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시즌이 정말로 기대된다."

한국 시간으로 18일 새벽 막을 내린 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투어 파이널스 대회에서 준결승에 오른 뒤 패한 로저 페더러 선수가 남긴 말이다.
 
ATP 투어 파이널스는 4개의 그랜드슬램 토너먼트 다음으로 큰 시합이다. 테니스에서 제 5의 메이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다, 파이널스라는 말 그대로 한 해 시즌을 마무리 짓는 대회여서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페더러

페더러 ⓒ 위키미디어 커먼스

 
내년 시즌을 기대한다는 페더러의 말은 그래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준결승에서 만난 스테파노스 치치파스 선수에게 이긴 게 아니라, 지고서 한 얘기라는 면이 특히 흥미롭다.
 
치치파스는 페더러를 꺾고 결승에서 도미니크 팀을 만나 세트 스코어 2-1로 물리치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투어 파이널스는 왕중왕 성격의 대회로 랭킹 상위 8위까지 선수가 치르는 대회인데, 치치파스는 이번에 참가한 8명 가운데 가장 젊은 만 21세로 왕관을 썼다.
 
올해 투어 파이널스 대회는 내년 시즌은 물론이고 향후 짧게는 5년 혹은 그 이상의 세계 테니스계 판도를 가늠해 볼만 한 '정보'들이 풍부하게 담겨있어서 눈길을 끈다. 결산이 곧 전망이기도 한 이유이다.
 
 나달

나달 ⓒ 위키미디어 커먼스

   
'빅3' 균열은 시작됐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는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황금세대를 연 주역들이다. 페더러가 윔블던에서 첫 우승을 일궈낸 2003년 이후 올해까지 이들 세 선수는 그간 열린 66번의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55개의 우승컵을 가져갔다. 약 17년 동안 이렇게 많은 그랜드슬램 대회를 단 3명이 휩쓸어간 일은 이전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빅3의 시대가 머지않아 서서히 저물 것이란 조짐이 이번 투어 파이널스 대회에서 드러났다. 이번 대회 참가 선수 8명 가운데 빅3를 제외한 나머지 5명 중 가장 나이 많은 선수는 도미니크 팀으로 26세였다. 그 뒤를 다닐 메드베데프, 마테오 베레티니(이상 23), 알렉산더 즈베레프(22). 그리고 치치파스(21)이었다.
 
빅3 가운데 가장 젊은 조코비치가 32세이니까, 영건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팀과도 6살 차이가 난다. 나달은 33세이고, 최연장자 페더러는 38세로 치치파스와는 17살이나 차이가 난다. 한마디로 조코비치와 팀 이들 두 선수 사이 연령대 선수들은 향후 이렇다 할 빛을 보지 못하는 낀 세대로 사라질 확률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빅3 외에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자로 현역인 선수는 앤디 머레이(32, 3회 우승), 스탠 바브링카(34, 3회 우승), 후안 마틴 델 포트로(31), 마린 칠리치(31) 정도이다.

이번 투어 파이널스 대회는 결국 빅3와 26세 이하 영건들의 세대간 시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랭킹 1위와 2위인 나달과 조코비치는 라운드로빈에서 떨어져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최연장자인 페더러가 유일하게 준결까지 올랐지만, 가장 젊은 치치파스에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고 완패했다.
 
빅3의 부진은 무엇보다 체력 요소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투어 파이널스는 연말 대회로써 시즌 내내 체력을 소모한 탓에 나이가 든 선수일수록 좀 더 지친 상태에서 대회에 임하는 경향이 있다. 나달과 조코비치의 경우 젊은 선수들의 빠른 발과 빠른 공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노출했다. 포인트를 빨리 끝내는 페더러와 달리 나달과 조코비치는 랠리의 달인이라고 할 만큼 많이 뛰는 경기 스타일을 보이는데, 체력이 과거와 같지 않으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조코비치

조코비치 ⓒ 위키미디어 커먼스

   
내년 시즌이 정말로 기대된다는 페더러의 말은 그러니 '내년에도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될 것 같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페더러의 경기 스타일은 랠리를 짧게 가져가고, 정확한 지점에 서브를 넣으며, 공을 반박자 혹은 한박자 빨리 잡아채는 걸로 요약할 수 있다.
 
