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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였나. 엄마가(1936년생, 만83세) 당신의 지난 시절을 자꾸 들먹이기 시작한 게. 당신의 어릴 적 얘기를 자주 꺼내기 시작한 게. 어쩌다 찾아와 삐죽 인색하게 얼굴을 보여주는 맏딸(만56세)을 붙들고 앉아, 어릴 때 살았다는 집을 그리기도 했다. 묵은 달력 뒷면에다 삐뚤빼뚤.
 
 엄마가 15살 때까지 살았다는 고향집을 그리신다
 엄마가 15살 때까지 살았다는 고향집을 그리신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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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갈수록, 지나간 어떤 시간들이 엄마를 그리움으로 사무치게 만드는 걸까, 회한에 젖게 만드는 걸까. 엄마는 자꾸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 한다. 얼마 전에도, 모처럼 집에 들른 내 앞으로 또 묵은 달력과 몽당연필을 들고 나왔다. 나는 얼른 캠코더를 꺼내왔다. 그 삐뚤빼뚤한 평면도와 엄마의 늙은 목소리를 영상으로 담았다.

"은경아, 있잖니. 집이 이렇게 생겼잖냐... 여기는 부엌... 여기는 찬광... 여기는 나무로 깎아서 이렇게 만든 창이 있어. 옛날에는 유리가 없었으니까... 여기는 또 들마루 이렇게... 나무광이 있고... 요기 안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이 있었어... 아버지 하고 어머니는 건넛방, 언니하고 나하고는 윗방, 안방에는 할머니 주무시고 남동생 둘이랑 여동생은..."
  
 엄마가 그리시는 엄마의 옛날 고향집
 엄마가 그리시는 엄마의 옛날 고향집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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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닫이문 한 짝까지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그렸다. 본채와 사랑채, 헛간과 뒷간까지 건물을 다 그리고는 빙 둘러 나무와 꽃을 심었다.

"여기 주욱 복숭아나무가 있었어. 참죽나무 몇 그루가 여기에 섰었어. 여기는 봉숭아니 채송화니 꽃들이... 여기에 또 큰 살구나무가 있었어. 복숭아나무들이 있고, 여긴 큰 배나무가 있었어. 독배라고... 사과나무, 매화꽃나무, 모과나무가 여기 있었고. 함박꽃나무가 있고, 여기다가는 더덕을 심었는디 더덕이 썩어서 읍써지면 그때는 으른들이 더덕이 동자 돼서 도망갔다고 했어. 여긴 오야나무, 지끔은 자두라고 하지? 여긴 감나무... 하여튼 내가 잊어버려서 그렇지 나무들이 더 많았어. 여긴 불두화, 저기 저 백일홍나문가? 배롱나무, 그 전엔 간지럼나무라고 했어. 어! 토방을 안 그렸네. 여긴 댓돌..."

"엄마, 이 집이 어디에 있었어?"
"운산면 용연리 1구... 지금은 동네가 다 읍써졌지."

"여기서 살 때가 엄마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어?"
"그랬지. 좋았지.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는 노래 가르쳐주고 엄마는 유희 가르쳐주고... "

"엄마, 거기 가볼까? 멀지 않잖아. 오늘 날씨도 좋고."
"그래 가보자. 가서 엄마 울면 어떡할래? 엄마 아빠 생각하고 울면..."

엄마의 눈시울이 벌써 살짝 붉어졌다. 여든 줄의 늙은 엄마가 어린아이처럼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운다면.

"같이 울지 뭐... 가자, 엄마!"

나는 캠코더를 챙겨들었다. 그렇게 노부모와 특별한 나들이를 나서게 됐다. 날씨 화창한 초가을 어느 날. 그때까지 나는 엄마의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 몰랐다. 지척에 있었음에도.

아버지가 (1934년생, 만85세) 운전대를 극구 잡았다. 아무래도 위험한 동행이다. '운전 그만 할 때다'하면, 아버지는 진정 모욕당한 사람처럼 인상을 쓰신다. 그래, 마지막으로 타드리자.

