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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엑스값을 처리해야 등값을 이루는 생활방정식
▲ 살림 누군가 엑스값을 처리해야 등값을 이루는 생활방정식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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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더부살이하는 집에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다. 딸은 대학생, 아들은 고등학생인데 둘의 등교 풍경이 한 지붕 아래라 하기에 영 딴판이다. 

딸은 알람을 맞춰 놓고 시간 맞춰 일어난다. 식사하는 것을 거를 때가 많지만 먹게 되면 알아서 챙겨 손 갈 일이 적다. 

아들은 몇 번을 깨워야 겨우 방에서 나온다. 그가 늦장을 부리는 동안 엄마는 식탁을 차린다. 식사를 마친 아들은 먹은 것을 그대로 두고 씻으러 간다. 하루는 아들이 빨랫감을 수북이 내놓길래 저보고 좀 하랬더니 자기는 세탁기 사용법을 모른단다.

다른 일화다. 사회 운동을 하는 활동가 한 분과 수다를 떨다 지인의 부부싸움 이야기가 나왔다. 싸움의 전말은 그랬다. 시장한 남편이 아내에게 냉장고 빈 거 아느냐고 물었다.

"빈 걸 봤으면 본 사람이 채우지 왜 내 탓인 듯 말해?"

반박 불가능한 아내 논리에 "장가들기 전처럼 아침상 받고 싶다"는 무리수를 던졌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나는 노냐."

이 이야길 듣던 활동가가 자기도 '돕고' 싶은데 냉장고 채우는 법을 몰라 못하게 된다고 강변했다. 그때 알았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몰랐구나. 다들 이번 생은 처음일 텐데 아내는 맡고 남편은 돕는구나. 

법까지 운운하는 '세탁기 돌리기'와 '냉장고 채우기'가 온라인 게임 클리어하는 법보다 어려울까마는, 도대체 어떤 길을 타고났길래 옷은 빨아야 깨끗해지고, 반찬은 만들어진다는 '생의 수동태'를 모르고도 살아질까.  
 
앤서니브라운 '돼지책' 표지
 앤서니브라운 "돼지책" 표지
ⓒ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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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렇게 등굣길을 나와 출근길을 따라 혼삿길로 간다. 그는 살림보다 말발에 소질 있는 여자를 만나 텅 빈 냉장고 앞에서 아침밥을 호소하는 남편이 될 수도, 인권은 알지만 냉장고 채우는 법은 모르는 의인이 될 수도 있다. '마흔 넘으면 아들은 다 아방(아빠) 닮아간다'는 제주 속설이 있다. 건실하게 살다가도 인생 중반쯤 오면 술과 도박에 빠진다는 의미다. 밥만 새로 퍼와 아들이 남긴 반찬으로 첫 끼 때우는 엄마 팔자는 누가 닮나. 

먹었으면 설거지해놓으란 엄마의 잔소리에 아내는 일찍이 아침을 거르는 습관을 배웠지만, 남편은 살림이 저절로 깨끗해지는 요술인 줄 안다. 이를 잘 닦아야 충치를 예방하듯 종일 움직여야 상하지 않는 것이 살림이다. 진보든 보수든, 서민이든 부호든 머리는 안 감으면 떡이 지고, 수챗구멍 거름망엔 빠진 만큼 머리카락이 엉킨다. 생활방정식은 가사노동이라는 엑스값을 누군가 처리해야 겨우 등값(현상 유지)을 이룬다. 제아무리 '중력장 방정식'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이라도 이 방정식을 풀지 않고는 쾌적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다.

생활방정식도 못 배운 아들에 대한 책임을 엄마에게만 묻는 건 억울한 일이다. 허나 배운 적 없는 아들이 아빠가 됐다고 '일주일만 안 닦아도 칫솔 통은 누레진다'는 엑스값을 절로 알까. 2001년 국내에 번안된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 책' 표지가 18년이 지나도 서러운 건 엑스값의 엔 분의 일이 아직 '가방 속 숙제'라서다.

'나는 노냐'며 면박을 준 아내도 속으론 죄의식을 느끼지만 애써 외면한단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남편이라도, 싸우지 않으면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지도 모르니까. 

아내의 죄의식은 인간 도리에 대한 반성일까, 학습된 여성성의 소환일까. 전자든 후자든 뿌리 깊은 유교 사회는 엑스값의 죄의식을 여성의 몫으로 돌려왔다는 것. 언급된 이 누구도 나쁜 맘을 먹은 적 없지만, 엄마가 아들과 싸우지 않으면 아내가 남편과 싸워야 하는 불공평한 구조를 공고히 해왔다.

아들의 엄마에게 물었다. 만약 당신 딸이 당신 아들에게 시집간다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딸 가진 엄마가 펄쩍 뛰었다. '남자는 장가가면 사람 된다'는 속설에 기대 '치울 날'만 학수고대하는 '예비 시어머니'. 그는 딸 가진 엄마기도 했다.

태그:#성평등, #가사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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