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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가 나를 멀리서 봐도, 옷만 보면 알아보고 인사한다. 10년 째 입는 재킷, 7년 넘은 점퍼에 6년 전 산 트렌치코트. 외투뿐 아니라 다 합쳐 10벌 남짓한 셔츠나 바지, 원피스도 수 년째 비슷한 옷이다. 매번 고만고만한 옷을 입으니 어지간히 소원한 사람이 아니면 못 알아 보기도 어렵다.

새 옷을 잘 장만하지 않는 이유는 옷이나 머리, 화장에 큰 공 들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멋도 부리던 사람이 부릴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주는 대로 불평 없이 옷을 입었다. 그 버릇, 남 못 주었다. 30대를 넘겨서도 옷 고르기는 여전히 어렵다.

한때는 잘 꾸며보려고 갖은 애를 쓰기도 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꾸미는 것도 능력이라면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사람이 더 잘 할 거라 생각했다. 머리도, 화장도, 옷도, 유행따라 볶고 바르고 입어봤다. 하지만 영 어색했다. 발버둥쳐도 내 모습이 더 나아지지 않았다. 왜 난 꾸며도 별로일까.
 
유행하는 옷, 머리, 화장은 늘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글을 쓴 후 깨달았다. 좋아하는 옷 몇 벌만 남겨둬도 충분했다.
 유행하는 옷, 머리, 화장은 늘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글을 쓴 후 깨달았다. 좋아하는 옷 몇 벌만 남겨둬도 충분했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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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마음 편히 촌스럽게, 낡게 다닌다. 더 나아지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뿐이다. 어색하지 않은 쪽을 택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흡족해 하는 게 자존의 첫 단계였다. 결국 좋아하는 옷 몇 벌만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옷 한 벌이 구멍나고 닳아 떨어져 버렸을 때, 새 옷을 한 벌 들였다.

수수한 모습을 애써 손질하지 않아도 마음 편히 사는 건 글쓰기의 힘이다. '너는 틀렸다', '너는 잘 살지 못 하고 있다', '너는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라며 내 삶이 멋대로 재단 당할 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요, 제가 왜 이렇게 살고 있냐면요"라고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용모와 복장 등 시각 이미지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메라비언의 법칙이 정답이라면, 나는 오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유일한 정답은 없다. 그러니 고작 수 년째 입는 같은 옷을 오답 취급 할 순 없었다. 획일된 기준과 조금 다른 삶의 지점을 글로 풀어냈다. 그제서야 살 것 같았다.

육아 우울을 메워주던 마음의 산후조리, 시민기자 되기

그렇게 2년 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첫 글을 썼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즈음 되던 2017년 겨울이었다.

첫 기사의 주제는 '남편과의 불행배틀'이었다. 일하고 온 남편이 더 피곤한지, 두 아이들과 종일 씨름한 내가 더 피곤한지 겨루던 이상한 경연대회였다. 승자도 패자도 있을 리 없었다. 회사 일이나 돌봄노동이나 나름의 고충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관련기사 : 남편과의 '불행배틀', 동네병원에서 얻은 위로]

글을 쓰면서 정리했다. 불행배틀의 결론은 승패가 아니라 경청이었다. 고통을 토로할 때 들어주기만 해도 속이 풀리니까 말이다. 더 힘이 되었던 건 누가 내 글을 받아주었다는 점이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정식 기사로 채택해 주었고, 또 누군가는 독자로서 글을 읽고 공감해주었다. 잉꼬 부부의 모습 아닌 속 좁은 부부의 유치한 불행배틀마저도 누군가는 환대해 주었다.

부족함도 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틈만 나면 글을 썼다. 어설픈 게 많은 사람인지라 쓸 얘기가 많았다. 아이가 잘 때야 겨우 허락되는 한 줌 시간이었다. 잠 든 100일 된 둘째를 안고, 나는 서서 책장 위에 노트북을 폈다. 허리가 아파 산후조리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일상은 허전하기만 했던 육아 우울을 메워주던 마음의 산후조리였다.

다음으로는 돈 이야기를 꺼냈다. <최소한의 소비> 연재를 시작해 보았다. 처음에는 남들이 쉬쉬하는 '돈 안 쓰는'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겁이 났다. 하지만 쓰고 싶었다. '돈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담론이 아무렇지 않게 도시괴담처럼 퍼져다니기에 쓰고 싶었다.

[☞ '최소한의 소비' 연재기사 보러가기]

'고비용=최선의 결과'라는 세상의 기준을 되물었다. 상식에 반문했다. 교육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면서 아이를 길러야 잘 기를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아이의 한글 떼기, 아이의 체육 놀이, 아이의 여가 시간에까지 돈을 지불한다고 해서 아이가 잘 크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돈을 많이 쓴다고 해서 가장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부모'의 의미도 다시 정리했다. 정의를 재정의했다. 좋은 부모란 뭘까? 아이에게 지갑을 서슴없이 열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부모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간 나는 갖은 체험형 교육 시설에 부지런히 돈을 쓰는 부모 노릇을 이상적이라 생각해왔다.

좋은 부모가 단 한 가지 유형일 리는 없다. 글을 쓰며 좋은 부모의 범위를 넓혔다. 지갑 닫고, 두 손, 두 다리를 건강하게 움직이는 부모야말로 전문가 사회가 공고해질수록 가치로워질 거라 정리할 수 있었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에 최선의 상품을 마련해주는게 최선일까 고민했다. 글을 쓴 후 콩알 몇 개를 가지고 놀이터로 나오는 부모가 되기로 했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에 최선의 상품을 마련해주는게 최선일까 고민했다. 글을 쓴 후 콩알 몇 개를 가지고 놀이터로 나오는 부모가 되기로 했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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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대로 살지 못 하고 있는 내 모습은 글감이었다. '내가 틀렸다'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이유를 정리했다. 그러면 언제나 나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었다. 사람 사는 모양은 100이면 100, 조금씩 달랐으니까. 그 다른 지점을 글로 풀어내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됐다. 돈 안 쓰는 이야기를 마음껏 꺼낸다. 화려한 키즈카페에서 찍은 아이 사진보다 콩알 몇 개로 한참 노는 아이 사진을 볼 때 더 흡족하다. 유명한 맛집의 우아한 파스타 사진보다 찐 양배추 옆에 쌈장을 한 숟 가락 덜어놓은 집밥 사진에 마음이 간다.

소비와 절약. 어느쪽으로든 치우친 게 좋을 리는 없다. 중용의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소비보다 절약이 내 인생에 도움되는 건 분명했다. 행복은 소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행복은 안정감에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글을 쓰면서 알았다. 낡은 재킷을 새 것으로 바꾸지 않아도 흔들림 없는 역전된 이 상황, 꽤 만족스럽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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