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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딸에 대하여>는 김혜진 작가의 <어비>와 <중앙역>의 뒤를 잇는 대표작이다. 김혜진 작가는 세 작품에서 연달아 '약자의 고통'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 <중앙역>에서는 홈리스 연인들의 밑바닥 인생과 고달픔에 대해 진솔하게 다루고, <어비>의 경우 우리 사회의 소외된 청춘들이 겪는 부조리를 단단한 문장들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뤄볼 가장 최근작인 <딸에 대하여>는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타깃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색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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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는 혐오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른 살이 넘은 딸을 둔 엄마인 '나'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동성애자인 딸과, 그런 딸의 여자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말로만 들어도 불편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이 동거. 허나 이를 둘러싼 주인공들의 인생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레즈비언인 딸은 오래 전 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했지만, 여자친구와 함께 살며 서른을 넘긴 나이에 시간제 강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부당 해고된 동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고, 이로 인해 집 보증금까지 잃게 된다.

엄마인 '나'는 이런 딸의 모습이 안쓰럽지만 결코 이해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이 영원히 젊을 것이라 믿으며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딸이 미치도록 불쌍하고 화가 날 뿐이었다. 돈이 있으면 강제로라도 딸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겠지만, 그것마저 없는 자신의 처지에 무력감까지 든다.

이렇게 불안하고 또 불안한 그들의 동거생활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일상을 예기치 못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고 싶지만 번번이 '이해할 수 없는 벽' 앞에 가로막히는 엄마와, 어떻게든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납득시키려는 딸. 과연 이 둘이 겪게 될 이야기는 어떠한 결말을 맞이 해야 할까.

혐오와 배제의 세계에 대하여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 <딸에 대하여> 중
 
소설에서는 엄마인 주인공이 딸을 몰아세우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고 자식도 가지지 못하는 너희가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냐는 그의 말에 딸은 '엄마같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못하게 막고 있다'고 반박한다. 얼마 전 동성혼 합법화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의 상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당시 몇몇 네티즌들은 '그냥 자기들끼리 조용히 살면 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을 내세웠고, 거기에 성소수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살기위해 집을 구하려고 해도 신혼부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당장 반려인이 죽어가도 법적 보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술 동의조차 하지 못한다. 사후에는 장례 절차를 밟거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가족으로도 남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사회이다.'
 
"법적 제도로부터의 배제는 때때로 죽음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딸이 마이크를 쥐고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외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이렇듯 작품에 등장하는 혐오와 배제는 흔히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래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여전히 사회에서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고 있는 '노인'에 대한 혐오, '소문'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특정인을 향해 가해지는 무자비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 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약자끼리의 혐오. 이렇듯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혐오'의 고리는 너무나도 견고하게 엉켜있다.

그렇기에 맨 처음 딸을 억압하는 것처럼 그려진 엄마 역시 또다른 약자임을 독자는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나이들고 돈 없는 여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성소수자인 딸을 몰아세운 엄마는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이 아닌 다른 약자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혐오를, 누군가에게는 동정을. 이런 복합적인 모습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성소수자, 레즈비언, 여기 이 말들이 바로 나라고. 이게 그냥 나야. 사람들이 나를 이런 식으로 부른다고, 그래서 가족이고 일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고. 이게 내 잘못이야?"
- <딸에 대하여> 중
 
사실, 소설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결코 엄마와 딸의 관계 회복을 그려주지는 않는다. 오직 뿌리 깊게 내려앉은 단절만이 계속 반복될 뿐이다. 뽑힐 듯이 들썩거렸다가도, 이내 어디에 걸렸는지 꿈쩍도 안 하는 모습은 역시나 이 모든 상황들이 해결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딸이 엄마에게, 세상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원래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 오직 이것만을 알아주는 것.'

우리 사회가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 사례는 멀지 않은 지난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토론 시간을 점령했던 주제 중 하나인 '동성애 찬반'이 바로 그 흔적이다. 토론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한 쪽에서는 동성애를 찬성한다는 의견을, 다른 쪽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세웠었다.

처음 반반의 비율을 유지하던 이 토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찬성에 더 많은 이들이 몰렸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주제 자체가 없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를 찬성하거나 반대하죠? 당신이 찬성을 하던 반대를 하던,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요.'

'이성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너를 지지한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인정'을 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답은 어렵지 않다. 얼마 전 SNS에서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밝혔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이 어땠으면 좋겠냐'라는 질문이 이슈로 올랐었다.

그때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은 '그렇구나. 그래서 밥은 뭐 먹으러 갈까?'라는 대답을 원한다며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다. 밥은 뭐 먹으러 갈까. 거기에 담긴 내용은 실로 간단하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다.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도 다른 형태의 혐오가 될 수 있다.

소설은 혐오와 배제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은 필연적으로 투쟁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현실 또한 마찬가지이다. 혐오와 폭력은 대상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번 폭력을 경험했던 존재들은 그에 맞서기 시작한다.

작품에서는 그런 것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약자들을 한없이 착하고 유약한 존재로만 그리지도 않으며, 얼핏 강자로 보이는 인물 역시 누군가가 저지르는 혐오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독자는 맨 처음 등장인물들의 행보가 답답히 느껴질 수도 있다.

작품의 주인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의 딸은 명백한 약자지만, 이런 류의 소설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딸에게, 누군가는 저런 엄마에게 대입하여 소설을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누구의 편에 섰었는지 조차 까먹게 되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말하고 있다. 당신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이의 편에 서있든 간에 오늘도 그들은 존재하고 있다고. 오늘도 삶의 틈바구니에 섞여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사실, 소설의 결말은 통쾌하지 않다. 모든 갈등이 해결되지도 않은 체 마치 삶의 어느 순간을 어중간하게 스캔한 것 마냥 끝나버린다. 그렇기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할 수하지만 이유 없는 결말은 없듯이, 내일을 기약하며 끝나는 엔딩은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안겨줄 수 있다. 내일도 견고할 혐오의 고리 앞에서 누군가는 막막함을, 외로움을, 또 쓸쓸함을 읽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몇몇이는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번번이 부서지고 가로막힘에도 내일을 기약한다는 것은 점차 그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한 명, 두 명, 서서히 '내일'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깊숙하게 뿌리박은 편견도 뽑힐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강원 애니고 2학년으로, 이 글은 강원도 교육청 학생기자단에서 자체적으로 만드는 신문인 '무구유언'의 제 2호에도 실렸습니다.


딸에 대하여

김혜진 지음, 민음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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