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만으로 19년 5개월 직장생활 끝에 유급 안식 휴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러웠던 안식 휴가였는데 이런 식으로 누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딴에는 '부당해고를 당한 만큼 푹 쉬다가 복직해 월급 다 받으면 그게 안식 휴가 아니겠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당해고인지 여부는 다퉈봐야 알겠지만, 제가 어떻게 해고되었는지 딱 5분만 귀 기울여 들으신다면 적어도 고개 정도는 끄덕여주시지 않을까요.

참기 힘들었던 고위급 간부의 막말
 
노광준 PD는 고위급 간부의 친일 막말 발언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19년간 몸담은 경기방송에서 해고됐다.
 노광준 PD는 고위급 간부의 친일 막말 발언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19년간 몸담은 경기방송에서 해고됐다.
ⓒ 노광준

관련사진보기


저는 경기방송(FM 99.9) 라디오 피디입니다. 회사가 생긴 지 22년이 되었지만 아직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방송은 매우 중요한 경기지역 지상파 라디오 채널이자 지역민방입니다.

서울에 SBS 라디오가 있다면 경기도에는 경기방송, 그곳에서 저는 편성책임자 겸 제작팀장으로 일했습니다. 간부죠. 억대 연봉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가늘고 길게 가자' 주의여서 승진에 목숨 걸지도 않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그저 제 할 일 충실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살던 저에게 지난 여름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한 경제 조치를 시작할 무렵이었죠. 갑자기 경기방송 한 고위 간부가 회식 자리에서 "강제동원 판결은 잘못된 거야. 1965년 한일협정 때 일본에 돈 받고 다 끝난 걸 우리나라 대법원이 억지 쓰는 거라고. 일본 말이 맞아"라고 한 겁니다.

놀랐지만 그냥 좋게 생각했습니다. 이분께서 '우리 직원들 역사교육 시키려고 이러는구나' 하면서요. 이래 봬도 제가 한국사 1급이거든요. 회식 후 찾아봤죠. 역시 맞더군요. 진짜 억지를 피우는 건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게.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은 위법행위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지불했습니다. 즉, 식민지 배상 문제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한일협정을 통해 모든 게 해결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국제법상 개인에 대한 위법행위 또한 국가 간 협약으로 해소될 수 없고요.

하지만 일본은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며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정부가 어떻게 해보라는 이상한 억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 덕에 확실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 간부회의에서 그분이 또 "문재인을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떠오른다니까" 이러시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 욕이야 민주주의 사회니까 할 수 있죠. 그런데 일본의 부당한 경제 조치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우리 정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분은 문재인 정부가 일본에 맞서면서 삼성 등 우리나라 반도체가 다 망하게 생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삼성 관계자에게 들었는데 앞으로 석 달을 못 버틸 거'라고. 그러나 그날은 삼성전자 주식이 많이 오른 날이었습니다. 시장은 알고 있던 거죠. 버티기 힘든 건 삼성이 아니라 일본의 부품업체라는 걸.

저는 이번에도 좋게 생각했습니다. '이분께서 우리 간부들 경제 공부 시키려고 이러는구나' 하면서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 월요일(8월 5일) 장난이 아닌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문재인 때려죽이고 싶다."

간부회의가 끝난 후 사장과 함께 모든 간부가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분은 5~6분간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불매운동은 (우리 역사) 100년간 성공한 적이 없다. 물산장려니, 국채보상이니 성공한 게 뭐 있나?"
"아사히 맥주 사장이 무슨 죄가 있나? 유니클로 사장이 무슨 죄 있나?"
"유니클로에 사람 없어 보이도록 방송들이 일부러 (유니클로) 아침에 문 열자마자 준비하는 사이에 카메라 들고 들어가 찍는다. 그 카메라도 다 일제 소니건데 이율배반 아닌가?"
"우매한 국민들 속이고 반일로 몰아간다. 지네 총선 이기려고."


저는 당시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 그분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말이죠. 그분은 자신을 최고운영자라고 부를 만큼 경기방송의 보도와 제작, 경영 전반을 총괄 운영하는 총괄본부장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의를 제기한다는 게)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저분 성격이면 보도나 제작에 개입할 텐데 '저런 방송하는 순간 우리 방송은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있을 때 그분이 갑자기 음식점 점장을 부르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점장, 아사히 맥주 숨겨놓고 팔지 말고 오늘부터 앞에 내놓고 파세요."

순간 청취자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불매운동에 나서 매출 감소를 감수하면서까지 일본 맥주를 안 파는 편의점 점주, 일본 제품은 배달하지 않겠다는 택배노동자 등 의식 수준이 높은 분들이 우리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저분에게 왜 '우매한 국민들'로 매도되어야 하는지 속상했습니다. 