젊은 선수들에게 체력에선 밀리지만, 내년에도 자신의 스타일로 톱 랭커들과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페더러는 최근 3~4년 동안 대회 참가 숫자를 현저하게 줄이는 방식으로 체력을 아끼며 경기에 나섰다. 지난해 호주오픈 우승과 2017년 호주오픈, 윔블더 우승 등 3회의 그랜드슬램 우승은 이런 '체력 안배'에 따른 소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페더러의 이런 전략은 역시 30대 초중반인 나달과 조코비치도 벤치마킹할 가능성이 짙다. 실제로 나달과 조코비치는 올 한해 부상 등의 이유가 있었지만 페더러와 마찬가지로 16개의 토너먼트에만 참가했다. 이번 투어 파이널스 참가자 가운데 가장 젊은 치치파스가 26개, 메드베데프와 즈베레프가 각각 23개, 베레티니가 25개, 그리고 영건 가운데는 가장 나이든 팀이 21개 대회에 참가한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빅3의 현재 나이 평균은 만 34.3세이고 내년에는 35세가 된다. 이번 투어 파이널스 참가 영건들의 평균 나이는 현재 23세이며, 내년에는 24세가 될 것이다. 결국 빅3와 그 뒤를 잇는 세계 랭킹 4~8위까지 5명의 평균 나이 차이는 11세 이상이 된다는 뜻이다.
   
 팀

ⓒ 위키미디어 커먼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제 변화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형국이다. 하지만 가까운 시일 빅3의 몰락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 균열은 시작됐지만, 바로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에 균열이 갔다고 해서 즉각 붕괴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고 있을 뿐, 빅3의 기량은 역시 전무후무할 정도로 빼어나다. 체력이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투어 파이널스 경기에서 젊은 선수들과 내용면에서 대등한 경기를 빅3가 보여줬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이들의 기량이 투어 최정상급 임을 반증한다.

테니스 최적 신장 상향하나

테니스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 아닌 논쟁 같은 게 있었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 선수 자신들마저도 주목하는 대목이다. 키가 바로 그 것이다. 빅3가 거의 20년 가까이 테니스계를 풍미하면서, 알게 모르게 테니스 최적 신장은 185센티미터 전후라는 암묵적인 동의 같은 게 있었다.
 
 메드베데프

메드베데프 ⓒ 위키미디어 커먼스

   
페더러와 나달의 신장이 바로 185센티이다. 조코비치는 188센티이지만 유달리 긴 목과 얼굴 탓에 조금 클 뿐, 어깨 높이는 나달이나 페더러보다 높지 않을 정도이다. 또 3번의 그랜드슬램을 우승한 바브링카는 183센티미터이지만, 유난히 목이 짧고 얼굴이 길지 않을 뿐, 어깨 높이는 나달이나 페더러와 전혀 차이가 없다. 또 빅3 등장 이전 절대 강자였던 피트 샘프라스 역시 185센티미터였다.
 
그런데 이번 투어 파이널스에 참가한 선수들은 대부분 키가 190센티미터를 훌쩍 뛰어 넘는 장신들이었다. 유일하게 팀만 185센티미터였을 뿐, 메드베데프와 즈베레프는 198센티미터, 베레티니는 196센티미터, 그리고 우승을 차지한 치치파스는 193센티미터이다. 팀을 제외하면 나머지 선수들은 빅3에 비해 약 10센티 정도 평균적으로 키가 크다.
 
테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 가운데 하나인 서브는 키에 대체로 비례한다는 게 정설이다. 또 서브가 센 선수들은 대개 포핸드 스트로크가 강력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키가 크면 발이 느리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최근 젊고 키 큰 선수들이 선전하는 건, 체중관리로 큰 키의 약점을 어느 정도 상쇄하는 탓이다. 단적인 예로 198센티미터인 메드베데프의 몸무게는 83킬로에 불과하다.
 