당진 시내를 빠져나가 647번 지방도로를 탔다. 차창 우측으론 황금빛 평야가 스쳐갔다. 좌측으론 상왕산과 일락산이 가야산으로 이어지며, 초지 능선이 굽이굽이 뻗어갔다. 평화롭게 풀을 뜯는 누런 소떼들도 지나갔다. 이국적인 목장의 풍광과 마을을 지나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가는 내내 차안에서 옛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고향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하다 하시지만, 딸이 어느 때보다도 얘기를 잘 들어주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지식인이었고 진실하고 곧고, 하여튼 내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참 좋으신 분이셨어. 우리들 키울 적에도 한번 이년 저년 소리를 안 하셨어. 잘못하면 사매로 안 때리고 네가 이거 이거 잘못했고... 그래서 나도 니들 그렇게 키웠잖니..."

엄마가 15살 때까지 살았다는 산골 고향마을. 도착해보니 50여 가구가 살았다는 엄마의 고향은 수몰지였다. 저수지로 향해 언덕길을 내려가며 아버지가 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휘청휘청 노인 걸음을 떼며.

"저 아래에 동네가 있는 겨?"
"동네는 읎지. 저수지 됐잖어."

엄마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듣지 못했다.

"저 물 위에서 살았다는 얘기여?"

내가 목청껏 소리 지르며 끼어들었다.

"아니, 물에 잠겼다고!"

아버지는 귀가 많이 깜깜해지셨다. 의사소통이 불편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보청기 착용은커녕 청력 검사조차 손사래를 치신다. '노인네처럼 무슨 보청기는...' 라며. 당신 마음은 '만년청년'이시다. 인생의 막바지 단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걸까. 그 시기엔 몸과 정신이 모래섬마냥, 산들바람만 스쳐도 사르르 무너져 내린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나,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나. 고집이 보통 아니시다.

"그거 고지 안 들린다! 집 한 채도 읍써 지금?"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물었다. 농담을 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곧바로 걱정 섞인 엄마의 타박이 이어졌다.

"읎지. 아이구~ 우리 할아버지, 그런 것도 이해 못 허고 어떡헌댜?"

나는 두 분을 향해 들고 있던 캠코더 렌즈를 아래쪽으로 휙 돌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모의 모습이 프레임 안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진달래, 산벚꽃, 자작나무 같은 교목과 잡목들로 에워싸인 저수지가 들어왔다. 한 계절 끝에서 푸른 기운을 떨치고 있는 나뭇잎들과 저수지의 수면이 뿌옇게 흔들렸다.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는 피사체들. 마치 먼 과거의 아련한 기억들처럼. 아직 조작법이 서툰 '디지털 4K 비디오 캠코더'. 아버지가 지난봄에 내게 넘겨준 고가의 기기다.

저수지 주변을 서성이면서 엄마는 옛날이야기들을 계속 쏟아놓았다.

" ... 산으로 버찌 따러 다니고 밤에는 광솔 불 켜 갔고서 내로 고기 잡으러 다니고... 여기, 여기에 가재가 깔렸었는데..."

엄마는 늑대와 여우가 마을을 어슬렁대던 그 시절의 흔적들을 찾고 싶어 했다.

"저기, 추석 때면 올라가 놀았는데 바위가 안 보이네... 저기, 저기가 집 있던 자린디... 거기서 운산 국민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마을(저수지)은 사방 야트막한 구릉과 숲으로 폭 에워싸여 있었다. 세상 아늑하고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한국전쟁 때도 큰 변고를 치르지 않았다는 마을. 50여 가구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중중 땋은 머리에 댕기를 매고 무명한복을 입고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는 엄마 모습도 환영처럼...

"엄마, 여기서 살던 때 일들을 다 기억해?"
"옛날 거는 다 생각나지. 아주 생생하지. 눈에 선해. 지금 거가 왔다갔다 하지. 지금 일들이 깜박깜박 하지..."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목장 언덕길을 올라가며 엄마는 노래를 불렀다.

"나의 ~ 살던 고향은~ 꽃피는 ~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그 특별한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지리산 집으로 돌아와 그날 찍은 영상을 편집했다. 영상을 보며 왠지 가슴이 미어져내려 자꾸 눈물이 났다.
 
 나의 살던 고향은~~ 노래를 부르며 언덕을 오르는 엄마
 나의 살던 고향은~~ 노래를 부르며 언덕을 오르는 엄마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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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정말 그 고향마을에서 살았던 15살 때까지가 가장 행복했겠다. 그러니까 해방 후 사회주의 운동을 하셨다는 엄마의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게 됐다. 19살 때까지 식모살이(가정부)로, 26살 때까지는 방직공장에서 잠 안자며 뼈 빠지게 돈을 벌었다.