옆에 있던 윤종화 보도2팀장은 참담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둘이지만 저런 사람 밑에서 월급 받는 자신이 한심했다고 합니다.

다른 간부들이 그분의 장단을 맞춰주며 카페로 이동하는 동안 저와 윤 팀장은 무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런 친일 논리로부터 우리 방송의 편성과 보도를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저희는 언론제보를 결심했습니다. 내부에는 답이 없었으니까요.

저희는 기자를 만났습니다. 녹취록이 없느냐고 묻더군요.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런 말씀 하실 줄 몰랐고 원래 녹취 같은 거 싫어해서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이름 밝히는 실명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방송을 지키기 위해 실명 인터뷰를 하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걱정하기에 저희가 실명 제보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저희 모든 걸 걸고 진술의 신빙성을 보증하고, 둘째는 경기방송에도 양심의 목소리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8월 12일 기사가 나갔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고 여기저기서 규탄 성명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경기방송 노조도 2시간의 총회 끝에 그분의 '퇴진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8월 19일 전 직원 총회를 열었고 그분은 그 자리에 직접 나와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추석 전후로 나가겠다. 등기이사직도 내놓겠다. 가진 주식도 팔겠다.' 같은 날 대표이사 명의의 대국민 사과문도 발표되었습니다.
 
"해당 간부는 이번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여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사퇴 의사를 분명히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2019년 8월 19일 경기방송 대표이사 박영재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사주들과 이사회의 시간이었습니다. 달아올랐던 반일 정국이 조국 정국으로 바뀌면서 경기방송에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러나겠다던 그분은 저희에 대한 비판글을 사내게시판에 올렸고, 이사회 직후 대표이사가 먼저 그만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9월 25일 이사회 명의의 포고문이 발표됐습니다. 제목이 이랬습니다.

'경기방송 임직원들에게 고함.'

이사회 자체조사결과 저희가 사실과 다른 허위제보를 했고 경영권을 넘어 회사를 침탈하려는 중대 행위를 저질렀기에 중징계를 내리고, 물러나겠다고 하셨던 그분에게 모든 사태수습을 맡긴다는 게 요지였습니다.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의 의견은 한 번도 듣지 않고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직후 저희는 대기발령 신세가 되었고, 그분은 전무이사로 승진하였습니다.

10월 7일 징계위원회가 열려서 가보니 회사는 저희에게 허위제보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하고 광고하락 등 재산상 손실을 끼친 데 대한 책임까지 묻겠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희 제보는 허위가 아니었고, 경기방송의 명예실추 및 재산손실의 책임은 문제 발언의 당사자이자 물러나겠다는 스스로의 약속까지 뒤집은 그분께서 지셔야 합니다."

해고 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회사는 우리가 사실과 다른 허위제보를 했고 경영권을 넘어 회사를 침탈하려는 중대 행위를 저질렀기에 중징계를 내리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해고됐다.
 회사는 우리가 사실과 다른 허위제보를 했고 경영권을 넘어 회사를 침탈하려는 중대 행위를 저질렀기에 중징계를 내리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해고됐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금방 통보될 것 같던 징계 결과가 나오지 않아 저희는 40일간의 대기발령 상태를 지속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1월 6일 결국 징계위원회가 열린 지 28일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지급되었던 태블릿 PC와 사원증을 반납하라는 공지와 함께.

해고 첫날, 저는 지금 평상시와 똑같이 아침 운동을 마치고 아이의 등굣길 라이딩을 한 뒤 사무실 대신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네요. 전에는 뭐 먹을까 고민하며 음식점 골목을 헤맸었는데, 이제는 집에서 뭐 해 먹을까 고민하며 가방 메고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누군가를 욕하기 위함이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냥 있으면 저는 노광준이라는 49세 해고자이지만 글을 쓰게 되면 저는 노광준이라는 해고자의 일상을 취재해 글을 올리는 작가 노광준이 되어 보다 짜임새 있고 객관화된 시각을 갖추게 될 것 같아서, 매일은 아니지만 틈틈이 해고일기를 올리고자 합니다. 과연 이 글의 엔딩이 어떻게 귀결될지, 하루하루 매 순간을 열심히 그러나 넉넉하게 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해고 첫날인 지난 11월6일 저의 페이스북에 쓴 글입니다.


태그:#경기방송, #친일막말, #해고, #불매운동, #라디오피디
댓글3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4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FM 99.9 OBS 라디오에서 기후 프로그램 만들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