테니스 최적 신장의 대폭적인 상향을 단정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대체로 185센티미터 전후에 걸출한 선수가 많았던 지금까지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빅3가 퇴장한 뒤엔 어쩌면 190센티미터 전후에서 톱 랭커들이 많이 배출될 수도 있겠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즈베레프

즈베레프 ⓒ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 손 백핸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000년대 들어 테니스에 뚜렷하게 드러난 큰 변화는 양손 백핸드가 대세를 이뤘다는 점이다. 한때 최대 라이벌이었던 피트 샘프라스와 앤드레 애거시가 무대 뒤로 사라지면서, 세계 테니스는 양손 백핸드 독점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샘프라스는 한손 백핸드, 애거시는 양손 백핸드의 대표주자였다.
 
톱10 선수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손 백핸드를 구사하며 정상을 유지해 온 건, 페더러 뿐이었다. 페더러 역시 과거 "자녀들이 테니스를 시작한다면 양손 백핸드를 권유할 것인가, 한손 백핸드를 추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양손 백핸드'라고 답한 적이 있을 정도로 백핸드는 양손이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페더러는 그러나 최종적으로 선택은 자신의 몫이라며, 양손 백핸드가 한손 백핸드에 비해 절대적으로 나은 건 아니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백핸드를 양손으로 치느냐 한손으로 치느냐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예컨대 나달이 페더러와 맞대결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 데는 페더러가 한손 백핸드 나달이 양손 백핸드를 구사한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이다. 왼손잡이인 나달은 지면에서 크게 튀어오르는 탑스핀을 주무기로 하는 선수인데, 한손 백핸드의 결정적 약점 가운데 하나는 탑스핀 공격에 대한 대응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베레티니

베레티니 ⓒ 위키미디어 커먼스

 
나달은 페더러와 경기 때 승부처에서 보통은 70퍼센트 안팎, 심할 때는 90퍼센트 이상을 탑스핀으로 페더러의 백핸드 쪽을 공략했다. 이 전략은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페더러는 경기 전 어떤 플랜을 갖고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손 백핸드는 이 정도로 톱스핀에 무기력한 단점이 있다.
 
투어 상위권 선수들 가운데 양손 백핸드와 한손 백핸드의 비율은 적어도 8대2, 심할 때는 9대1 이상 비율로 양손 백핸드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이번 투어 파이널스에서 양상은 사뭇 달랐다.
 
8명의 참가자 가운데 한손 백핸드가 '무려' 3명에 이르렀고,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모두 한손 백핸드 구사 선수였다. 현대판 한손 백핸드의 원조인 페더러야 말할 것도 없고, 우승자인 치치파스와 준우승한 팀이 바로 한손 백핸드로 최상위급 랭킹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준우승한 팀은 원래 양손 백핸드로 시작했으나, 코치와 본인의 뜻에 따라 중간에 한손 백핸드로 바꾼 경우이다.
 
특히 팀과 치치파스의 한손 백핸드는 포핸드까지 포함해 투어 선수들의 스트로크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꼽힐 정도로 빼어나다. 나달과 같은 톱스핀 전문, 그것도 왼손잡이를 만나면 한손 백핸드가 상대적으로 고전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공격시 탑스핀의 양과 공의 스피드에서 한손 백핸드는 두손 백핸드가 흉내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파워를 낼 수 있다.
  
 치치파스

치치파스 ⓒ 위키미디어 커먼스

 
치치파스와 팀 외에도 빅3의 틈바구니에서 3차례 그랜드슬램 우승을 일궈낸 스탠 바브링카도 한손 백핸드의 달인으로 꼽힌다. 바브링카의 한손 백핸드는 투어 선수 전체 스트로크 즉, 포핸드와 백핸드 스트로크의 속도에서 최상위를 기록할 정도로 가공할만하다.
 
치치파스와 팀이 계속해서 상위권에 머무른다면, 퇴물로 여겨졌던 한손 백핸드가 부활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마치 페더러로 인해, 부활한 이스턴 그립과도 비유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스턴 그립은 한때 초보자 그립으로 알려졌고, 세미 웨스턴에 밀려 선수들 사이에서는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포핸드 스트로크를 주무기 가운데 하나로 하는 페더러가 롱런하면서 이스턴 그립에 대한 재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수비 국면에서 약점도 뚜렷하지만, 슬라이스와 스트로크 겸용 면에서 유리하고 시간 여유가 있는 공격 상황에서는 가공할만한 탑스핀과 속도를 낼 수 있는 한손 백핸드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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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치치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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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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