘 분들이어서 글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외부로 알리려 했다"면서 "하길종 감독이 미국 유학파였기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영화 100년을 정리한 책 <한국영화 100년 100경>에서 안재석 교수는 '영상시대'가 갖는 의의와 한계성 및 활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영상시대"는 이념보다는 예술을 중심에 둔 운동이었으며 동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려는 영화적 시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한국영화 예술화 운동은 동시대 청년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고, 선언적 구호에 머물렀다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30대 흥행 감독이라는 지명도에 의존했다는 점과 개인적 친분으로 결성한 동인체가 갖는 느슨한 연대감 등은 '운동'으로서의 동력을 허약하게 했다."

후세의 평가대로 '영상시대'는 충무로 주류영화인들이 나선 영화운동이라는 의미는 갖고 있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기조로 진행된 이후 한국 영화운동과는 방향에서 차이가 컸다. 서구의 영화운동과 같은 흐름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는 일종의 표현의 자유 확장을 목적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호선 감독도 "정권을 바꾸거나,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는 영화운동이 아니었고,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는 등의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1975년 '영상시대' 회원 이장호 감독, 하길종 감독, 김호선 감독

1975년 '영상시대' 회원 이장호 감독, 하길종 감독, 김호선 감독 ⓒ 김호선 감독 제공

 
다만 이들의 시도는 1980년 이후 본격화된 영화운동에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상시대' 활동을 했던 이원세 감독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을, 이장호 감독은 해외반출 불가 판정을 받은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선언>(1983) 등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내 놓는다.
 
1980년대 재야에서 영화운동을 하며 독립영화를 만들던 영화인들이 충무로로 통칭되던 주류영화 시스템에 진입할 때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의미 있는 부분이다. '영상시대' 회원이었던 이장호 감독이 향후 한국 영화운동의 충무로 진출 과정에서 이들을 품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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