한 가족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를 전부 책임졌다. 그리곤 가진 것 없는 남자와 결혼했다. 셋방살이 전전하며 사남매를 키웠다. 별별 막노동을 다 하며 안 먹고 안 써, 가까스로 1만여 평의 야산을 마련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 사과밭으로 동 트자마자 나가 날이 어둡게, 발바닥이 다 터지도록 일했다. 그러면서 하루 세 끼 식구들 조석을 빠짐없이 차렸다.

무겁고 고단하고 신산했을 엄마의 일생을, 나는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 했을까. 내 삶이 너무 피곤하고 고생스러웠나. 자기연민에 빠져 징징거리느라 눈가가 짓물러 엄마의 시간을 거들떠보지 못했나. 그런데 이제 대단할 것 없어 보였던 그 한 사람의 일생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근현대사 속의 그 어떤 역사적인 기록보다도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지. 한참 영상 편집에 빠져 있는데,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엄마 고향마을 찾아 특별한 나들이 나온 노부모
 엄마 고향마을 찾아 특별한 나들이 나온 노부모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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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아, 네가 왔다가니 많이 허전하다... 밥 잘 먹고, 운동 꼭 하고..."

그러면서 아버지가 우셨다. 나는 깜짝 놀라 그저 목청만 빽빽 높였다.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지금도 새벽이면 매일 조깅을 나가고, 고혈압이니 당뇨니 하는 성인병 하나 없는 분이지만... 마음이, 정신이 먼저 심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세 편으로 나눠 편집한 영상을 유튜브 '은경씨 놀다'에 올렸다. 지난 8월 초에 시작한 유튜브. 아버지의 '디지털 4K 비디오 캠코더' 때문에 본격적으로 빠진 새로운 작업이었다. '나는 더 이상 못 하겠다. 네가 잘 써봐라. 최신형이야. 새 거로 바꿔 몇 번 안 썼다'라며 건네준 물건. 더는 기기조작법을 익힐 수 없고, 컴퓨터까지 사양 높은 거로 바꿔봤지만 더는 이미지를 다운받고 CD로 저장하는 방법도 어려워 도저히 못하겠다며.
 
 아버지가 촬영한 영상들이 저장된 테이프.
 아버지가 촬영한 영상들이 저장된 테이프.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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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영상 촬영이었다. 무슨 행사 때나 나들이 길이나 빠트리지 않고 캠코더를 들고 나갔다. 물론 그 보다 주로 집에서 식구들을 찍었다. 먹고 자고 떠들고 웃고 울고... 별 것 아닌 일상의 모습들을.

아버지는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던 걸까, 기억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식구들의 그 일상이 당신에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었나. 가장 예쁘고 기쁜 장면들이었나. 다음에 집에 가면 오래된 아버지의 테이프와 CD를 꺼내 같이 봐야겠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의 캠코더 때문에 유튜브 라는 '창작놀이'에 빠졌다. 편집을 어렵게 배우고... 주로 나의 소소한 일상을 찍어 올렸다.

'결국 인생의 목적이란 최대한 경험하고, 보다 새롭고 다양한 일에 두려움 없이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 엘리너 루스벨트'
 
 아버지가 촬영한 영상들을 저장해 둔 CD들
 아버지가 촬영한 영상들을 저장해 둔 CD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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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노부모처럼 하던 일마저 하나하나 내려놓아야 할 그 나이가 되면, 사는 게 그저 내적 외적으로 망가져가는 일만 남은 것 같은 시간이 오면, 나는 나의 지나간 삶 속에서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게 될까. 무엇을 그리워하며 위안을 받게 될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유튜브 올렸어."
"아이구, 딸 때문에 내가 유명해지겠네. 호호호!"

"아니, 그건... 엄마, 날 많이 추워졌어. 새벽예배 갈 때 목장갑 꼭 끼고 가. (엄마는 새벽예배 오가는 길에 길거리 쓰레기들을 줍는다.) 엄마, 벚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엄마 고향에 같이 가요. 꽃비 맡으며 걸어요. 그러니까 건강하셔야 돼요."
"그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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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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