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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1980.5.27
 5.18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1980.5.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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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되었을까 그는
 두 손이 묶인 채로
 어스름 저녁 쓸쓸히 그러나 당당히
 어디론가 사라져 갔는데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졌기에
 데리고 가는 사람들도
 말을 못하게 입을 막았다
 세월이 흘렀고
 우린 그 사이에
 아이도 낳고 책도 내고
 더러는 죽기도 하고
 여러 십년 목숨 부지하는 일이나 해왔는데
 잡혀가 혼백으로 떠도는 그대를
 가끔씩 생각하게 되는구나
 할 말 못하고 쓰러진 그대를
 다소곳이 떠올리는 이런 날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 김규동, 「자유를 위해 그는」, 상반부.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부상입히고 체포ㆍ납치하고 시신들까지 빼돌리는 만행을 저지른 계엄사는 5월 28일 상오 "계엄군이 광주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왔으나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조짐을 보여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을 투입하게 됐다"고 황당한 담화를 발표했다.

계엄사는 또 이날 하오 광주사태에 대한 2차 발표에서 계엄군 투입과정에서 무장 폭도 17명이 사망했고 295명을 검거, 보호 중이며 계엄군도 2명이 순직, 12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계엄사의 뻔뻔스러운 발표는 광주를 두 번 죽이는 짓이고 가짜뉴스였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이어 5월 31일 광주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관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127명과 군인 109명, 경찰관 144명 등 모두 38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밝히고, 기간 중 모두 1,740명을 검거, 1,010명을 훈방하고 730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 1980년 5월 2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
▲ 5.18민주화운동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 1980년 5월 2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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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 발표문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광주교도소 피습 당시의 교전으로 28명 ▲무기를 탈취한 난동자들의 음주, 과속운전으로 인한 전복, 충돌 등 교통사고로 32명 ▲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의 취급 미숙으로 인한 오발 사고에서 15명 ▲진압키 위해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무력저항에 따라 17명 ▲강ㆍ온 양파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한 상호 총격과 평소 원한에 의한 살해로 29명 등이며,

검거된 자들을 거주별로 보면 ▲전남 686명 ▲서울 26명 ▲기타 지역 18명으로 나타났고 연령은 ▲20세 이하 315명 ▲20대 310명 ▲30대 77명 ▲40대 이상 28명으로 분류했다.

또 직업별로는 ▲학생(고교ㆍ대학생) 153명 ▲무직 126명 ▲공원 83명 ▲노동 79명 ▲운전사 55명 ▲농업 47명 ▲상업 47명 ▲점원 44명 ▲회사원 37명 ▲기타 59명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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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부는 발표문에서 "9일간의 광주사태의 경위와 진상을 살펴볼 때 비록 발단은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다고 하나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 조종과 교묘한 선동을 통해 광주지역 시민들의 지역감정을 촉발, 흥분시킴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군중심리의 폭발로 유도돼 사태가 최악의 상황이 됐다"고 밝히고 "북괴고정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책동,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학생 소요사태를 배후 조종해 온 김대중이 광주의 전남대와 조선대 내 추종 학생들을 조종 선동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 됐다"고 했다. (주석 1)

계엄사의 발표 내용은 대부분이 사실과 동떨어진 수치였다.

군인ㆍ경찰의 사망자와 부상자 수는 부풀리고 민간인의 경우는 축소시켰다. 담화문 말미의 "김대중의 조종ㆍ선동"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모략이었다. 김대중은 신군부가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전국확대조처 이전에 이미 구속된 상태였다.

계엄군에 의해 영장도 없이 구속돼 삼엄한 경계속에서 열흘째 수사를 강행해온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광주항쟁의 책임을 뒤짚어 씌운 것은, '광주사태'의 의도성을 새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집권에 최대 걸림돌인 김대중을 제거하고자 광주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그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주석
1> 『한국일보』, 1980년 6월 1일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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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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