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8 19:44최종 업데이트 19.11.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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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 청사 ⓒ 한세웅

 
역사교사가 되겠다며 유난히도 역사에 집착하던 학창시절. 그런 나에게도 피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부분으로 페이지가 넘어가려고 하면 그때까지 유지되던 '무아지경'의 집중력이 흩어지면서 엉덩이가 뻐근하고 골반이 돌아가 집중하기 힘들었다. 읽고 읽어봐도 가슴이 뚫리기는커녕 막힌 하수구처럼 마음이 좁아졌고 숨길도 닫혀버렸는지 날숨만 연신 씩씩거렸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고작 50여 쪽의 문장과 사진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 심신이 이리 고단한 것을, 그들은 어떤 마음과 몸으로 그 시대를 읽어나갔을까? 그러는 찰나, 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주최하는 역사탐방의 소식을 듣고 난 그들의 마음과 몸을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때는 1930년대 초, 한 국가 정부의 청사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 건물과 다를 바 없는 이 왜소한 건물이 임시정부 청사였다. 혼란했었던 중국과 달리 열강들의 법이 적용되는 상해의 조계 지역은 혁명가들에겐 인기 있는 모처였기에 건축물이 협소해지게 되었고 임시정부의 청사 또한 그런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19년의 만세 소리의 함성에 화려하게 선포된 임시정부이건만, 불과 10년이 넘는 사이에 서로의 주장과 분열만 남은 채 임시정부는 와해되어갔다. 월세를 마련할 길이 없어 임정 요원들의 부인과 가족들은 상해시장에 채소장사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고 그 월세마저 내지 못해 상해에서만 12번의 이사를 해야만 했다. 

고민하던 김구에게 답을 준 건
 

상해 임시정부 청사 1층 부엌 ⓒ 한세웅


절망에 휩싸인 김구 선생은 1926년 마지막 청사 이전 후 미국·쿠바·멕시코의 사탕수수 농장 동포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임시정부의 재정으로는 그 어떤 독립운동 활동도 불가능함을 말하며 헌금을 부탁한 것이다. 이 편지에 동포들은 적은 월급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보내기 시작했고 그 귀한 돈을 1년 가까이 저축한 끝에 의열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누가 목숨을 바쳐 의열 투쟁에 나설 것인가? 2층 청사에서 밤마다 계속 고민하던 김구에게 답을 준 건 다름 아닌 1층으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 옆 주방을 뚫고 나온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주방에서 술에 취해 큰소리로 떠들던 한 청년은 다른 임시정부 요원에게 먹을 것과 술을 나누던 중이었다. 

"독립운동한다는 양반들이 왜 일본 천황을 죽이지 못한단 말이오?" 

얼굴이 벌게져 큰 소리로 외치던 이 청년은 용산 출신의 이봉창이었다. 일본 거주 시절 직접 천황의 행차를 본 기억이 있던 이봉창은 임정 요원들과 주방에 둘러앉아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했고, 이 소리는 작디작은 청사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김구는 좁은 계단을 향해 얼굴을 내밀며 이봉창을 불렀고 그들은 밤새 술을 먹으며 의열 투쟁을 계획했다. 일본 군부의 만주사변 다음 해 1932년 1월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 천황의 마차에 작은 수류탄이 날아왔다. "펑!" 이봉창의 의거였다. 해외 동포들이 구입해 전한 수류탄은 안타깝게도 폭발 위력이 크지 않아 의거는 실패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봉창의 천황 폭살 시도를 보도한 중국 <국민일보>는 "不幸不中"(불행히 명중시키지 못했다)라는 기사를 썼다. 만주사변 이후 반일감정이 높아지던 중국의 여론이 반영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광기를 향해 내달리던 일본의 군부는 만주사변 이후 고립된 국제정세를 타개하고자 이 기사를 명분으로 삼아 상해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참전 병력 10만에, 거대 군함 80척, 군용 비행기 300대가 투입된 대전투였다. 

결국 중국의 항복과 외세의 중재로 전투에 승리한 일본은 만주사변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을 뿐만 아니라 일본 천황을 언급한 중국을 응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일본 내 군부세력들은 점차 전쟁의 광기에 도취되어 갔다.

이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식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 축하를 겸해 웅장하게 계획되었다. 호위 병력만 1만, 관중은 2만으로 구성된 이 행사는 하루 종일 진행될 예정이었던 터라, 참가자 전원은 두 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도시락과 일장기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 속 조금 달랐던 한 청년
 

홍커우 공원 입구(현재 루쉰공원) ⓒ 한세웅


행사 당일 훙커우 공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일장기와 도시락을 들고 공원에 입장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 속에 조금은 다른 청년이 있었다. 기쁘거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아닌 조금 경색된 표정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던 그는 윤봉길이었다.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의거를 자원해 투입된 그는 행사 단상과 불과 15m 거리에 있는 줄에 위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군부의 자축이 담긴 지겨운 발언들이 끝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던 때였다. 새빨간 일장기 수만 개를 흔들며 국가를 열창하는 일본 국민들 사이로 윤봉길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던진 물병 폭탄은 단상 위에 정확히 떨어졌고 그 결과 상해사변의 주도자이자 대장이었던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쓰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자폭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 폭탄을 꺼내고자 다시 자리로 뛰어오던 윤봉길은 주변 헌병들로부터 구타를 당했고, 결국 붙잡혔다. 고통스러운 고문과 심문의 연속 중 일본 측 인사가 윤봉길에게 물었다. "너 같은 청년 하나가 폭탄을 던진다고 독립이 되겠느냐?" 이에 윤봉길은 답했다. "나 하나로 독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수천 명 더 나올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윤봉길은 압송되어 총살되었다. 

이 의거의 현장인 훙커우 공원은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많은 중국인들이 찾는 곳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답사를 간 날은 날씨가 좋아 많은 중국인이 태극권과 같은 스트레칭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평화로운 공원을 걸으면서 나는 번지점프를 하기 전 느꼈던 공포와 소름을 경험했다.

'답사라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를 시작으로 과거를 복원해 보는 것'이라던 전공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수만 명의 일본인들과 군인, 일장기 속에 의거를 향해 걷던 대한의 청년 마음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윤봉길의 의거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재청 별장 ⓒ 한세웅


윤봉길의 의거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첫째 일본의 탄압이 더 심해졌다. 열강들의 독자적인 법이 적용되는 조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임정 탄압은 점차 심해졌고 심지어는 김구를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된 김구는 상해를 떠나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둘째로는 중국 민중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피난길을 도운 것은 중국 국민당에 소속되어 있던 저보성이었다. 저보성 며느리의 길 안내를 받으며 피난길에 오른 김구는 재청 별장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 재청 별장은 주변 풍경이 수려하고 숲이 조성되어 있다. 재청 별장에서 생활한 지 5개월여 만에 일본 암살단에게 위치가 노출돼 김구는 결국 다시 가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별장에는 김구 선생님의 둘째 아들인 김신 장군께서 만드신 비석이 있다. '飮水思源 韓中友誼(음수사원 한중우의)'. '물을 마시기 전에 그 근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라'는 이 말에는 험난했던 독립운동 시절 중국의 도움을 잊지 말고 그 우의를 두텁게 유지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비석을 보며 난 두 가지를 느꼈는데, 첫째 우리 독립운동사의 활동 배경이 되었던 중국이라는 나라가 만약 그 공간을 제공해주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의 역사가 바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둘째 다른 나라의 도움을 얻어야만 했었던 지난날의 어려움을 우리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난생활을 마친 김구는 항주로 와 국민당 장개석과 면담을 하게 된다. 장개석은 당시 중국의 일인자로 이 만남의 결과에 따라 중국 내 활동하던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생활과 활동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면담이 시작되고 국가와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은 필담을 이용하여 의사를 소통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임정을 지원해주면 일본-조선-만주로 이어지는 침략선을 끊어 놓겠다고 주장했고 장개석은 "그러지 말고, 군대를 만드는 것은 어떻소?"라고 말했다. 이에 반색한 김구가 말했다.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라던 바입니다."(不敢請固所願, 불감청 고소원) 이 면담의 결과, 항주에 임시로 사용하던 청태제 제2여사를 벗어나 새로운 임시정부 청사가 생겼고, 한국독립당의 건물도 생기게 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이 이어지게 되었다.

역사 교과서에 담긴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라는 내용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을 탐방에 참여하면서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첫째는 광복군의 탄생과 그 실상이었다.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낙양 군관학교가 만들어졌고 한인들이 훈련을 받아 군인으로 양성되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흐름으로 인하여 김원봉 또한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만들어 훈련을 진행하였다. 산 속에 있는 훈련 장소는 길이 험하고 어지러워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우리 탐방단을 반기던 리본 표지가 붙어 있었다. 친절한 한글로 작성된 표지에는 다양한 학교와 단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반가운 표지를 따라가면 작은 건물 하나가 나온다. 
 

김구 선생 피난에 도움을 준 분들 ⓒ 한세웅


건물의 창문틀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건물 안에는 청룡사라는 절로 이용되었을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이후 삼림 관리를 위한 관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잠시 작은 묵념을 하고 당시 광복군들의 군가를 힘차게 불렀다. 그 시간까지 한 7분 지났을까? 7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탐방단 전원이 여기저기서 고통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산모기들의 식사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탐방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탄 뒤 여기저기서 모기약을 온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나도 간지럽고 고통스러운 마음에 모기약을 손에 쥐었지만, 이내 약을 뒤로 전달했다. 당시 이름 모를 중국의 산에서 모기에 뜯기며 고된 훈련을 받았을 청년들을 생각하니, 내 나약한 모습이 부끄러웠고 죄송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시간에 따른 청사 건물의 변화이다. 상해 청사의 경우는 월세로 거주하던 아주 작은 주택 같은 느낌이라면 항주에 있는 청사는 정부 건물이라는 느낌이 난다. 임정 요원들의 거주지 또한 마련되어 있어서 집단 거주도 가능했고, 가흥에 있는 김구 피난처 같은 경우에는 널찍한 강가 풍경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김구 선생의 침대 아래에 비밀통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비밀통로를 열고 아래로 내려가면 나룻배가 준비되어 있는데 그 배를 타고 언제든지 탈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정부의 지원은 이전까지 체계적이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에 활력을 부여했고, 광복까지 줄기찬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는 연안 지방에 합류해 항일전쟁에 참전했고 임시정부의 대한 광복군은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와 합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며 35년간의 독립운동은 끝이 나게 된다. 이 모든 결과는 이봉창의 의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영웅이었지만 사람이었고, 평범했지만 비범한 삶을 살았다

역사 교사로 교단에 설 때면 난 알 수 없는 자부심에 도취되고는 한다. 지난 역사의 위대한 위인들이나 대중의 위대한 행동들을 말과 행동으로 전달하며 난 어느새 이순신 장군이 되거나, 용감한 의병이 되어 아이들에게 그들의 고민, 생각, 행동을 전달하는데,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전율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올 때 가끔 공허함이 몰아쳐온다. '나라면 과연 그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던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때때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행동에 따르는 불이익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물 그 자체에 대한 영웅화 혹은 신성화에 가까운 나의 수업과 인식이 인물에 대한 거리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역사적 인물들을 신화 속 인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탐방에서의 장면들이 생각난다. 몸 하나 제대로 세울 수 없던 상해 청사, 좁은 탁자, 채소장사를 위해 새벽에 일어났을 임정 요원들의 가족, 의거를 위해 걸어야 했던 수많은 인파 속 공원길, 암살단을 피해 숨어들었던 별장, 장개석과의 만남을 위해 한숨도 잘 수 없었던 호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에 만들어진 비밀통로, 광복 후 임정 요원들이 태극기에 새긴 소감 등등... 

그들은 영웅이었지만 사람이었고, 평범했지만 비범한 삶을 살았다. 나는 역사교사로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가? 이번 탐방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이번 탐방으로 내가 얻은 궁극적인 의문이자 정답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가르치는 평범한 나와 평범한 제자들이 비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가치 있는 질문 아닐까?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풍양중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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